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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May 30. 2020

핵인싸 소리 듣는 법

바꿀 수 있는 건 나 자신 뿐

인싸라는 소리를 듣는다.

어디서든 잘 어울리네 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주변에 사람이 많다.


매일 같이 커뮤니티 운동을 한다.

운동이 끝난 후에는 인스타그램에 오늘 수행한 운동 인증 기록을 올린다. 운동 좋아하고 활기찬 친구들이 댓글을 남긴다.


오늘도 너무 수고했어. 살살 뛰자. 멋져. 건강미.


그렇게 나는 점점 인싸가 되어간다.

.

.

.


생각해보면 중고등학교 때 나는 거의 존재감이 없었다. 어느 날의 나는 기 센 친구들에게 탈탈 털린 분필 털이 같았고, 또 어느 날의 나는 빨아도 빨아도 땟국물이 나오는 걸레처럼 깊은 우울감에 빠져있었다. 당당하게 마이 웨이를 외치는 자발적 아싸도 아니었던 내가 성인이 되어 인싸처럼 보인다는건 정말이지 아이러니했다. 나무위키에서 찾은 인싸의 사전적 용어는 아래와 같았는데


1) 무리 내에서 겉돌지 않으며 존재감이 확실하고 호감형 이미지를 가지고 있음

2) 타인과 두루 친하고 현실에서 열심히 사는 사람


요즘은 인싸라는 용어에 관종 끼가 포함돼있어 다소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경우도 있다만 어찌됐든 내가 속한 그룹에 잘 어우러진다는 의미에서는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좋다.


"넌 열두시반 마스코트지."


이런 말을 들으면 내가 꼭 필요한 사람 같아서 자존감이 높아지기도 했고


"우린 크강이잖아. 우리 백마잖아."


이런 말을 들으면 어딘가에 소속됐다는 것 하나만으로 기댈 곳이 생긴것 같아 든든해졌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모두가 자기만의 인싸력를 찾는 방법에 대해 말해볼까 한다.




살다보면 아무리 노력해도 잘 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껴달라고 그렇게 비집고 들어가는데도 어김없이 나를 밀쳐내버리곤 했다. 마치 카프카 소설 「공동체」 속 우리 다섯처럼 말이다.


그는 우리한테 아무짓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귀찮다. 그러니 그것으로 충분히 무슨 짓인가를 하는 것이다. 싫다는데도 그는 왜 밀고 들어오는 것일까. 우리는 그를 모르며 우리들한테로 받아들이지 않겠다.


소설 속 그는 다섯이라는 공동체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여섯번째 사람이다. 그에게서 특별히 모나거나 잘못된 부분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다섯의 공동체가 이미 형성돼버렸기 때문에 여섯번째인 그를 받아들이기 싫다는 것 뿐.


우리 다섯도 전에는 서로 잘 몰랐으며 굳이 말한다면 지금도 서로 잘 모른다. 그러나 우리 다섯에게서 가능하고 참아지는 것이 저 여섯번째에게서는 가능하지 않으며 참아지지도 않는다. 그 밖에도 우리는 다섯이며 여섯이고 싶지 않다. 그런데 도무지 이 끊임없이 같이 있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이 있단 말인가.


읽다보면 참 답 없는 이야기란 생각이 든다. 관계라는 건 본디 상호작용으로 진행되는 거라 내가 아무리 좋아해도 상대방이 밀어내면 답이 없다. 뉴턴의 제 3법칙,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을 인간관계에 가져와서 말해보자면 계속해서 밀려나다보면 반대로 그만큼 더 집착하거나 그만큼 더 싫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런 답 없는 문제에 고민하고 좌절할 바에야 그 시간에 또 다른 문제를 양산하는게 낫지 않을까. 내가 생각한 답에 근사값에 달하는, 혹은 내 답이 곧 정답인 그런 문제 말이다.



내가 이년째 지속하고 있는 달리기와 크로스핏은 기본적으로 커뮤니티 운동이다. 여기서의 달리기란 혼자 뛰는게 아니라 러닝 크루 또는 동호회에 속해서 달리는 걸 의미한다. 크로스핏은 애초에 함께하는 그룹 운동으로 설계돼있다. 둘 다 적게는 두명, 많게는 수십명이 함께하는 운동이기 때문에 처음 시작할 때는 다소 주저했다.


'내가 과연 적응할 수 있을까? 더는 사람에게 상처받기 싫은데.'


그즈음 나는 혼밥의 정석을 찍고 있었다. 예스맨으로 일하던 회사 생활에 염증이 날대로 나버렸고 업무 외적인 일로는 더 이상 부딪치고 싶지 않았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처럼 거의 매일 같이 가슴에 대못 박히는 일들이 일어났다. 하루 8시간 이상 근무하는 직장도 이러한데 단체 활동이나 동호회는 할 수나 있을까? 두려웠지만 두 눈 질끈 감고 일단 시작은 했다. 운동이라도 하지 않으면 도무지 답답한 마음을 풀어낼 공간이 없었으니까.


우리는 유령처럼 달리기만 하고 흩어집니다. 오로지 운동 외에는 다른 친목은 하지 않겠다는 카피를 내건 달리기 동호회에 들어갔다. 월요일, 목요일 일주일에 두번 있는 정기런에 꽤 오래 열심히 참여했다. 크로스핏 또한 사생활을 터치하지 않기로 일순위라는 점심반에 뿌리를 내렸다. 하루 중 제일 소중하다는 점심 식사를 포기하고 오는 이들이라 간섭 없이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이쯤 되면 내가 여섯이 될 수 있는 확률을 얼마나 줄이고자 노력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매일'또는 '자주'라는 단어가 붙어버리자 나는 절대 여섯이 될 수 없었다. 일단 안면을 트고 눈인사를 하게 되니 대화를 하게 됐고 자연스레 친해졌다. 친해지면 찾게 됐고 계속 찾게 되면 오래도록 함께 하고 싶어졌다. 유령 이미지를 표방했던 달리기 동호회는 어느새 스탭 급에 준하게 위치가 격상했고, 각종 달리기 관련 행사에 동호회 소속 페이서로 뛰게 됐다.

*페이서(달리기 대회 참가자들이 무리하지 않고 목표하는 시간대에 달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페이스 메이커)


크로스핏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년만에 겨우 몇 마디 사적인 말을 튼 오빠들과 어느샌가부터 허물 없이 대화하고 장난치며 투닥거리게 됐다. 어쩌다 하루라도 점심 반에 빠지는 날이면 운동을 같이 하는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냐고. 얼른 오라고. 그리하여 나는 여섯이 아닌 우리 다섯이 돼버렸다.


'욕심이지만 더 이상의 변화 없이 이 멤버 그대로 쭈욱 갔으면 좋겠다.'


스스로 이런 생각을 하는게 놀라울 지경이 돼버릴 정도로 카프카 소설 속 우리 다섯처럼 여섯을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사람이 돼버린 것이다.

그렇게 나는 인싸가 됐다.




사실 나는 지금도 내가 외향적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나와 맞는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을거라고는 이전보다 더 확신하고 있다. 직장에서 최악인 상사가 집에서는 좋은 아빠 최고의 남편이 될 수 있듯이 인간관계, 커뮤니티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라는 사람이 A라는 집단에는 맞지 않아도 B라는 집단에서는 꼭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걸 항상 머리속에 새기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 타인 또는 타인들에게 상처받지 않고 나를 온전히 잘 지켜낼 수 있다.


"운동이 그렇게 좋아? 아주 운동 선수 되겠네."

"비 많이 오는데 오늘도 운동 가겠다고? 법카 잔액도 많은데?"


처음에는 회사에서도 나를 이상하게 여겼다. 뭐든 부탁하면 곧잘 네네 하던 애가 라고 말하질 않나. 점심시간에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운동을 가지를 않나. 일을 그렇게 좋아하던 애가 퇴근 시간 딱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 또 뛰러 간다 하질 않나. 떠보거나 비아냥 거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네 그러려구요."


운동을 꾸준히 하다보니 마음에도 근육이 붙어버린 걸까? 단단하다 못해 당당해져버린 내 모습이 스스로도 놀라울 지경이었다. 이왕지사 근육이 붙어버렸으니 조금 더 강해져볼까? 조금 뻔뻔하지만 이런 생각도 했다.


'죄도 없는데 여섯 좀 받아주지.'


예전에만 해도 여섯이 너무 불쌍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여섯이 다섯이 되려는 게 의미 없다는 생각을 한다. 밖에서 안이 되려고 하지말고 그냥 내가 안이 되면 될 것 아닌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초능력자가 아닌 이상 상대방을 내 입맛 따라 바꿀 수는 없다. 결국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나 자신 뿐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여섯에서 다섯이 될 것이냐, 아니면 별로 힘 들이지 않고 또 다른 넷을 찾아 다섯을 만들 것이냐. 그건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을 것이다.   


예로 나는 관료주의 풍조와 보여주기식 업무가 팽배한 회사 생활에 이미 지쳐버린지 오래였다. 사회 생활 잘하고 커뮤니케이션 잘하는 것도 일이라지만, 그것도 마음에서 우러나야 하는 거지 스스로 이해되지 않는 행동에 계속해서 머리를 숙여야 하는 거라면 굳이 이제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세상엔 정말 많은 회사가 있고, 팀이 있으며, 또 그만큼 다양한 일의 형태가 있을 테니까.


이는 모든 커뮤니티에 마찬가지로 적용되는데 세상엔 정말 많은 러닝 동호회가 있으며, 하다 못해 한 개의 크로스핏 박스에도 변동 가능한 정말 많은 시간대가 있다. 그걸 알면 너무 하나에 매몰되지 않아도 된다. 그리하여 타의적 아싸에서 자발적 아싸로, 더 나아가 인싸로 바뀔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 없듯이 나 또한 모든 사람을 좋아할 수 없다는 불변의 이치를 깨달으면 마음이 좀 편해진다. 이는 일에도 취미에도 적용된다. 인맥 관리보다 성취감 갖는게 좋으면 그냥 일만 열심히  잡히지 못할 정도로 잘하면 된다. 굳이 일이라는 걸 둘러싼 회사 체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전부 다 좋아하기 위해 나를 갈아넣으며 상처 받지 않아도 된다.


취미에 있어서도 같이 하고 싶은 사람들 몇몇과 함께  흘리고 웃고 즐기면 되는 거지 소속된 공동체 전체를 좋아해야할 필요는 없다.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 내게 정말로 소중한 사람들  두명과의 관계를 온전히 지켜가기에도 인생은 너무나 짧으니까. 그렇게 나를 지키고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며 서서히 나와 맞는 공동체를 찾아나가면 된다. 결국엔 모두에게, 또는 모든 것에 똑같이 잘할  없다는  인정해야만 한다. 적어도 우리라는 이름이 폭력으로 다가올 때는 과감히 내려놓자.



달리는 크린이 @cross__run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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