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도 100% 문과생이 프로스포츠에 입문하다
예나 지금이나 내 월급보다 물가가 더 오르는 불경기에 나는 시를 쓰겠다고 대학을 문예창작학과로 진학했다. 시에 대한 나의 열망은 전국에서 글로 날고 기는 천재들이 모인 덕분에 1년 만에 빠르게 사그라들었고, 이번에는 드라마를 쓰겠다고 상암 근처로 이사를 갔다. 어릴 때부터 엄마와 함께 드라마를 보며 웬만한 드라마는 다 섭렵한 나는 드라마 대본 창작 수업은 A를 받을 정도로 꽤 소질이 있었다. 하지만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곤 글만 쓰던 몇 번의 공모전을 거치며 당시 내게 드라마 작가라는 꿈은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든 뭐든 돈이 있어야 생활을 할 텐데 이렇게 가다간 거지꼴을 못 면할 것 같았다.
졸업 후 방황하던 나는 그렇게 취업으로 노선을 틀었다. 자소서를 쓰고, 내가 낼 수 있는 직무로 수백 군데 회사에 자소서를 넣은 어느 날, 서울 지역 번호로 전화가 왔다. 지방에서 태어나 02로 시작되는 전화는 잘 받지 않았었는데, 그때는 뭔가 다른 기운에 바로 전화를 받았다.
아, 이영실 님이시죠? 여기 00 회사인데요,
이영실 님 인터뷰를 했으면 해서요.
갑작스러운 면접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당장 내일 면접을 봐도 괜찮겠냐는 말에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네!!! 괜찮습니다!"라고 답했다. 몇 분 동안 연신 고개를 흔들던 짧은 통화를 마치고 주위를 둘러봤다. 취업 스터디 중 전화를 받은 터라 친구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모은 채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전화인지 조심스레 묻는 친구의 말에 면접 연락이 왔다 하니 긴장으로 얼어붙은 공기가 그제야 팍 깨졌다. 환하게 웃는 친구들과 얼싸안으며 나는 내적 비명을 질렀다. 시 쓰고 드라마만 쓰던 나는 6개월의 축제/행사 기획 인턴 말고는 스펙이 없어서 서류도 줄줄이 탈락하곤 했다. 처음으로 면접 제안을 받으니 얼떨떨한 마음과 함께 그동안의 고생들이 다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설렘과 긴장으로 두근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도착한 곳은 학동역 근처의 한 빌라였다. 1층에는 세탁소와 카페가 있는 4층 빌라의 3층이 면접을 보기로 한 회사였다. 아무리 봐도 가정집 같은 행색에 주소를 다시 검색해봤지만 이곳이 맞았다. (후에 알게 됐지만 건물주이신 할머니가 바로 위층에 거주 중이셔서 가정집이 맞기도 했다.)
여기가 흔히 말하는 좇소인가, 회사 분위기가 이상한가, 사람들이 나쁘면 어떡하지 등 등... 짧은 순간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당시 내가 가장 무서웠던 건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무엇이 부족한지 어떤 점을 고쳐야 할지도 모른 채 매번 떨어지기만 하는 자소서를 보는 건 내 삶의 일부분들이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자소서를 보내면 합격인지 불합격인지 알려주지 않는 곳도 많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이나 답변이 오지 않는 메일함을 보면 '너는 쓸데없는 일을 했어, 잘못 살았어'라고 세상이 말하는 것 같았다.
자존감이 낮아질 대로 낮아진 상태에서 면접에 합격을 하니 불러주는 곳이 이 회사밖에 없는 줄 알았다. 당시 나는 너무 절박했고 나를 알아봐 준 회사에 감사했다. 무엇보다도 면접을 본다는 사실이 '내가 잘못 살지 않았다'는 위안을 주었다. 그렇게 긍정 회로를 돌리며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밖에서 보는 것보다 내부는 꽤 넓고 안락했다. 서로 등지며 동그랗게 둘러싼 4자리와 따로 떨어져 있는 1자리가 적은 직원수를 보여주는 듯했다. 나를 불러준 회사는 디자인 에이전시로 각 자리마다 놓인 27인치의 커다란 아이맥이 가장 눈에 띄었다. 나는 기획과 카피라이터를 겸하는 직무로 지원했고, 군인처럼 빡빡 짧게 자른 머리에 검은 반팔 티셔츠를 입은 남자분이 안쪽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곳은 대표실이었다. 실무진과 면접을 보고 대표님과 면접을 보려나 했는데, 대표님과 바로 1:1로 면접을 보려니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잔뜩 긴장한 것과 다르게 면접은 인성 면접으로 대표님과 대화를 하는 수준에 가까웠다. 오히려 이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잘 모르겠어서 내가 대표님께 질문을 더 많이 했다. 당차다면 당차고, 솔직하다면 솔직한 면접을 마치고 밖을 나서니 땀이 송글 송글 맺혔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된 6월, 면접이 끝난 다음날 같은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조심스러운 내 목소리 뒤로 온화하지만 다소 사무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어제 본 인터뷰 이후로 저희가 영실 님과 함께 하고 싶어서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다음 주부터 바로 출근하실 수 있으신가요?"
그토록 바라던 합격 소식이었는데 막상 다음 주부터 당장 나오라고 하니 이상한 회사는 아닌지 걱정이 됐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런 걸 따질 마음의 여유가 없었고, 바로 그러겠다고 답했다. 어떤 회사인지, 내가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잘 몰랐다. 나를 필요로 하는 첫 회사였고, 나름 100:1의 경쟁률을 뚫었다는 점에서 가슴이 뛰었다.
그토록 바라던 합격을 거머쥐는 순간,
나는 곧장 다른 세계로 발을 들였다.
그 세계는 바로,
스. 포. 츠!
면접 때는 그렇게까지 주된 업무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프로스포츠 구단이 회사의 주된 클라이언트였다. 회사는 주로 남자/여자 프로농구단과 야구와 축구, 배구 등 기타 다양한 프로스포츠 구단과 협업을 하고 있었다. 두 살 터울의 축덕(축구 덕후) 친오빠로 인해 박지성이 맨유를 갔을 무렵부터 손흥민이 EPL 득점왕이 되기까지 함께 밤을 새우며 축구 경기를 본 적은 있지만, 프로스포츠 구단과 일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시와 소설, 드라마를 쓰던 순도 100% 문과생인 내가 갑자기 프로스포츠 전문 디자인 회사에서 기획과 카피라이팅을 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인생이 내가 생각했던 대로 계획했던 대로 되는 게 잘 없다. 취업을 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아묻따 잘 될 것이라는 긍정적 사고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변수를 항상 무서워하며 사전에 통제하려고 했다. 계획이 지켜지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폭발해 불안함이 증가했다. 그러나 인생에 밀려드는 수많은 변수를 우리가 통제하기란 어렵다. 인생을 아무 위험 없이 내가 계획한 대로만 사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오만하기까지 하다. 그동안 다치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지켰던 내 울타리가 실은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갈 수 없게 막아선 바리케이드였다는 사실을 깨닫자 용기가 났다.
나는 나를 옭아매던 바리케이드를 열고 '스포츠'라는 변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수많은 변수에 흔들리며 다치고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나만의 스토리를 쓰자고 다짐했다.
덤벼라 세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