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새벽이란 -점심을 먹기 전 지난 새벽 시간을 떠올리며-
에너지 넘치던 녀석들이 겨우 잠들었다.
자정이 다 된 시각이라 나도 그저 이대로 잠들고만 싶지만, 이 유혹을 이겨내고. 어떻게든 일어나야만 한다.
새벽을 붙잡는다. 내가 사랑하는 새벽이다.
새벽은 마치 아무도 몰라주고 몰라보던 것들의 파티 같다.
새벽에는 모든 것들이, 심지어 부동의 먼지마저도 몸을 부풀려 자신의 소리를 낸다.
나의 청력이 미세하고 섬세해져 그 작은 것들의 현란하고 우아한 움직임들을 잡아내는 것이 즐겁다.
아슬아슬하게 책상 끝에 놓인 종이가 사뿐히 흔들리다 타악 하고 떨어지는 소리와 움직임, 내 만년필의 촉이 종이에 닿아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내 엄지와 검지 손가락에 전해져 오는 사각거리는 만년필과 종이의 만남 사이 촉감들, 구체적이고 적확한 움직임들과 소리들이 내 눈과 귀로 들어온다.
모든 게 좋다.
황량한 듯 황량하지 않은 이 새벽의 내밀한 사정들을 들여다본다.
새벽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다.
농밀하지도 맹숭맹숭하지도 않다.
어딘가 모르게 균형 잡힌 적당한 느낌이다.
적어도 나의 새벽은 그렇다.
읽다만 책을 집어 들고 좋아하는 형광펜 색을 들고 밑줄을 그어가며 집중한다. 몰입의 즐거움이 내 마음을 적신다.
원탁 왼 편의 벽에 붙은 앙리 마티스의 그림을 들여다보며 물 한 모금을 정성껏 들이 삼킨다.
'시와'나 '다린'의 노래를 곱씹어가며 듣는다.
시집을 읽듯 노래를 듣는 가수들이 있다면 바로 이들이다.
하루를 되돌아보며 감사한 일들을 끄집어내 본다.
'아, 살아있고 내가 두 다리 두 팔을 가지고 이처럼 호흡하며 일상을 영위하고 있는 이 자체가 감사함이여라.'는 생각을 한다.
거의 매일 이런 생각을 하고 또 한다.
힘들 때면 시장이나 병원을 가서 삶에 대한 끈을 꼭 부여잡는 이들의 악력을 느끼고 오던 이십 대 무렵 그 버릇을 떠올려본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실망하고 뜻대로 풀리지 않고 어려워도 살아가야 하는 것. 그렇게 가끔은 꾸역꾸역 가지치기하듯 하루씩을 그저 보내어버리듯 살고, 또 어떤 때는 1분 1초가 아쉽도록 포도주를 마시고 이에 취하듯 기분 좋은 심취의 시간들로 채워진 기간도 있는 법.
높낮이가 다른 음역의 시간들이 모여 마침내 평온하고 잔잔한, 조화로운 음악이 되듯 내 삶이 갈무리되었으면 한다.
새벽의 시간이 흐른다.
내 뇌리 한편에 불이 탁 켜지고 새롭게 그릴 그림에 대한 이미지가 그 속에 들어온다.
대개는 손님처럼 들어왔다 잠잠히 차 한 잔을 하고 떠나는 이미지들인데
그러다 간혹 내게 무언의 말을 걸어오고, 몸짓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하는 이미지가 있다. 그러면 나는 그 이미지의 손을 붙잡고 악수를 하고 그와 친구가 되길 마음먹는다.
'당신을 어떻게 그려내면 될까요?'
대화를 하며 연상되는 이미지들을 하얀 페이지에 이리저리 풀어놓는다.
보통 그 이미지들은 말이 없고, 내가 무엇을 어떻게 그려내든 말없이 미소 짓는다.
내가 무얼 하든 괜찮고 멋지다며 내게 박수와 환희를 가차 없이 가져다주는 내 지원군 같다고나 할까.
결코 들뜨는 법이 없고 당당하면서도 우아한 그 이미지들을 나는 사랑한다.
이처럼 주로 새벽에 그림을 그린다.
그 새벽의 기억이 정오가 되기 전까지 잔재로 남아있을 때 나는 그것을 글로 풀어낸다.
새벽의 기억이 연기처럼 사라진 다음의 아침의 가슴은 텅 빈 것 같으나, 그 기억이 선명하게 문장 문장으로 풀어내질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들 때는
가벼운 설렘 속에 볼이 붉어질 만큼이나 기분이 좋다.
새벽과 삶이 맞닿아있다.
새벽의 즐거움을 아는 이와 달짝지근한 홍차를 사이에 두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어쩐지 그 깊고 고요한 새벽에 그이 역시 예민하게 살아있을 것 같아서.
자신을 새벽에 내던지고 헤엄칠 수 있는 사람과 지금 내가 듣고 있는 이 음악을 함께 듣고 싶다.
'흐르는 물소리 떨어지는 꽃잎 발소리 내는 것도 조심스럽게 흐르는 물속에 세상이 비치네 내 얼굴도 비춰볼까.'
시와의 <랄랄라> 중 한 대목이다.
다가오는 새벽에도 조심스럽게 흐르는 새벽 속에 우리의 얼굴을 비춰보자고.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