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가 지나고 두 번째 새해를 맞이한 기분에 빠져있을 때였다. 클럽하우스를 들으면서 노트북으로 트위터 타임라인을 내리다가 보았다. 옆으로 누워있는 하얀 강아지의 마른 얼굴을. 순간 포포인 줄 알았다. 다른 강아지들의 사진에서 기뻐하거나 짜증 내거나 언짢은 강아지의 표정을 알아채고 그 모습에서 익숙한 포포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처럼. 나는 죽은 강아지의 얼굴이 어떤지 알고 있다. 알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는데 숨이 멎은 강아지의 가볍고 고요한 옆얼굴을 보니 단박에 떠올랐다. 한 번 밖에 본 적 없는 그 얼굴이. 사진 위에 쓰여 있는 몇 줄의 글을 읽기도 전에 나는 다시 그 상실의 밤으로 끌려갔다. 별안간 이렇게 눈물 쏟는 밤이라니.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는 애써 침착하며 현실의 내가 놓인 상황을 되짚어야 했다.
모든 강아지에게서 포포의 모습을 본다. 랜선 강아지 친구들이 모두 저마다의 특징으로 다른 귀여움을 보여주지만 결국 내가 떠올리고 귀여워하는 건 내가 가장 잘 아는 강아지다. 이 사고 회로는 액정 너머의 사진으로만 아는 강아지들이 떠난 순간에도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습관처럼 털 친구들의 계정에 들어가 소식을 확인하다가 그 친구들이 먼 길을 떠났다는 소식을 보았을 때, 그때마다 여기 없는 강아지를 또다시 떠나보내게 된다. 그리고 조용히 사진 너머로 느껴졌던 강아지 친구와 그 보호자의 깊은 애정에 기대어 그들이 앞으로 보낼 서로가 없는 날들이 덜 쓸쓸하기를 바라고는 한다.
얼마 전에는 가까운 사람의 강아지 친구가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역시나 나는 그의 강아지 친구를 사진으로 밖에 보지 못했는데, 내가 그를 알고 지낸 만큼 그의 강아지 소식도 오래 알았다. 우리는 비슷한 경험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능숙하게 위로할 수는 없었다. 그저 떠나보내는 어려움을,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외면할 수 없는 슬픔을 나눌 뿐이었다. 그래도 비슷한 경험을 담은 나의 이야기가 그의 힘든 시간에 꽤 위로가 되었다고 했다. 그럴싸한 말을 건네지 못한 채 위태롭게 슬픔을 나눠 들기 바쁜 그 자리의 나 대신에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그와 그의 강아지 친구를 생각하며 울었다. 우리가 나이를 먹긴 먹나 보다. 우리가 아는 강아지 친구들이 하나 둘 온 곳으로 돌아간다.
요즘의 나는 노견 이야기를 발견하면 여러 번 곱씹으며 읽는다. 강아지와 함께하는 삶에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는 게, 그냥 그런 어려움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내게 위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