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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Apr 21. 2020

누군가의 무엇이 된다는 것

사람 손이 두 개인 이유

운동하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가족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헤드코치님만 해도 가족, 크로스핏. 음식. 본인의 인생을 이렇게 세 갈래로 나눈 후 거기에 맞게 충실히 살아갔다. 운동을 같이 하는 오빠들도 마찬가지였다. 딸. 아들. 가족. 와이프. 대부분의 삶이 가족을 중심으로 흘러갔다. 운동하는 시간을 제외하고서는 거의 모든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냈다. 언젠가 친하게 지내는 오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너 왜 사람 손이 두 개 인지 알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한쪽엔 꼭 놓지 말아야 할 걸 쥐어야 하고 다른 쪽엔 나를 위한 걸 쥐라고. 그러니까 이 손엔 좋은 아빠,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같은 게 있다면 다른 손에는 크로스핏이나 운동이  있는 거지.”


벌써 5년째 이 운동을 꾸준히 해온 오빠였다. 나는 문득 내 두 손을 내려다보게 됐다. 손바닥을 오므렸다 폈다를 반복했지만 쉬이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 후로도 한참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여전히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가족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늘 엄마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엄마를 생각하면 항상 마음 한 구석이 짠했다. 늘 현모양처였으며 어느 때에는 가장이었고 누구보다 강하지만 또 누구보다 여린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엄마가 아닌 박영미로서의 삶을 살지 못한 게 유난히도 마음이 아팠다. 그게 나 때문인 건가 싶어서 자식 된 입장에서는 늘 빚을 지는 기분이었다. 평생 나보다 남을 위해 사는데 고생한 엄마에게 나는 무얼 더 할 수 있을까?  필요한 게 없냐고 물으면 엄마는 늘 단호하게 일침 했다.


 "네 앞가림만 잘하면 돼. 회사 잘 다니고 있지? 우리 딸은 언제 시집갈까."


이런 말을 들을 땐 그저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엄마가 바라는 대로  수 없으니 아무래도 난 늘 부족한 딸일 수밖에 없겠다 생각하면서 말이다.   


연마다 돌아오는 명절엔 안 그래도 많은 엄마의 일이 더 많아지곤 했다. 설거지, 상차림 돕기, 손님맞이부터 시작해 아빠와의 시비 조율, 크고 작은 다툼 중재 등 여러 가지 일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크로스핏으로 따지자면  정해진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횟수를 반복하는 AMRAP(As Many Rounds As Possible)  운동이나 다름없었다. 그마저도 제한 시간이 없으니 세상에서 제일 힘든 와드였다. 나름 체력 꽤나 있다고 자신했는데 명절에는 나 또한 골골댈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일이 끝나면 잠시 쉴 겸 안방으로 도망가 안마기를 켜고 몸을 눕혔다. 덜덜덜 돌아가는 안마기 위에서 진이 빠진 채 멀거니 천장을 바라보면 어김없이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할머니의 딸, 아빠의 와이프, 나의 엄마. 크로스핏으로 따지면 거의 선수급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인한 사람.


"다 쉬었으면 이리 와서 설거지 좀 해줄래"


현실판 엄마 목소리엔 한껏 날이 서있었다. 누군가의 무엇이 된다는 건 정말이지 참 어려운 일이었다.

산처럼 쌓인 설거지를 끝내고 나니 밖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고 쓰레기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오늘은 웹툰을 올리는 날이었다. 빨간 날인데도 불구하고 출근하는 날보다 그림 그릴 시간이 없다니 이건 말도 안 되지 않은가. 저녁 8시가 한참 지나서야 태블릿과 펜을 꺼내 들었다. 온종일 한 게 집안일뿐이라 그릴 것도 집안일 얘기밖에 없었다. 어제 오늘 있었던 이야기들을 어떻게든 운동으로 엮어서 그림을 그려나가는데 엄마가 그런 나를 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런 얘기 누가 좋아한다니. 엄마나 이렇게 살지 요즘 애들은 그런 거 공감 못할 거야."


고무장갑을 낀 엄마 모습을 막 그리고 있던 참이었다.


"올려봐야 알지."


볼멘소리로 말하고서 다시 그리기에 집중했다. 자정쯤에 가까스로 웹툰을 올렸고 곧장 안방으로 갔다. 엄마 옆에 쓰러지듯 누워서 웹툰 반응을 살폈다.


"있지. 엄마. 좋아요 그래도 벌써 20개 됐는데? 10분 지났는데"


엄마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흔들리는 눈동자가 보였다.


"그런 얘기 누가 좋아한다고. 계속 핸드폰 보고 있으면 눈 아프니까 끄고 자자"


덤덤하게 말하며 눈을 감는 엄마. 괜히 마음이 울컥했다. 우리 엄마는 크로스핏으로 따지면 멧 프레이저 급인데 왜 저렇게 자신감이 없는지 속상할 뿐이었다. 그 밤 돌아 누운 엄마 옆에서 어린아이처럼  몇 번이나 이름을 불렀는지 모르겠다.   




사람 손이 왜 두 개인지 아냐는 말을 들은 지 얼마 안 돼 인스타그램에서 그림을 하나 보게 됐다. 초등학생 아들이 오빠를 떠올리며 그린 그림이었다.



한참을 그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다시 한번 내 손을 내려다보게 됐다. 무엇을 쥘 것인가. 무엇을 쥐어야만 하는가. 1인 가구로써 결혼이란 제도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나였다. 결혼을 생각하면 어김없이 엄마 얼굴이 떠오르고 그러다 보면 대답을 더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애초에 결혼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어. 고양이가 옆에서 바스락거리기만 해도 신경 쓰여서 일어나는데. 처음부터 내가 이런 줄 알았으면 결혼 같은 거 안 했을 텐데."


생각해보면 오빠에게 질문을 들었던 날, 앞에 앉은 언니도 이런 말을 했다. 언니는 한번 결혼하고 돌아온 싱글이었다. 다른 회원이 그런 언니를 보며 첨언했다. 그래도 아직 창창한데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지. 오빠가 불쑥 대답했다.


"결혼을 또 한다고? 왜 해 그걸. 다시 돌아가면 결혼이란 제도에는 속하지 말아야지. 알고서도 또 한다고?"


누구보다 가정에 충실한 오빠인데 참 이율배반적인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노아 바움백 감독의 영화 <결혼 이야기>처럼 어쩌면 누군가의 무엇이 된다는 건 정말로 어려운 일일지 모르겠다. 평생 한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과 평생 누군가의 와이프, 누군가의 엄마로 살아간다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일 테니까.


얼마 후 나는 펜을 쥐었다. 웹툰 손이 두 개인 이유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여전히 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고 앞으로도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하지 못하겠다. 그렇지만 좋은 질문은 질문 자체에 이미 답을 내포하고 있다는 말처럼 당분간은 가슴에 이 질문을 묻어두기로 했다. 잊어버리지 않게 그림으로 남겨 오래도록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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