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심사일 8호
작심사일은 정이와 반이가 한 개 주제를 사일 동안 도전하고 그 사일 동안의 기록을 담는 뉴스레터 콘텐츠입니다. 구독 가능한 링크는 콘텐츠 마지막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퇴사했다. 이제는 전 회사가 된 곳에서 배려해준 덕분에 업무를 생각보다 빨리 마무리하게 됐다. 예기치 않게 2주라는 시간이 남자 엄마 생각이 났다.
"여행 갈래? 어디 가고 싶은데 없어?"
강릉, 서산, 경주...어딜 갈까 고민하다 결국 제주에 가기로 결정했다. 안 간다던 아빠까지 설득해 가족여행을 하게 됐다.
퇴사한 바로 다음날 김포발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 여행 일정은 목금토일 3박 4일이다. 작심사일에 딱 어울리는 숫자가 아닐 수 없다. 혹시나 부모님과 함께하는 여행을 꿈 꿔온 분이라면 주목하자. 현실적인 꿀팁을 대방출 할테니.
여행할 땐 주로 발길 닿는데로 가는 편이다. 좋으면 더 머무르고 싫으면 떠나자는 주의다. 그래서 보통 전날이나 당일 오전에 숙소를 정하는 편이다.
물론 이건 부모님과의 여행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동 동선이 매끄럽지 않고 하루에 볼 수 있는게 한정돼있으니까 말이다.
부모님과의 여행 일정 세우기 팁을 건네자면 관광이 하루에 2개, 많아도 3개가 적당하다. 그것도 이동 동선이 최대한 효율적인 곳으로만 골라서 선정해야 하는데 이 관광지에서 다음 관광지 간 거리가 최대 50분이 넘지 않게 하는게 팁이다. 중간 중간 밥 때에 맞춰 식사도 해야 하니까 동선에 맞게 평 좋은 맛집을 끼워넣는 것도 잊지 말자.
다음으로 날씨를 꼭 유념해야한다.
"비 오고 춥다. 긴팔 긴바지 입고 외투 챙겨 오세요."
공항에 내리자마자 엄마에게 연락했다. 이런 날씨 얘기는 내가 더 빠른 일정으로 제주에 내려왔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부모님과 따로 살고 있기에 항공편을 일부러 일찍 끊었다. 만약 여러분이 부모님과의 거주지가 다르다면 일찍 오는것도 방법이다.
여기서 하나의 팁을 더 건네자면 로드뷰로 보든 미리 사전 답사를 하든 대충이라도 여행지의 지리를 알고 있어야 한다. 가령 기다리는 시간 동안 차에서 요기할 간식거리를 사기 위해 동문시장으로 향했다. 지난번 제주여행 때 엄마가 잘 먹었던 오메기떡과 천혜향 주스를 샀고 나중에 들를지도 모를 횟집이나 갈치조림 식당도 후루룩 살폈다. 정확히 부모님 도착 30분전 공항으로 돌아왔다. 렌트카를 빌렸고 이제부터는 본격 실전이라 할 수 있겠다.
"오늘은 남서쪽으로 여행할 건데 일단 밥을 먹자. A-F까지 선택지가 있는데 이 중에서 어떤 걸 먹고싶어? (스크린샷 식당 메뉴 사진 슬라이드쇼)"
여행 및 식당 메뉴 일정은 다음과 같이 스프레드시트로 정리했다.
뭘 이렇게까지 하나 싶지만 가이드가 없는 자유여행은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 현지 관광 가이드가 되어야 한다. 패키지 관광은 싫고 가족끼리만 움직이고 싶다면 어쩔 수 없다.
꿀팁.
부모님과의 자유여행에서는 스스로 현지 관광 가이드처럼 행동해야한다. 이동지 간 소요시간, 먹는 음식, 머무는 숙소. 부모님은 궁금한 것들 투성이다. 왜 가는지, 왜 먹는지, 어디에 있는지 그때 그때 바로 바로 말할 수 있을만큼 미리 미리 준비하자. 여행이 편해지는 길이다.
우리 부모님은 뭐만 하면 "얼마야?"를 물어보시는 분들이다. 아마 대부분의 부모님이 그러하지 않을까? 소비보다는 저축, 투자보다는 보험이 생활화된 부모님과 달리 나는 보고 싶은 건 봐야하고 사고 싶은 건 사야 하며 하고 싶은 건 해야한다. 특히 금쪽 같은 시간을 들여 온 여행에서는 더 그러했다.
"숙소를 뭐 이렇게 큰 걸 했어. 두 가족이 다 와도 자겠다."
"이 조그만걸 이 돈 주고 사 먹어?"
생각해서 준비했는데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안 좋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건 부모님 잘못이 아니다. 그저 몸에 밴 절약 정신 탓이다. 그러니 너무 원망 말자.
막상 해보면 부모님도 좋아하신다. 큰 식당을 지나갈 땐 저건 뭐냐고 묻고 메뉴판에서도 가장 비싼 것들에 먼저 눈이 먼저 간다. 숙소 넓다 투정 부리면서도 여긴 인테리어 자재 좋은 걸 썼다고 칭찬하시기도 한다. 그러니 할 수 있을 때 이왕이면 비싸고 좋은 걸로 준비하자.
꿀팁.
관광지에서 비싼 건 그만큼의 퀄리티를 보장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싼 건 딱 그만큼의 가격이 매겨진 경우도 많다. 그러니 부모님과의 여행에선 절약하기 보단 소비하자. 가지고 있는 예산 내에서 flex하길 권한다.
20대 때 여행을 많이 다녔다. 여행지에서 어르신들이 이런 말 하는 걸 또 곧잘 들었다.
"유럽 여행 오는데 소나타 한대 값 썼네."
묻지도 않았는데 네 가족이 유럽여행 왔다며 소나타 얘기하던 아저씨 얼굴을 잊지못하겠다. 나와는 사고방식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에서 엄마도 비슷한 말을 했다.
"이 돈이면 이사갈 집에 가전을 하나 더 놓을 텐데."
여행이 끝나면 서울로 돌아가 곧바로 이사준비를 해야하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굳이 이 돈 아껴가면서까지 가전을 사야 할까? 나는 이렇게 같이 여행하는게 더 좋은데.
"그거 안 사고 엄마 늙기 전에 더 같이 놀래."
경험 보단 소유 가치를 중요시 하는 어른들에겐 이런 내가 외계인 같아 보일 것이다. 생각하기에 차도 좋고 가전도 좋지만 사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가족과의 시간이다. 아니, 막말로 필요하면 당근마켓에서 사면 될 거 아닌가.
꿀팁.
경험 보단 소유 가치를 중요시하는 부모님께 '가족과의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어필하자.
길가에 핀 꽃이 예쁘다. 인적 드문 해안가에서 우연히 발견한 전복 껍데기에 세상 기분 좋은 사람이 나다. 반면에 부모님은 잘 가꿔진 정원을 좋아한다. 인적 드문 해안가 보다는 누가 봐도 멋져서 대표 관광지가 된 주상절리를 더 좋아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사례가 있었다.
6월의 제주는 수국이 제철이다. 남서쪽 안덕면사무소 길거리에 수국 꽃이 예쁘게 폈다고 들었다. 실제로 갔는데 예뻐서 우리 가족은 사진을 많이 찍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부모님과 마노르블랑이라는 카페를 갔다. 개인 사유지로 정원을 갖고 있는 카페였다. 정원에 가득 찬 수국은 안덕면사무소의 수국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아까 거기보다 훨씬 낫다. 예쁘게도 키웠네. 이게 진짜 수국이지."
대충 이렇게?
다음날 해수욕장으로 놀러가던 중 길거리에 핀 수국을 보고 내가 말했다.
"수국! 수국!"
부모님께서 말씀하셨다.
"별 게 다 신기하다. 어디나 피어있는 거."
나는 조용히 그날 오후 코스에 제주 대표 관광지인 민속촌을 추가했다. 모든 부모님이 그러하지는 않겠지만 여행지에서 만난 어른들은 사람 손을 타서 잘 관리된 공간을 선호했다. 소소해서 내가 발견해야 그 가치를 알아주는 것보다 이미 그 가치를 인정 받아 잘 가꿔진 것들, 그런 곳들은 으레 관광지로 유명했고 항상 입장료를 받았다. 제주에서는 중문 관광 단지나 민속촌, 국외 여행이라면 스위스의 융프라우를 떠올려보면 이해하기 쉽겠다. 부모님과 여행갈 땐 항상 이런 류의 관광지를 스케줄에 일부러라도 넣곤 한다. 지금까지 성공률은 99.99%다.
꿀팁
부모님과의 여행 일정을 짤 땐 잘 가꿔진 곳을 찾자.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소소한 것보다 눈에 확실히 보이는 예쁨을 선호한다.
부모님과의 여행 필승법
종합 꿀팁 모음
이렇게 하면 잘된다.
만약 자유여행을 마음 먹었다면 스스로 관광가이드 역할을 하자.
돈 아끼라는 부모님 말은 평상시에 새겨 듣고 여행 가서는 갖고 있는 예산 안에서 flex하자.
여행 중간 중간 더 늙거나 어디 아프면 함께 여행하기 힘들다는 걸 지속적으로 어필하자.
사람 손을 타서 예쁘게 관리된 관광지를 찾자.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좋아한다.
이렇게 하면 안된다
하루에 3개 이상 너무 많은 것을 한번에 다 보려고 하면 안 된다.
식사시간을 놓치거나 식사를 거르지 않게 주의하자
무계획은 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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