나는 10살도 안 된 어릴 때부터 신문배달을 했고, 군 생활을 제외한 20대를 조선일보와 경향신문의 지국에서 총무생활로 보냈다. 또 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 판촉사원과 경상일보와 경향신문 지국장 경력을 합치면 10년이 넘는다. 오래 전에 형이 오토바이 사고가 나서 화들짝 가족들이 놀랬고, 그래서 특히 엄마는 내가 신문지국 생활을 하면서 오토바이 타는 걸 매우 불안하게 여겼다. 그러나 나는 한번 택시와 작은 접촉사고는 났어도 큰 사고는 없이 무탈하게 지냈다. 나는 IMF 시절, 007퀵서비스를 여러 사람들과 의기투합해 직접 운영해보기도 했다. 이처럼 오토바이와 익숙했고, 중앙일간지와 친숙하게 지냈어도 내가 따로 신문제작에 발들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예전에 잘 알던 변재덕 목사님이 한번은 꿈 이야기를 했는데 그냥 꿈 얘기려니 하고 듣고 흘려버렸다. “꿈속에서 내가 기자가 돼있는데 컴퓨터에 연결되는 중요한 자료가 담긴 것을 시꺼먼 옷 입은 사람이 나타나서 낚아채려 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가당찮은 소리로 들었기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2012년 문체부에 굿뉴스울산을 등록해서 2013년 1월 7일 굿뉴스울산을 창간하게 됐다. 그러면서 시간이 흘러가고 불현듯 어느 순간 변 목사님이 말해준 내용이 기억났다. 그때 ‘어떤 중요한 정보를 잘 간직해야 되는 것인가’ 깊게 사유하게 됐다. 이금희 목사가 굿뉴스울산 발행인이 되고 박정관 전도사가 편집장이 돼 창간하게 된 굿뉴스울산은 그 꿈의 내용대로 이리저리 휘둘릴 뻔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더러 발행인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었고, 신문사를 좌지우지 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자꾸 돈이 들어가야 신문이 발행되고, 또 배부와 광고수주와 편집까지 여러 업무에 별로 돈이 되지 않는 것을 보고 대부분 줄행랑을 치곤했다. 여태 재정의 적자나는 부분은 발행인이 손수 메꿔왔고, 나는 편집장으로서 발행인과 함께 현장취재에 최선을 다했다. 지난시간을 돌아보면 작은 개척교회에서 참 감당하기에 버거운 시간을 문서선교에 투자했다. 지금까지 대판 12면 30만부에 이르는 지면을 발행해왔고, 인터넷 판에는 글·사진·동영상이 20,000이라는 숫자를 계수한다. 우리만 아니라 배후에서 기도와 물질로 섬겨주는 고마운 사람들과 후원교회들도 빼놓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친히 하늘에서 부어주시는 은혜가 가장 큰 격려요 위안이 됐다.
1년 전 코로나바이러스가 지구촌을 엄격(掩擊)하고 급습(急襲)했다. 전염병의 창궐을 맞아 전 세계는 항만의 물류수송이 중지되고, 비행기 이착륙이 금지돼 공항이 폐쇄될 뿐만 아니라 불안초조를 넘어서 공황(恐慌)에 빠져버렸다. 어제는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호화유람선이 전염병원이 된다고 해서 모두 하선해야 하는데 항구에 정착하지도 못했고, 어제는 파일럿과 승무원이 유망 직종이었는데 이제 직장을 떠나고 새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신세가 될 줄이야. 질병의 역습은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으니 백약이 무효란 말이 이럴때 쓰일줄 어찌 알았을까. 코로나바이러스가 인생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해 사람들이 제 아무리 과학발달과 문명사회를 외치고 명예와 권력과 돈 자랑을 해도 그것은 모래성을 쌓는 허무한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자랑하던 무릎을 꿇고 겸손히 기도의 두 손을 모아야 할 때가 아닌가. 남에게 삿대질하며 욕을 내뱉던 입술을 가릴 수밖에 없는 마스크는 반성문 같은 교훈이 된다. 코로나바이러스는 10년 전 과거로 회귀하도록 지구촌의 시간을 돌려놓았다. 후진기어에 놓고 엑셀을 아무리 밟아도 전진하지 못하듯이 사람들의 시간을 거꾸로 잡아당기는 것을 알게 된다. 굿뉴스울산 취재차량은 10년 동안 새 차를 타왔는데 그동안 누적된 재정적자와 코로나19의 환란이 겹쳐 할부원금 때문에 할 수 없이 처분했다. 신차가격만 2,600만원이고, 이번에는 아예 한 푼도 건지지 못하고 급히 처분하게 됐다. 갑자기 차가 없어지고 성탄절 신문은 찍었는데 겨우 겨우 배부했다. 하루 차를 빌리지 못해서 안타까울 때 누구 한사람에게도 선뜻 부탁하기가 쉽지 않았다.
취재차량이 없어져 배부하지 못하는 상황은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현실이었다. 발행인의 모친이 돌아가시면서 조금 남긴 보험금을 받아서 당근마켓에서 2005년식 코란도밴을 150만원에 구입했다. 장애가 있는 이금희 목사는 높은 차를 타고 오르내리는 것이 힘든데 그걸 보면서 마음이 아팠어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또 얼마 후 입금일이어서 번개장터에서 구매자와 연결돼 경기도 이천까지 코란도를 직접 몰고 가 150만원에 팔아 그날 바로 송금했다. 그리고 울산 오는 길에 차가 끊겨서 애를 먹으며 다음 날 시외버스터미날에서 택시를 타고 겨우 언약의 교회로 돌아왔다. 때마침 당근마켓에서 2006년식 마티즈밴 판다는 광고를 보고 연락했다. 50만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이었지만 수동운전을 해야 했기에 선뜻 사가는 사람이 없었다. 외관상태도 조금은 저렴한 값에 처분해야 되는 마티즈밴이었다. 어찌됐건 차량은 엔진계통에는 제법 손을 봤지만 의자는 영 아니었다. 담배냄새도 찐하게 배어 있었다. 내친 김에 폐차장도 직접 찾아다녔고, 여러 폐차장에 문의전화를 넣던 차 웅촌의 한 폐차장에 가서 사제 휠과 타이어를 모두 교체했고, 좌석도 모두 가죽 시트로 바꿨다. 스마트키만 10년 동안 썼는데 일반 차키 하나를 복사하며 스페어 키로 예비했다. 열쇠고리도 새로 장만했다. 예전에 군대를 다녀오고 울산신학교를 다니면서 중고차로 티코를 장만해서 5년간 타고 다니다가 폐차한 적이 있는데 티코 후속 모델이 마티즈였다. 국민차로 각광받던 티코의 안전성 문제를 보완하고 산뜻한 디자인을 더해서 마티즈는 우리나라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많이 팔려나갔다. 티코를 5년간 몰아본 입장에서 마티즈는 나름 매력이 있었지만 10년간 새 차량의 오디오 상태에 적응된 내 귀는 마티즈의 오디오는 불만이었다. 그래도 주유하면 4만 원에 가득차고, 값싼 주차비와 아무데나 주차할 수 있는 것은 마티즈만의 매력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번개장터에서 올드카로 불러도 될 <아반떼 오토매틱> 차량 사진을 보니까 마치 외제차처럼 멋있게 보였다. 그래서 ‘안 될거야’ 하면서도 나는 제안하는 채팅문자를 남겼다. 서로 차를 맞바꾸는 대차에 관한 제안이었다. 하루 지나도 채팅문자를 안 읽었기에 ‘언제 읽으려나?’ 하다가 그냥 채팅창에 나가기를 눌렀다. 그런데 이틀 뒤 아침에 번개장터 채팅창 알림이 울렸다. “좋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리나케 도장을 찾고 신분증을 챙기고 부산으로 달려갔다. 부산차량등록사업소에서 차량매매 계약서를 작성하면서 보험 정지하랴, 보험 가입하랴, 자동차세 내랴, 수입인지 값 내랴 우왕좌왕하면서 결국 하루를 꼬박 바쳐야했다. 부산 내려가는 길에는 정신이 없었지만 올라오는 길에는 다소 여유가 있었다. 오후 4시가 지나서 울산으로 오는 길에 언양 궁근정의 한정식 집에 들러 저녁 겸한 늦은 점심식사를 느긋하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굿뉴스울산 취재차량으로 1998년식 아반떼 오토매틱을 모셔왔다. 그래도 10년 가까운 기록의 차계부가 증명하듯 나름대로 잘 나가고 잘 서는 차에 애정을 가지며 관리중이다. 아반떼 오토매틱은 현대자동차가 자체적으로 포니를 만들어 판매하고, 엑셀과 엘란트라에 이어 만든 아반떼 초기의 2번째 모델이었기에 20년 넘게 기술의 진보를 이루면서 당시에는 획기적이었던 신기술이 이것저것 어지간히 많이 적용된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차를 타보니 이제 막 희귀성이 더해져 올드카로 비싸지겠는데 언제까지 계속 소유하며 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운전석 유리가 원터치로 한 번에 내려가는데 오르내릴 때 이격(離隔)이 생겨 바람이 조금 삐져 들어와서 롯데마트 오토오아시스에 수리하러 갔더니 부품이 조금 시간 걸린다고 해서 며칠 후 재방문해서 수리 받고 왔다. 앞 전조등도 같이 갈아 끼웠다. 10년 동안 세 번에 걸쳐 포르테쿱, K3, K3쿱 기아자동차 신차만 타고 다녀서 거래하는 카센터가 없었다. 잘 알던 분은 카센터를 넘기고 다른 정비소에 직원으로 들어갔기에 거래처가 따로 없었다. 그래서 친절하게 수리해준 사장님에게 앞으로 당분간 단골거래를 한다는 약속을 하고 돌아왔다. 차량만 아니라 새 거로 쓰던 노트북도 당근마켓에서 외국인 근로자가 연락 와서 50만원인데 40만원에 하자고 해서 “okay” 하면서 넘겼다. 소니 카메라도 번개장터에서 30만원에 거래했다. 한 달 전에 “다음 달에 월급타면 꼭 구매 할게요” 약속했던 사람을 믿고 ‘예약중’을 걸었는데 그에게는 다시 연락은 없었다. 할 수 없이 ‘판매중’으로 돌리자마자 그날 다른 구매자가 바로 연락 와서 우체국 택배로 바로 부쳐줬다. 대면접촉이든 비대면이든 서로 신뢰가 중요하다. 신뢰는 대통령의 전유물도 아니며, 어른의 것도, 아이의 것도 아니다. 믿음을 가지고 신뢰하는 당사자의 것이다. 그렇게 굿뉴스울산의 편집장으로서 취재차량과 노트북과 카메라를 다 떠나보냈다. 이 글은 도시바 노트북으로 쓰고 있다. 이 노트북은 이금희 발행인이 선물 받은 것인데 쓰라고 누구에게 준 것을 당사자가 사용하지 않아서 처음 새 거 그대로인 상태로 12년 만에 되돌아왔다. 근래 이런저런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면서 마치 주님께서 주신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하나 감사의 도장을 찍기를 바라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꼭 영적인 일들에 국한 된 것만 아니라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는 우리들이니 모든 일에 마땅히 감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이 적절한 우리 삶의 매순간들이 아닌가 곱씹게 된다.
인생에 후진기어가 들어가고 시계바늘이 10년 전 과거를 가리키는 듯 어리둥절한 현실이지만 이것은 꿈이 아니다. 기실 이금희 목사는 취재차량이 수륙양용인 듯 물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다가 나중에는 많은 목회자들이 지쳐 누워있는 섬에 도착하니 모두들 힘을 얻고 벌떡벌떡 일어나더라는 꿈꾼 이야기를 해줘서 이런 과정도 그 일부분일까 여기기도 한다. 어쨌든 굿뉴스울산의 창간에서부터 지금까지의 과정은 문서선교의 험난한 여정에 다름 아니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둔다는 성경의 메시지를 묵상한다. 그리고 사자의 표효처럼 함성을 내지른다. 여태 흩뿌렸던 믿음의 씨앗들아 들으라. 발아(發芽)하고 결실(結實)하여 풍성한 소출(所出)로 돌아올지어다. “주여, 우리의 부족함을 아뢰며 주의 긍휼의 구하니 부디 하감(下鑑)하여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