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복을 벗고 대학교에 들어갈 무렵, 나는 세상을 거창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며,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삶을 살기를 원했다. 저마다의 자기 계발서에서, 강연에서도 계획을 갖고 움직이는 게 내 목표에 가장 빠르게 도달하는 거라고 강조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자신만의 규칙과 계획을 갖고 살고 있었고 저마다의 꿈을 이뤄나갔다. 좋아, 나도 뭔가 보여줘야지. 하지만 막상 계획을 세우려고 하니 그것부터 막막했다. 뭔가를 정해놓고 실행하자니 자꾸만 결과가 예상됐다. 잘 안되면 어떡하지? 한 길만 팠다가 실패하면? 내 흥미가 떨어져서 뒤늦게 다른 게 하고 싶어 지면 어쩌나?
인생에 한 번은 열정을 불태워봐야 할 것 같고, 제대로 해내려면 딱 한 가지에 몰두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여러 갈림길 앞에서 정해져 있지도 않은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한 발을 떼지도 못하고 시간만 질질 끌었다.
우왕좌왕하며 대학 4년을 보내고, 졸업 전에 전공 관련 자격증 하나는 따놓고 싶어서 필기시험 강의를 따로 들었었다. 시험과목 하나 당 두꺼운 책 한 권의 분량을 단기간에 외워야 했다. 아침 9시,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쏟아지는 정보량을 따라가지 못한 학생들이 뿜어내는 좌절의 기운에, 강의실 공기가 물먹은 솜처럼 축 처졌다. 교수님은 강단을 가만히 바라보다 말씀하셨다.
"살아가다 보면 가끔은, 그냥 닥치고 해야 할 때가 있어요. 이게 될까 안될까 생각하지 말고 일단 해. 아무 생각 말고."
고등학교 3학년 때나 들을 법한 말을 대학 강의실에서 듣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어쩜 이렇게 뻔하다 못해 뻔뻔한(!) 말을 하셨을까 싶지만, 당시에 나는 그 말이 귀에 정을 때리듯이 깊이 박혔었다. 맞아. 걱정하지 말고 지금 주어진 일을 하자. '이런 하루가 모여 결실을 맺겠지'라는 생각 따위도 하지 말자. 지금 공부하고, 저녁이 되면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자. 그날부터 홀린 듯이 공부를 했고, 생각보다 쉽게 필기시험에 통과했다.
비록 얻게 된 자격증은 전공을 직업으로 삼지 않아 쓸 일이 없게 됐지만, 나는 하나의 감각을 배웠다. 지금 이 순간에 몰두하는 감각. 상황을 심각하고 진지하게 바라보지 않고 최대 고민은 맛있는 저녁을 뭘 먹을지에 대한 게 다인...
예능 <놀면 뭐하니?>에서 유재석이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자기는 목표나 계획이 없고,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사는 편이라 했다. 목표를 세우는 게 스트레스받는 일 중 하나라서 목표 없이 살지만, 주어진 일에는 누구보다 최선을 다한다고. 화면에서 보이는 그의 모습은 흠잡을 데가 없어서, 절제력이 강하고 목표의식이 뚜렷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단순한 선택을 하는 사람이었다.
변수란 것이 어마어마할 정해지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나에게 교수님과 유재석은 '닥치고 현재에 최선을 다해'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며,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삶을 미래에서 찾는다는 게 얼마나 아이러니한 다짐이었는지. 현실에 집중해야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보이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