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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Feb 18. 2020

세상에 갈 곳은 많고 뛸 곳도 많지

걷는 여행 말고 뛰는 여행

행복을 주는 최고의 활동은 여행이라고 한다.

서울대학교 행복 연구센터장 최인철 교수가 말하길 여행을 통해 우리는 걷기, 놀기, 말하기, 먹기와 같이 인간에게 행복감을 줄 수 있는 모든 행동을 다 할 수 있다고. 그러니 여행은 일종의 행복 종합 선물세트, 또는 행복 뷔페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여행과 별개로 일상에서 가장 행복감을 많이 느낄 때는 운동할 때와 산책할 때라고 한다. 그렇다면 좋다는 여행에 운동까지 곁들여진다면 어떠할까?


달리기를 시작한 후로 나는 여행지에서도 아침마다 러닝을 했다. 꼭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으로 달린 건 아니었다. 낯선 곳이라 아침마다 저절로 눈이 떠졌고 길도 익힐 겸 동네를 좀 구경하고 싶어서였다. 해가 좀 나온다 싶으면 마실 가듯 뛰러 나갔다. 뛸 거리를 미리 정해 놓고 달린 건 아니었지만 적게는 5km 많게는 10km 정도를 달렸다. 길이 좀 편하게 나 있다 싶으줄기차게 뛰었고 불편하다 싶으면 마음 편히 걸었다.  중간중간 자주 멈추기도 했다. 예쁜 곳이 나오면 한참을 멍하니 앉아서 구경하거나, 신기한 광경을 보면 질릴 때까지 그것에 대해 보고 있었다. 


강 따라 뛰다 만난 바다를 보고서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거나 서서히 떠오르는 일출에 경탄하곤 하는 일, 말 타고 호루라기 불며 지나가는 경찰관이  눈 앞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거나 처음 듣는 전통악기를 버스킹 연주가 끝날 때까지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있는 것 등이 이에 속했다.


달리다 길을 모르겠을 때는 자주 구글 지도를 켰다. 여행지에서는 주로 러닝용 시계 대신 암밴드(러닝 시 팔에 두를 수 있는 핸드폰 케이스) 차고 뛰었는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기록을 저장하거나 길을 찾는데 무리가 없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인터넷이 된다는 전제 하에서의 말이었지만. 인터넷이 안될 때에는 왔던 길을 복기한 후 다시 돌아 뛰어가야 했다. 


막다른 길이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보통은 왕복 번, 길을 헤맬 때는 두세 번 반복해서 같은 장소를 뛰었는데 여러 번 똑같은 곳을 뛰고 돌아오면 더 이상 여행지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에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새로이 발견하게 될 때면 같은 길을 여러번 뛰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포르투 러닝

저쪽 강 너머에 있는 와이너리, 이쪽 길 끝에 위치한 기념품 샵, 지도에도 없는데 은근히 사람들이 많이 가는 로컬 카페, 다리 하나만 건너면 나타나는 번화한 상권.


직접 발로 뛰며 체득한 거점 지식들은 머릿속에 젠가처럼 차곡차곡 쌓여갔다. 이렇게 체화된 것들은 이후의 여행에서 적절히 빼가며 유용하게 활용하곤 했다. 식당을 찾아갈 때나 지인 선물 살  다리가 알아서 먼저 움직였 해야할까. 마치 이 곳에 예전에 한 번이라도 와봤던 것처럼 행동하게 됐다. 그것은 비단 혼자만의 여행이 아니라 동행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전에 뛰다가 발견한 식당이 있는데 말이야. 생뚱맞은 곳에 있는데 인테리어 너무 예쁘더라고? 게다가 구글 평점도 높아."


그렇게 찾아간 가게들은 늘 평타 이상이었다. 자유 여행일 때는 미리 여행 계획을 세워두지 않는 편이라서 달리기를 통한 사전 답사는 매번 도움이 됐다. 


예로 평이 좋아서 그런지 방문하기 전 예약이 꼭 필요한 와이너리 투어가 있었는데 전화도 안 받고 이메일로 예약하기에도 시간촉박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날 아침 뛰러 나갔다가 와이너리 근처로 향했. 언덕배기에 위치한 와이너리까지 달려가니 리셉션 오픈 시간과 딱 맞아떨어졌다. 예약을 완료하고 숙소로 돌아와서 아침을 먹었다. 운동도 했고 오후 일정도 정해지고 나니 밥맛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와이너리 투어는 명성만큼 좋았고 그렇게 달리기를 통해   하나의 소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말했던 여행 달리기많은 장점들 중 그래도 가장 좋은 점은 바로 현지인생활에 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거였다. 에어비앤비의 명 카피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라는 말처럼 달리기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 일상 속에 나라는 외부인을 서서히 스며들게 해 주었다.


시골 마을로 여행을 갔을 때는 이제 막 문을 여는 과일 가게의 분주함을 살펴볼 수 있었다. 아침 조업을 위해 출항하는 어부들 또한 볼 수 있었다. 시가지로 여행을 갔을 때는 출근을 하는 직장인들, 아침 운동을 하러 나온 사람들을 마주했고. 그들은 사는 환경이 잘라서인지 생김새도 의복도 쓰는 어투도 모두 달랐다. 


여행자로서 여행지마다 갖고 있는 고유한 풍경을 들여다보면 어느 순간 문득 거기에 속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럼 그다음에 할 일은 이제 막 문을 연 과일 가게에 들러 과일을 사거나 어부들에게 친한 척 인사를 건네보는 것과 같이 적극적인 행동이겄다. 현지 러너와는 눈인사를 하거나 길을 물으며 대화를 트기도 했고 운 좋으면 친구가 될 수도 있었다.


" 러닝 기록하고 싶어서 그러는데 사진 좀 찍어줄 수 있겠니?"


뛰다가 마주치는 러너들에게 휴대폰을 건네며 사진 찍어달라 부탁하면 100이면 90은 거절하지 않고 응했다. 대부분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호기심을 갖거나 일전 이곳에서 러닝을 해본 적이 있느냐고 궁금해했다. 


"한국인이야, 이곳이 처음이고."


그들은 놀라워하면서도 좋아했. 한국이란 나라를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거나, 북핵 얘기를 꺼내며 당황스럽게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긍정적인 신호를 보냈다. 운동이 삶을 건강하게 만든다는데 다들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며, 이방인이 여기까지 와서 열심히 뛰고 있는 모습을 보면 모두 제 일처럼 응원해주기 마련이었다.


2회씩 규칙적으로 러닝을 시작하게 이후  첫 번째 여행은 미리 끊어놓은 여름휴가(스페인 in 포르투갈 out 유럽여행)였는데  2주 동안 4개의 도시를 다녀왔다.  이비자를 제외하고 들렀던 모든 도시에서 달렸다. 바르셀로나 구엘 공원에서 한 번, 포르투 도오루 강을 따라 세 번, 리스본 일출을 보며 한 번.  날들만 세 보면 주말을 제외하고 여행 일정 중 거의 절반을 매일 아침 뛰었다. 


그래서인지 그 여행은 달리기라는 테마 여행으로 기억됐는데  아마 다시 이 루트로 여행하게 된대도 난 달리기를 할 것 같았다. 한번 뛰어봐서 다음엔 좀 더 잘 뛸 수 있을 것 같았고 떠나 올 때 다음엔 이비자에서도 꼭 뛰어보리라 다짐했었다. 사실 이비자도 머릿속에 연상했을 때의 편견 때문인지 러닝화를 가져가지 않았는데 정말 뛰기 좋은 섬나라였다.


바르셀로나에서는 굳이  여기까지 와서 뛰냐고 묻는 한국인 아주머니를 만난 적이 있었다. 왜 뛰냐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냥 뛰고 싶어서?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포레스트처럼 말할까 싶다가도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는 질문이었다.


바르셀로나에서의 러닝은  뛰다가 마주하는 자연이 좋았다. 그때 아주머니를 만난 건 구엘공원 유료존 안이었는데 가우디 작품을 보러온 사람들로 어딜 가나 인산인해였다. 작품을 보러 온 건지 사람을 보러 간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정신 없었다.

 

날은 선선했고 이미 6km 이상을 뛴 상태였다. 그날따라 이상하게 10km를 채우고 싶은 마음에 똑같은 곳을 구역 표시하듯 맴맴 돌고 있을 때였다. 같은 곳을 세 번 정도 지나고 있을 때쯤 세상 시원하게 잘 달리는 현지인 러너를 보게 됐다. 호기심에 그를 뒤좇아서 난생처음 보는 길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없을 것 같은 곳에 있는 언덕길을 뛰게 됐다. 돌이 무성했고 관광객 한 명 보이지 않았다. 뛰는 동안 몇몇 러너들만 훈련 차  언덕을 오르내렸다. 


평소에 나는 내가 못 달리는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너무나도 심한 하드 트레이닝이었다. 달리면서도 이런 곳에 일반인이 올라올 수나 있을까?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에 다다르자 그런 마음이 싹 사라졌다.  정상에는 형형색색의 조그마한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가우디가 만든 건지는 모르겠으나 건축 양식이 비슷했으며 이렇게 험한 곳에 무언가 전시돼있다는 자체가 신비로웠다.

바르셀로나 러닝

무엇보다 그곳에서 보는 바르셀로나 전경은 정말이지 기가 막혔다. 저도 모르게 아, 하고 탄식이 흘러나왔다. 360도로 펼쳐지는 계획도시 바르셀로나의 웅장함이 시선을 사로잡았고, 건물과 건물 사이를 가로지르는 선의 미학에 한참을 멍하니 매료돼있었다. 숨차서 호흡을 고르고 서있노라면 저기서 태양의 나라 스페인을 증명하듯 해가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여긴 어떻게 해서든 올라와야 하는 곳이었다. 이른 아침 구엘 공원 유료존에서 봤던 풍경은 이미 내 머릿속에 지우개처럼 지워져 버렸다. 


언덕을 내려오면서는 아, 이래서 구엘 공원이 산을 깎아 만든 정원인 거구나. 여행지의 지리적 요건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복기하게 됐다.  그러니 달리다 만난 이런 우연치 않은 순간들에 대해 러너가 아니라면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러닝을 하면 이런 게 좋아요. 

지금 서 계신 유료존보다 더 예쁜 곳이 있는데요.


아주머니에게 구구절절 나열하기도 애매한 터라, 이건 두발로 직접 길 위를 나아가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매력이었다.  

  

다음 여행지였던 포르투 또한 이색적이었다. 포르투는 러너들의 도시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뛰는 사람들이 많았다. 뛸 때마다 만나는 러너들의 밝은 기운이 나를 즐겁게 했다. 현지 러너들이 올라!(스페인어로 '안녕'이라는 뜻)라고 인사하면 나 또한 올라!라고 화답하며 달려 나갔다. 가끔 대화를 걸어오는 러너들도 있었다. 그럴 땐 온갖 바디 랭귀지를 다 해야 했다. 손발을 사용하는 내 모습이 나 조차도 웃겨서 한바탕 웃어넘기다가 사진도 찍곤 했다. 내가 그러하듯 그들 또한 서툰 영어로 어떻게든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 아무렴 본인이 뛰던 곳에서 같은 취미를 가진 이방인을 만나면 색다르고 궁금하지 않겠는가.


이런 분위기가 좋아서였는지 포르투에서는 머무내내 거의 매일 뛰었다. 이 조그만 도시를 구석구석 달리다 보 포르투라는 동네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가령 포르투 도오루 강 하류에는 남자들은 어업에 종사하고 여자들은 공동빨래터에서 빨래하는 아푸라다(Afurada)라는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은 생선구이가 유명했다. 그것도 바다를 향해 뛰다가 누군가에게 주워듣고 여기저기 걸린 빨래를 보며 이상하게 생각해 나중에 스스로 찾아보며 알게 된 사실이었다.


계속해서 포르투 다운타운에는 사람들이 유독 많이 들락날락거리던 빵집이 있는데 크루아상, 파이, 에그타르트가 다 합쳐서 1.8유로(한화 2,500원) 밖에 되지 않았다. 계산하는 직원은 자기 가게가 이 마을에서 가장 페스츄리를 맛있게 하는 이라고 자부심을 표했다. 그때 내가 포르투에 머문 기간은 고작 4 5이었는데 거의 날마다 러닝을 해서 그런지 체감 상 족히 일주일은 있었던 것 같.

달리기가 아니었다면 이 도시를 이렇게 속속들이 알 수 있을까 싶은 5일이었다.


마지막 도시였던 리스본은 앞의 여행지들과 달리 노숙자가 많았고 흑인과 이주 노동자들이 한 블록 건너 한 블록 보였다. 스페인어만큼이나 영어가 간간이 들렸는데 욕설이 다소 섞여있었다. 처음 간 마트에서 도둑질이 검거되는 사건도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지저분한 대도시 느낌이었다. 길은 좁고 복잡했으며 저녁엔 클럽 거리들이 환하게 불을 밝혔다. 그래서 처음엔 이 도시의 느낌이 긍정적으로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리스본을 뛰면서 만난 일출이 정말이지 어마어마했다. 다 뛰고 나서 슈퍼에서 2,000원 주고 사 마신 100% 착즙 오렌지주스도 지금도 생각하면 침이 고일만큼 맛있었다. 

그렇게 리스본에 대한 마음이 서서히 열렸고 오후에는 워킹 투어를 신청했다.

리스본 러닝


리스본 시내 곳곳에는 그라피티가 그려져 있었다. 그라피티는 매일매일 달라진다고 했. 걷는 와중에도 젊은 예술가들이 이미 무언가가 그려져 있는 벽에 또다시 스프레이를 뿌리는 장면을 자볼 수 있었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들을 보면 모두 다 뜻이 있었고 이야기가 있었다.


밤이면 시끄러워지는 클럽 거리 또한 막상 그 안으로 들어가 보니 색달랐다. Fadu(파두)라는 전통 민요를 들려주는 펍에 갔는데, 포르투갈어로 운명이란 뜻의 파두는 서민들의 삶을 노래하는 민요였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트로트, 또는 판소리라고  수 있겠다. 포르투갈 사람들만의 애환이 담긴 파두(Fadu)를 듣고 있으면, 그리고 그 노래에 환호하는 사람들 사이에 속해 있으면  마음속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그러니까 클럽 거리라고 모두 다 똑같은 클럽은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리스본에서도 오전 달리기가 아니었다면 마음의 장벽을 허물지 못했을 것이며 편견으로 인해 여행을 즐겁게 마무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길게 말했지만 내 여행은 달리기를 통해 그 저변을 넓히고, 보다 열린 시각으로 여행지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었다.


남들 다 가서 북적이는 곳, 인증샷만 찍고 오는 그런 여행 말고 나만의 루트를 만드는 여행, 내가 직접 발로 뛰며 찾아가는 여행을 하고 싶다면 이제 달리기를 해보는 어떨까. 사람들이 으레 좋다는 들 보단 낯설고 손때 타지 않은 곳에 더 눈길이 간다면, 다른 사람이 했던 걸 복습하기보단 나만의 길, 나만의 여행을 만들어가는 걸 좋아한다면 뛰어볼 만하지 않은가.


뛰다가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풍경들이 모두 다 다를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일상 속에 녹아드는 경험을 다른 사람들도 꼭 한번 해보길 바라면서 마지막 팁을 남기자면 세상에 갈 곳은 많고 뛸 곳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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