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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ra Kim May 20. 2021

미운 네 살이 끝났다.

(아이에게도) 기분은 삶의 모든 것이다.


얼마전까지 나는 셋째를 낳네 마네 했다. 둘째가 30개월, 첫째가 48개월을 넘기면서, 두 아이에게 모두 엄마로서 더 이상 '아기를 돌보는 육아'는 끝난 기분이었다. 기저귀를 뗀 게 가장 큰 몫이었을 것이다. 그런 지 얼마 안 되어서, 둘째가 한국 나이로 미운 네 살이 되었다. 떼부리기 대장이던 첫째가 갑자기 점잖아지자, 둘째는 이때다! 하고, 매일같이 온힘을 다해 울기 시작했다. "응가하는데, 말 좀 하지 말아줘 엄마." 같은 말을 하기 시작한 건 귀여운 정도였다. 이렇게 '미운 네 살'이라는 단어를 온몸으로 실감하면서, 그 기간이 얼마나 될지에 대한 기대는 애초에 접었다. 기대란 것은 사람을 종종 잡기 때문에. 그 기대에 내가 몸져 누울까봐, 아예 이 기간은 영원에 가까울 것이라며, 스스로를 포기시켰고, 당연한 결론으로 셋째를 갖지 않은 데 대한 안도감 또한 컸다.



4월 말이 생일인 둘째 수수는 생일이 지나면서, 꽉찬 36개월이 되었다. 보통 36개월이 지나면, 말도 제법 통하고, 기저귀도 떼고, 마냥 억지 피우는 아기 시절이 끝났다고 보는 편이었다. 몸의 육아가 끝난다고나 할까. 엄마의 육아 라이프에도 즐거운 변화가 찾아올지도 모르는 일인 것. 바쁜 아빠를 뒤로 하고, 아이 둘을 데리고, 이제 땅끝까지 신나게 여행할 수 있을 것 같은 어떤 홀가분한 확신. 하지만, 생일 무렵 수수는 한 번 울면 2~3시간을 지속했다. 그러니 아직 가야할 육아의 길이 멀고도 험난하다며 기대를 또 한 번 내려놓았다. 우리 수수에게서 미운 네 살은 얼마나 지속될까, 겁도 나고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3월부터 새롭게 다니는 원에서 수수는 낮잠을 안 잤다. 그러니 오후에는 급속히 피곤이 몰려오는 지, 고단해서 우는 일이 잦았다. 하원 후에 아주 사소한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너 잘 걸렸다!' 하는 식으로 짜증을 폭발했다. 차라리 체육수업 같은 걸 해서, 체력을 키우거나, 하원하는 셔틀버스에서 잠들어 오는 것이, 가족 모두에게 평화로울 것도 같아서, 아이에게 물었다. 대답은 "엄마는 내가 졸린데 수업하는 게 좋아?" 였다. 그러면서도 태권도 수업이 하고는 싶으니, 나중에 자리가 없어서 못 들어가면 안 되니까, 미리 선생님께 (대기신청) 이야기를 해달라는 것이다. 친구가 그 수업을 하고싶은데, 자리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는 것. 아직 아기에서 벗어난 지 얼마되지 않아서, 체력은 어려움이 있지만, 의지만은 충만한 아이. 그런데, 하나 달라진 것은 친구에 대한 애챡이 엄청나게 높아진 점이다.



그러던 중 우연히 같은 반 친구들과 주 2회 정도 하원 후에 계속 모여 놀게 되었다. 멤버는 늘 같지 않았지만, 친구들과 보내는 그 시간이 수수에게는 무척 좋았나 보다. 엄마가 자신의 필요를 살피고, 충족시켜줘서 행복했던 것 같다. 여지껏 없던 자신에 대한 배려라고 느꼈을 지도. 한 번 시동이 걸리면, 멈춤이 어렵던 울음은 어느새 뚝 끊겼다. 놀라웠다. 수수는 친구들과 놀고 돌아온 날에는, 피곤했을 텐데도, 엄청난 기세로 우는 일은 그만 두었다. 그리고 잠들기 전에, 오늘 친구들을 만나게해줘서 엄마에게 고마웠다고 꼭 표현했다. 자신이 보낸 하루에 대해 아빠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 이야기 할 때, 목소리에 톤이 높다는 게 느껴졌다. 경쾌하고 기분좋은 목소리였다.      



속상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어도, 자신이 왜 그런 마음의 상태인지 충분히 말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엄마가 충족시켜주고자 하면, 금세 울음을 그치고, 기분 나쁜 상태를 중단했다. 자기 컨트롤이 갑자기 되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아무튼 아이가 갑작스럽게 변해서, 지켜보던 엄마와 아빠는 의아하기까지 했다.     



어른들이 기분이 울적할 때, 맛있는 걸 먹거나, 쇼핑을 하는 이치와 같으려나. 아이는 친구들과 보낸 시간에 대한 행복감 때문에, 다른 여타의 짜증이나 힘듦을 상쇄해나가는 것 같았다. 월요일 아침은 출근시간이 정해진 직장인에게도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는 게 어렵다. 아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말 뒤에는 언제나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유치원을 가지 않으면, 친구들과도 놀 수 없다고 하니, 이내 울음을 그치고 가지런해지는 아이. 놀라운 변화다.      



바야흐로 사회성이 활발하게 형성되는 시기여서 그런 지도 모르겠다. 예쁜 공주 가방 한 개를 앞에 두고, 혹은 놀이터에 하나밖에 없는 그네를 두고, 수수는 친구에게 “너가 먼저 해!” 한다. 그것을 먼저 갖는 것보다 친구와 기분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가능해진 것 같다.     



아빠는 “수수가 별 것도 아닌 일에, 엄청나게 서럽게 우는 모습도 참 귀여웠는데,....” 라며, 이제는 온몸에 악을 쓰며 우는 아기같은 모습을 졸업한 것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다. 격동의 미운 네살, 그 짜증기가 이렇게 지나가고 있나보다. 아이 역시 악을 쓰며 에너지를 발산하는 게 중단된 게 편안해 보인다. 그것을 지켜보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몹시 흐뭇하고 시원섭섭한 주간을 보냈다. 그렇지만 셋째를 더 고려하지는 않는다. 한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고 충족시켜서, 안정감 있는 정서적 상태가 되도록 부모가 돕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임을 느껴보았기에. 나에게서 그것은 아직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지금으로서는 그 생각은 견고한 채로 꽤 오래오래 바뀌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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