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한 점은 채우고 도전은 멈추지 않아!
프로스포츠는 경기를 진행하는 시즌과 경기가 없는 비시즌이 있다. 농구와 배구 등 실내 스포츠는 10월부터 4월 초까지, 야구와 축구 같은 실외 스포츠는 2월부터 12월까지 정규시즌을 치른다. 정규시즌이 끝나면 정규시즌에서 살아남은 자들끼리 플레이오프라는 경합을 또 한 번 벌이고, 플레이오프의 최후 승자는 그 해의 챔피언이 된다.
농구를 주로 맡고 있는 우리는 보통 6월부터 시즌 준비를 시작한다. 10월 개막 전 경기장 장치장식물을 비롯해 입장권, 마케팅 물품 등 모든 디자인이 완료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디자인 에이전시지만 디자인에 있어서도 기획이 필요하다. 시즌 준비를 위해 기획자인 나는 그 누구보다 먼저 움직인다.
잘 된 기획은 '내가 기획해야 하는 분야를 깊이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기획에 앞서 구단의 모든 현재 상황을 조사한다. 인터넷 기사와 인터뷰 등 찾을 수 있는 정보는 다 찾는다. 지난 시즌 구단의 전반적인 경기 흐름과 성적, FA로 인한 선수단의 변화, 감독 및 코칭스태프들의 비전 등 여러 상황을 고려해 다가올 시즌의 방향성을 기획한다. 이때 현재 상황을 기준으로 다음 시즌의 키워드를 뽑아본다. 키워드를 뽑다 보면 구단에게 강조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어떤 방향으로 디자인 컨셉과 톤을 잡아야 할지 그림이 그려진다.
기획의 방향성을 잡으면 다음부터는 순조롭게 흘러간다. 컨셉에 맞춰 여러 *캐치프레이즈(구단의 시즌 슬로건, 다음 화에 설명)를 고안하고, 경기장 내외부 장치장식물과 홍보/마케팅 물품, 기타 시설 및 마케팅 개선 방향을 제안한다. 나는 디자인이 전문 분야는 아니기에 전체적인 컨셉의 틀만 잡고, 홍보/마케팅과 개선 방향에 더욱 신경을 쓴다. 멋진 디자이너 동료분들께서 컨셉에 맞춰 작업을 잘해주시기 때문에 나는 내 할 일만 잘하면 된다.
무슨 일이든 내가 계획했던 대로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 '됐다!'라고 박수 칠 준비까지 다 마쳤는데 제안서가 떨어질 때가 있다. 디자이너분들과 함께 정말 열심히 준비하고, 이만하면 완벽하다고 생각해도 결과는 까 봐야 안다. 제안이 유찰될 때는 수많은 이유가 있다. 이미 내정된 업체가 따로 있는 상태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들러리를 섰을 수도 있고, 구단 담당자 혹은 그 윗선과 친분이 있는 업체가 선정이 돼서 떨어질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정말 우리의 기획과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들어서, 또는 운이 안 좋아서 안 될 수도 있다.
처음에는 공들인 제안서가 떨어졌을 때 타격이 꽤 컸다. 나를 비롯해 다 같이 으쌰 으쌰하며 만든 소중한 아이인데 태어나기도 전에 버려지니 문제를 다 내 탓으로 돌렸다. 내가 조금 더 참신한 아이디어를 냈어야 하나? 내 기획 방향이 잘 안 맞았던 건가? 해결 방법을 더 많이 찾아냈어야 하는 건가? 솔직히 나는 엄청난 천재도 아닌데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더 잘하는 것 같아. 등 등....... 다른 제안서를 써야 하는데 위축이 되어 멘탈이 흔들렸다.
멘탈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어느 날, 우연히 몇 년 전 봤던 '하이큐'라는 만화의 한 영상을 보게 되었다. '하이큐'는 배구 최강자를 꿈꾸는 고교생들의 이야기로, 천재라 불리는 주인공 2명이 고교 최하위 팀에 들어가 둘 도 없는 최강 콤비이자 최강팀으로 거듭나는 내용이다. 그 영상은 팀에서 분위기 메이커를 담당하는 타나카라는 학생의 이야기였다. 몇 년 전에는 주인공들의 서사에 집중하느라 자세히 보지 못한 내용이었다.
타나카의 생각을 과거의 모습과 오버랩하는 연출이어서 아래에 그 내용을 적어 본다.
난 보통 사람이라고 생각해.
체격이나 능력이나.
어렸을 땐 내가 틀림없는 천재라고 생각했다.
아니, 중학교 때까지 생각했을지도?
아니, 지금도 가끔은 생각한다.
하지만 아마 신장은 180이 되지 않을 테고,
운동 신경에 자신은 있지만
배구부 안에서 현실적으로 내가 최고인 부분은 없다.
그게 무언가를 포기할 이유도 아니고,
변명거리도 되지 않아.
그보다 애초에 평소 그런 건 생각 안 한다.
하지만 반년에 한 번 정도,
한없이 멘탈이 마이너스를 향할 때 생각해.
난 평범하다고.
그런데 평범한 나 자신아
아래를 보고 있을 시간은 있는 거냐?
타나카는 팀의 분위기 메이커인 만큼 몹시 단순하고 대책 없이 긍정적일 거라 생각했다. 어느 분야에서도 최고가 아니라는 걸 느꼈을 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마도 내가 천재였다면, 나도 비범했다면 달랐을지 수없이 자신에게 묻고 실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타나카는 나처럼 자신을 비난하는 대신, 자신을 인정했다. 평범하다고.
그리고 다시 되물었다. 평범한 나 자신아, 아래를 보고 있을 시간은 있는 거냐고.
평범함. 어디 하나 특출 난 것 없이 무난한 상태, 무난한 능력.
한 분야에서 정점을 찍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수는 있지만,
평범하다는 것은 그만큼 여러 가지를 골고루 잘 소화해낸다는 말이다.
본인이 생각했을 때는 자신이 평범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평범한 게 제일 어렵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게 어려운 현실처럼, 모든 분야에서 다 일정 부분 이상 해내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타나카는 팀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레프트든 라이트든 수비든 블로킹이든 다 가능한 사람. 그 평범함을 위해서 위를 보며 쉼 없이 훈련했을 타나카를 생각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지 않고 평범해서 안 된다고 우울해 있던 내게 강 스파이크를 날린 것 같았다.
그 영상을 보고 난 후 기획이 막히거나 제안서가 떨어질 때마다 다짐한다.
지금의 결과는 여러 이유로 인해 일어난 일이다.
설사 내 기획이 문제가 있다고 해도 좌절하지 않는다.
부족하거나 아쉬운 부분을 찾고 빠르게 수정, 보완한다.
아래를 볼 시간은 없다.
다짐을 한 이후 실제로 제안서 입찰률이 올라가고 기획도 더 좋아졌다.
우리 모두 평범한 나를 믿고 될 때까지 해보자.
될 때까지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