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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가주 Dec 28. 2022

그 여름날(7) - 마지막편

짧은 창작 소설


 그와는 30년 이상을 알고 지냈다. 지내온 세월로 본다면 우리는 형제와 다름없었다. 그는 언제나 나에게 형 같은 존재였다. 그는 거짓 없이 행동했고 남에게 굽실대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연했다. 친구들은 그를 뒷말이 나오지 않는 타입이라고 평가했다. 나는 그 말이 그를 정확하게 평가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를 보며 어른들과 형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배웠다. 나는 어딜 가나 그를 따라다녔고 그가 나를 데리고 다녀 주어서 고마웠다. 또래에 비해 어른스럽고 듬직한 그가 내 친구라는 것이 자랑스러웠고 가끔은 존경스러웠다. 나는 그를 동경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를 모방하는 방식으로 자랐다. 성격은 유년기에 대부분 형성된다는 것이 과학적 사실이라면 내 성격 형성에 그는 지대한 공헌을 했을 것이다. 성인이 된 이후 주위에서 성격이 좋다며 나를 칭찬할 때면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지만, 가끔 못난 내가 싫어지는 날에는 바보 같은 나를 탓하며 부끄럽게도 그를 같이 원망하기도 했었다. 

 그런 그의 옆에서 그와 함께 나란히 걷고 있으니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나를 그의 인생에 초대해 주어서 감사한 마음과 그가 내 인생에 들어와 주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마음이 내 안에 자리 잡았다. 민우는 나를 앞서 걷더니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술집에서 먹은 안주를 게워내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며 그를 쫓아가 등을 두드려 주었다. 허리를 굽힌 채 속을 비워내고 있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나는 갑자기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거 아냐? 야구배트를 휘두를 때는 힘을 빼고 휘둘러야 멀리 칠 수 있어.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면 오히려 공은 멀리 가지 않아. 홈런을 치려면 힘을 빼야 하는 거지. 그렇지만 매번 홈런을 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 파울을 치기도 하고 삼진을 당하기도 하지. 하지만 배트를 휘두르기 전에 결과를 알 수 없지. 앞으로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생기겠지. 그럴 때 너무 위대해지려고 하지 말자. 그럴 때는 그냥 힘을 빼고 가볍게 배트를 휘두르자. 삼진을 당한다면 더그아웃으로 들어가자. 아쉬워하지 말자. 다음 타석은 곧 돌아오고 경기는 9회까지 있으니까.”

 그가 내 말을 듣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와 상관없이 나는 떠오르는 대로 말을 마구 내뱉고 있었다. 가슴속에 오래도록 자리 잡고 있던 말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 말들은 내 입을 빌려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날 우리 둘은 각자 자신의 것들을 우리의 발밑에 토해냈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해장을 하고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짐을 정리한 후 샤워를 하고 저녁을 차려 먹었다. 차를 마시려 물을 끓였고, 끓인 물을 티백이 담기 잔에 부은 후 거실로 가지고 왔다. 거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약봉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부산에 약을 갖고 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생각이 났다. 나는 컵을 내려두고 약봉지를 집어 들었다. 거실 끝에 있는 쓰레기통 앞으로 갔다. 그곳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약봉지를 들고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핸드폰을 열어 부산에서 찍은 사진들을 넘겨 보았다. 친구들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약봉지를 다시 집어 들어 쓰레기통 가장 깊숙한 곳으로 약을 구겨 넣었다. 그리곤 운동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집 근처에 있는 공원 벤치에 가서 앉았다. 먼 산 뒤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마치 붉은 빛을 띤 잔잔한 파도가 산 뒤쪽으로 물러나고 있는 거처럼 보였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연한 온기를 품은 바람이 불어왔다. 먼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었다. 얼굴을 간지럽히는 그 바람에서 소금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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