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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Mar 08. 2020

정말 천사인 줄 알았어  

일상에서 발견하는 더 나은 사회 구현

“우즈벡 음식 먹어봤어?”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우리는 약속 장소였던 서점에서 이제 막 나오던 참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진짜 맛있는데~로 시작해서 너도 좋아할 거야.라고 확신 형 어조로 끝마치는데 갑자기 웬 우즈베키스탄 음식인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주꾸미 먹으러 가기로 했는데 갑자기 우즈베키스탄? 그제야 친구는 자기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내놓았다.


“내 머릿속에 영화처럼 잊어지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는데... 정말이지 천사인 줄 알았어.”


볼이 상기된 채 운을 떼는 친구가 낯설었다. 본래 좋은걸 좋다고 표현하는데 서툰 친구였다.


“이번에 우즈벡 출장 다녀왔잖아. 유학생들 데리고 우즈벡 석유회사 견학했거든. 견학 다 끝내고 나오는데 회사 앞에 어떤 할머니가 구걸하고 있는 거냐. 약 살 돈이 없습니다.라고 쓰여 있던 것 같았는데 그냥 무시하고 갔어. 왜, 한국에서도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들 많잖아. 뒤에서 자꾸 뭐가 웅성거려서 봤더니 애들이 다 주섬주섬 돈을 꺼내서 할머니 손에 쥐어주는 거야. 그것도 그냥 쥐어 주는 게 아니라 한 명 한 명 할머니를 안아 주면서! 놀라서 보는데 애들이 눈물 흘리고 있었어...”


격양되고 떨리는 어조로 말을 잇던 친구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더니 내게 물었다.


“진짜 애들 너무 착하지 않냐? 천사야. 전혀 때 묻지가 않았어.”


나는 웃으며 말했다.


“너 정말 좋은 일 하구나? 네 학생들 진짜 착하네”


잠시 당황하던 친구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이번 출장은 정말로. 너도 봤으면 공감했을 거라니까?”


친구는 손짓 눈짓을 더해가며 어떻게든 천사를 만난 경험을 소상히 설명해주려 했다. 보진 않았지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나 또한 그 자리에 있었다면 우즈베키스탄 친구들 머리 위에서 엔젤링을 봤을 것이다. 사람이 타인의 슬픔에 공감한다는 것, 진심으로 위로해준다는 건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일이니까.   

저녁을 먹는 내내 우리는 비슷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하나에 빠지면 온통 그 하나에 대해서만 얘기하는 게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가 계속 친구일지도 몰랐다. 핸드폰을 꺼내 든 친구가 출장 사진을 보여주며 우즈베키스탄 학생들을 거듭 칭찬했다.


“이번에 우리 학교에서 견학 스케줄 짰던 곳이 다 회사나 은행권이었거든. 애들 본국 돌아가면 취업해야 하니까! 마지막 날에 시간 좀 남았는데 애들이 고아원 방문하자 그러더라고. 본인들 돈으로 학용품도 사고 진로 상담 들어주고 한국 유학 얘기도 해주는데.. 와.. 나 정말 감동받았어. 봐봐. 너무 착하지 않냐?”


너무 착하지 않냐라는 말만 벌써 열 번째였다. 동어 반복이 지칠 만도 한데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힘이 다. 오랜만에 보는데도 일 얘기를 계속하는 친구 모습을 보니 정말로 잘 맞는 일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어 나조차도 기분이 좋아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친구는 서울 소재 의료기기제조회사 해외영업 파트에 속해있었다. 그때는 햇빛 못 받은 식물처럼 힘이 없고 다소 예민했었다. 제조업 특유의 남성 중심적이고 권위적인 분위기에 힘들어하던 친구는 결국 연고도 없는 지방 대학 교직원으로 이직을 했다. 지금은 전공인 영어를 살려 교내 유학생들을 케어하고 있지만 여기도 생각보다 일이 많고 갑질도 겪는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우즈베키스탄 출장이 큰 힘이 됐다면서 다시금 자신의 학생들을 칭찬했다. 이러나저러나 친구는 이미 우즈베키스탄 학생들의 착한 심성에 홀딱 반해버린 것 같았다. 그 밤, 무엇에서든 감정 표현이 거의 없던 친구가 상기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서 자꾸만 웃음이 났다.  




최근 감명 깊게 읽은 김은진 작가의 에세이 『동거 식물』의 맨 마지막 장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인간은 이다음에 다른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자라도 나무이듯, 더 자라도 그저 내가 될 뿐. 그리고 무엇을 먹고 어찌  살아가는지 보다 중요한 것은 어쩌면, 나로 인해 어떤 타인이 먹고살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나는 이 문장에 밑줄 그은 채 꽤 오래 곱씹어 읽었다. 한 단락을 거의 다 외울 정도였는데 아마 요즘 내가 빠져있는 게 대개 이런 쪽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어떻게든 다른 생명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고 그게 선한 쪽으로 작용된다면 사회가 보다 긍정적으로 변모하지 않을까? 사실 이러한 선한 영향력은 내가 좋아하는 크로스핏과 달리기를 통해서도 매번 만나왔다.


작년 9월부터 올해 2월까지 반년 간 호주 산불이 진압되지 못했다. 서울의 약 200배에 달하는 면적이 불에 타서 사라졌고(1,100만 헥타르의 삼림 손실) 화재로 인해 33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10억 마리 이상의 야생동물이 죽었고 호주 대표 동물인 코알라는 그 종 자체가 독자적 생존이 불가능한 '기능적 멸종 위기종' 상태에 이르렀다. 전문가들은 지구온난화로 인해 이상 기후가 발생했으며 낮은 강수량으로 호주 산불이 더 확산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결국 무분별한 개발과 인간의 이기심이 대규모 자연재해로 이어진 것이었다.


크로스핏에서는 #koalachallenge(코알라 챌린지)라는 소셜 챌린지를 통해 야생동물보호기금을 모금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운동기구 벤치를 나무로 보고 코알라처럼 한 바퀴 돌면 참여가 완료되는데 이때 바닥에 몸이 닿으면 챌린지 실패로 간주됐다. 참여가 모금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사진이나 영상으로 인증 기록을 남겨 개인 소셜에 #koalachallenge 해시태그를 삽입해 업로드해야 했다. 세계적인 크로스핏터 맷 프레이져가 이 캠페인에 동참했고 인스타그램에 #koalachallenge 검색 시 5,000개의 게시물을 찾을 수 있을 만큼 많은 크로스핏터들이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일각에서는 이 챌린지를 통해 기부가 된다는 걸 확인할 수 없고, 결국 본인 홍보용으로 게시물을 올리는 게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른 입장인 게 이러한 챌린지는 얼마나 모금되느냐도 중요하지만 챌린지 자체의 순기능에 주목하는 것도 중요했다. 한 명의 사람이 챌린지 참여 게시물을 개인 소셜에 올리면 팔로우들이(대개 관심사나 취미가 유사한 사람들) 아, 이런 게 있구나 알게 되는 것부터가 이미 긍정적인 신호다. 사람은 알게 되면 관심 갖게 되고 관심 갖게 되면 행동하게 되는 법이다. 그리하여 의도하지 않았지만 제삼자가 챌린지에 참여하게 되고, 그 모수가 더 커진다면 이 챌린지는 성공한 기부 캠페인이 되는 것이다. 이는 애초에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과 확연한 차이가 난다. 실제로 내가 다니는 크로스핏 박스 회원 분들도 코알라 챌린지의 취지를 알게 되자 관심을 가지며 응원하거나 몇몇은 자발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것과는 별개로 호주 야생 동물 보호 단체따로 기부하신 분들도 있었다.


달리기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은 이어져왔다. 우리는 종종 플로깅(조깅을 하면서 동시에 쓰레기를 줍는 운동)이나 유기동물 기부런(소정의 러닝 참여비를 받고 러닝이 끝난 후 유기동물보호단체에 기부)을 했는데 이를 통해 길거리에 암암리에 버려지는 쓰레기가 얼마나 많은지 체감할 수 있었다. 연 중 유기동물이 가장 많이 생겨나는 시기가 여름휴가 기간이라는 것 또한 알게 됐는데, 이러한 일련의 활동들을 하다 보면 인간이 정말 이기적이라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이러한 작은 움직임, 소소한 노력들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최근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인해 국내 3대 마라톤인 동아마라톤 또한 취소됐다. 이에 참가비를 바이러스 종식을 위한 성금(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으로 내자는 의견이 러너들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친구들이 먼저 소셜에 참가비 기부 인증을 하면 이를 보고 또 다른 친구들이 인증하는 선순환이 일어났다. 이러한 선행을 보며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기후 변화를 일으킬 수 있듯이, 이타심에 근간한 행동들이 지속되고 확장된다면 더 좋은 사회를 만드는 초석이 될 거라고 믿게 됐다.


일이든 취미든 일상에서 사회적 가치 창출이 가능한 일을 자발적으로 떠올려보는 건 좋은 일이다. 보다 건강한 사회가 된다면 그 사회 안에 속한 나 또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너무 크지 않아도 좋고 너무 대단하지 않아도 좋다. 우즈베키스탄 학생들이 거리에서 구걸하는 할머니를 안아준 것처럼, 견학 프로그램에 고아원 봉사를 넣은 것처럼, 운동하는 사람들이 챌린지나 기부 런을 하는 것처럼 사실 따뜻한 행동은 마음만 먹으면 어디에서든 해낼 수 있다. 소소하면 소소한대로 가치 있고 이행하기도 더 쉬울 것이다.  


“그거 해서 뭐해?” “얼마나 도움된다고?” 간혹 이렇게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서 “그것도 안 하면 뭐해?” “얼마나 도움될지 모르는데?”라고 대답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안 된다고 생각하면 끝도 없고 아주 작은 변화라도 가치가 있다. 변화는 변화한다는 것 그 자체에 주목해야 한다. 바꿔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테니까. 더 좋아질 희망조차 꿈꿀 수 없다면 그건 결국에 더 나빠질 수밖에 없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닐까?

좋아하는 일, 좋아하는 운동을  통해서도 우리가 속한 사회를 보다 좋게 변화시킬 수 있으며 때론 민들레 홀씨 같이 작고 가벼운 선행들이 예상치 못하게 더 멀리 날아가 더 깊이 뿌리내릴 수도 있다.


" 우즈벡 애들이 대부분 성격이 셌거든. 다른 국가 유학생들은 서류 잘못 작성하면 바로 죄송하다 그러는데 실수해도 더 당당하게 따지듯 물어봐. 민원업무 할 때까지만 해도 애네 담당하는 게 정말 싫었거든? 그런데 이제 보니 주관과 소신이 뚜렷한 거였어. 얼마나 착하고 똑 부러지던지. 천사야. 정말로 천사."


그날 밤 잠들기 전 친구가 한 말이 어쩌면 답일지도 모른다. 아마 이다음에 또 다른 우즈베키스탄 유학생들을 만나게 된다면 친구는 편견 없이 보다 따뜻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나가다 구걸하는 할머니를 보게 된다면 한번 더 눈길이 갈 수 있을 것이며, 어쩌면 안쓰러운 마음에 기부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밤새 이국의 학생들의 선행 얘기를 듣던 나 또한 마찬가지다. 우즈베키스탄 학생들에게서 친구로, 친구에게서 나로 따뜻한 마음이 옮겨왔듯이 이 작은 씨앗이 가진 가능성이 이다지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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