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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탁의 세희 Feb 14. 2020

4평짜리 자취방에서의 첫날밤

누우면 정수리 위로 신발장이 느껴져요.

잘 있거라. 나의 고향. 나는 생을 낚으러 너를 떠난다.
- 신경숙, 외딴방


내가 신림동으로 이사를 하던 날, 아빠는 짐을 가득 실은 스타렉스 차량을 몰았다. 그게 우리가 처음으로 같이 서울에 갔던 날이다. 아빠는 성년이 되자마자 운전대를 잡았고, 내가 꼬물거리던 시절부터 지금 까지 나를 태운 채로 자잘한 사고 한 번 내본 적 없었다.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에는 지도 한 장만 가지고 초행길을 운전하기도 했고, 사고는 커녕 핸들을 손에 잡은 상태에서는 당황하는 모습도 보인 적이 없었다. 내비게이션을 켜는 모습도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런 연유로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운전 잘하는 사람은 아빠였다.


이삿날, 나의 베스트 드라이버가 처음으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았다. 처음 가보는 길인 것은 물론, 꽉 막힌 도로, 좁은 길목, 복잡한 차선 등 3시간을 넘게 달려가는 동안 그에게 닥친 문제들은 아주 많았을 것이다. 동네에 들어서서 어딜 가도 비슷해보이는 골목 탓에 같은 곳을 몇 번이나 돌아서야 건물 이름을 발견하고 겨우 차를 댔다. 도착해서는 진이 다 빠졌을 텐데도 묵묵히 이삿짐을 꺼내서 엘리베이터가 없는 나의 4층 집 계단을 오르내리며 빠르게 짐을 날라주셨다.


스타렉스 차량을 꽉 채웠던 짐은 한 사람의 세간살이로 봤을 때 그다지 많지 않았다. 다행히 좁은 방에 걸맞는 만큼의 부피를 차지했다. 큰 짐을 제 위치에 놔주는 것 까지 마친 아빠는 딸의 첫 서울 자취방을 돌아보며 너무 좁다고 혀를 찼다.


"그래도 내 방만하지 않아?"

"무슨! 네 방 보다도 훨씬 좁구만."

"그런가?"

"그래! 훨씬 좁아, 훨씬."


어딘가 화가 난 듯한 목소리에 얼굴을 살피자 말로 형언하기 애매한 표정이 떠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속상했던 거겠지 싶다. 이만 가보겠다 말하며 한 번 더 방의 내부를 짧게 훑는 모습에 기운차게 "잘 가! 오늘 정말 고마워!"라고 인사했고, 아빠는 "그래, 잘 살고..." 같은 말을 하며 복도 모퉁이로 사라졌다.






앞으로 최소 1년 이상은 살아야 할 곳이었지만, 얼떨떨해서 실감이 나지 않았다. 햇빛이 잘 드는 창문을 활짝 열어둔 채 청소를 하고 짐을 정리했다.


차츰 정리가 되었을 쯤에는 해가 져있었다. 쉬고 싶어서 이불을 깔고 누웠더니 두 사람 정도 누울 만한 면적의 천장이 보였다. 새삼 정말 좁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 말을 듣고 나니 내 방 보다 좁은 곳이라는 말이 괜히 신경 쓰였다. 밥 하고 빨래하고 자고 샤워하는 곳이 잠자고 컴퓨터나 하던   보다 좁다니.


핸드폰을 충전하려는데 콘센트가 책상 아래에 있어서 멀티탭이 필요했다. 지친 몸을 꾸역꾸역 일으켜 나갔는데 얼마 못 가 발이 딱 멈췄다. 대형마트가 없었다. 멀티탭 하나 사는 일 조차 이렇게 어렵고 막막할 일인가 싶어 문득 서러워졌다. 우선 지도 검색 앱을 켜서 몰(mall)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포도몰을 향해 걸었다.


지도 앱에 코를 처박고 걷다가 사거리 신호등 앞에 이르러서 주변을 돌아봤는데, 나를 제외한 주변 모두가 가족이나 친구 혹은 연인과 함께였다.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거리의 모습을 그만큼 이질적으로 받아들여본 적이 없었다. 지금 서 있는 거리가 내 세상의 전부로 축소되었다. 이 세상에서 나만 혼자인 것 같았다. 어제까지는 나도 저 사람들과 같았지만 앞으로는 언제 저 사람들처럼 평범한 모습으로 거리를 거닐게 될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에선 고립감이  튀어나와  생각에 의견을 보탰다. '네가  사람들처럼 되는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거야.' 서울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던 나로서는 어떤 희망 어린 항변도 해볼 수 없었다.


왈칵 겁이 났다. 지도 앱을 봐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밤거리가 무섭고, 정체 모를 포도몰을 탐험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 돌아가려고 뒤돌아서 눈에 보이는 편의점에 들어갔다. 멀티탭 같은 것도 있느냐는 물음에 손으로 말없이 쓱 매대를 가리키던 아르바이트생은 애석할 만큼 시크했다. 기능에 비해 가격이 비싼 물건 값을 치르고 뛰듯이 집에 돌아왔다.


곧장 돌아온 집이 안식처처럼 느껴졌다면 좋았겠지만 서울 땅에서 유일하게 안다고 말할 수 있는 나의 집도 고작 세 번째 방문이었다. (계약 전에 한 번, 이삿짐 나르며 한 번, 그리고 지금.) 낯설었을뿐더러 여전히 너무너무 좁았다. 멀티탭을 얼른 꽂고 누웠다. 세로로 좁아터진 천장을 보기 싫은 마음에 옆으로 누워 새우처럼 몸을 웅크렸다. 그럼에도 언뜻 보이는 시야로 내 방의 모든 면적이 한눈에 들어와서 속이 상했다.


취업할 수 있는 길이라며 여기까지 질주해 와 놓고, 새삼스레 뒤를 돌아봤다.


'서울에 취업하는 게 이 모든 걸 감당할 정도로 가치 있는 일이었던 거야? 누우면 신발장이 코 앞에 있는 이 곳에서 앞으로 먹고 자고 한다고? 넓은 곳으로 나아가긴커녕 좁은 감옥에 스스로를 가둔 거 같은데? 잘 되어가고 있는 거 맞아? 이게 정말 내가 원한 게 맞는 건가?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곳에서 떨어져 나와 고작 뭘 선택한 거지?'


어제 까지 행복한 일상을 살다가 불현듯 기절해 눈을 떠보니 좁은 독방에 갇힌 듯한 기분이었다. 모든 게 얼떨떨하고 두려웠으며 불안했다.


이불에 쏙 들어가서 남자 친구와 통화를 했다. 혼자라는 게 너무 겁이 나고 외로워 찔찔 짜자 그가 나를 진정시키려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주었다.


"너무 걱정 마! 내일 학원 가서 친구들 새로 사귈 수 있을 거야!"

"그렇지? 학원 가면 또래들도 많으니까, 새 친구들 백 명 사귈 거야!"

"그럼! 우리 세희 잘할 수 있어! 내가 곧 서울 올라갈게!"

"웅. 정말 고마워! 얼른 취업하러 올라와 보고 싶어!"


따듯한 위로에 힘입어 두려운 마음은 많이 없어졌지만, 정수리 바로 위로 신발장이 느껴지는 건 여전히 속상해서 전화를 끊고 난 후엔 조금 더 울다가 형광등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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