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기 Feb 16. 2020

완주만 해도 인정해주잖아요

교육학적 관점에서 본 달리기

처음엔 이 사람이 지금 대체 누굴 부르나 했다.


"페이서님 아니세요? 페이서님! 미라클 런~"


던킨의 먼치킨 도넛처럼 동그란 눈으로 날 보는 여자 앞에서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이 누군지 알아서 그런 것도 아니었고 나를 부르는 게 맞는지 확신해서도 아니었다. 단지 내 기억 속 소중하게 자리한 미라클 런이라는 네 글자 때문이었다.


귀가 아플 정도로 매미가 울어대던 한여름이었다. 루게릭 요양병원 설립을 돕기 위한 미라클 런 대회가 열리는 상암의 어느 공원, 나는 20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 초조하게 서있었다. 왼손에는 블루투스 스피커, 오른손에는 스마트폰 러닝 레코드 앱을 켠 채 머릿속으로 오늘의 러닝 루트를 계속해서 복기하고 있었다.


달리기 대회 페이서(Pacer)를 맡게 되면서 전날까지 얼마나 긴장하고 노심초사했던가. 사전에 코스 답사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구글 지도를 몇 번이나 보고 또 보길 반복했다. 혹여나 내가 이끄는 그룹이 달리다가 템포가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저녁 늦게까지 백곡이 넘는 곡을 일일이 골라가며 선곡했다. 이렇게 만든 플레이리스트는 대회가 끝난 이후로도 달릴 때마다 꽤나 많이 재생했다. 굳이 미라클 런이라는 이름 또한  변경하지 않을 만큼 음악으로나마 오래도록 이 날을 추억하고 싶어서였다.


그런 소중한 대회에서 몇몇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내 뒤에서 "보행자 조심" "멈출게요." "한 줄" "오른쪽으로 갈게요"  달리기 구호를 잘 따라 해 준 여성 두 분이었다. 스스로를 여대에 다니고 있으며 체육학과라고 소개했던 게 떠오르자 머릿속에 초록 신호가 울리는 것 같았다. 빨리 말을 꺼내서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라고 깜박깜박 불을 밝히는 거였다.


"혹시 그때 친구 분이랑 제 뒤에서 같이 뛰던?"


J는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맞다고. 그때부터였다. 관심이 가기 시작했던게. 우리는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에서 마케팅 차원차 진행하는 러닝 세션을 통해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됐다. 함께 강남대로변을 뛰며 내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씨티런이라 가속되는 구간이 으물었다. 운동 중임에도 대화를 이어가는데 무리가 없었고, 호감이 베이스로 깔리니 한 시간 남짓한 시간도 서로를 알아가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나는 J에게 달리기를 시작한 이유에 대해 물었다. 스무 살이면 한창 놀 나이인데 어떻게 이렇게 뛰게 됐냐고.


"어릴 때 캐나다랑 미국에서 잠시 살다 왔어요. 한국 돌아와서 적응하기 어려웠는데...1부터 고3까지 너무 힘들어서 뛰기 시작했거든요. 새벽 2시까지 독서실에 있다가 2시부터 3시에 한강을 뛰었어요."


눈동자가 설탕처럼 반짝였다. 목소리는 마치 달리기가 자기 삶을 구원했다는 듯 희망에 차있었다.


"뛰는 게 좋아지고부터는 활동적인 걸 하고 싶었어요. 그러다 체대 입시를 마음먹은 거죠! 그런데 한체대는 못 갔어요. 실기가 그 정도는 못돼서..."


때마침 신호가 걸렸고 우리는 잠시 대기하게 됐다. 말을 흐리는 J에게 용기를 주고자 화제를 돌렸다. 체대 입시는 잘 모르는데 실기가 어느 정도 돼야 하냐고 물었다.


"윗몸일으키기 2분에 121개씩. 그 외에 달리기 종목도 있는데요. 몸이 가벼워야 잘 뛰니까 그땐 샐러드 먹으면서 살을 많이 빼기도 했어요."


신호가 파란 불로 바뀌고 우린 다시 뛰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니 km당 6'00"페이스가 뜨고 있었고 벌써 3km를 지나오고 있었다. 말을 하며 뛰는데도 이렇듯 거뜬하다니 고3 때의 나라면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아무렴 체대생과 함께 강남 거리를 뛴다는 걸 10년 전 내가 상상이나 해봤겠는가. 체육이라면 늘 젬병이었고 대학 입시도 체대와는 정반대인 문학특기자 전형으로 입학하지 않았던가.


고등학생 J가 윗몸일으키기 1분에 60개를 할 때 나는 책상 앞에 앉아 A4 60매에 달하는 소설을 썼다. J가 체육 실기를 준비하기 위해 신체 단련을 할 때 나는 수시 면접을 위해 백일장 수상 경력과 공모전 수상 작품들을 모아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있었다. 이렇듯 자석의 N극, S극처럼 상이한 우리에게 그나마 공통점이 있다면 불안했다는 게 아닐까. 원하는 학과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할까 하루하루 초조해하며 십 대를 보냈다는 것 정도가 비슷할 것이다.


어릴 때를 떠올려보면 대학을 못 가면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다. 한국에서 대학이란 사람이 꼭 거쳐야 하는 관문 같은 것이어서, 어려서부터 나와 내 친구들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간보다 소위 sky로 간주되는 좋은 대학 가라는 조언 듣는 시간이 더 많았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학원으로 과외로 뺑뺑이를 돌았다.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유행처럼 돌고 도는 사교육은 커뮤니티를 만들어냈고 거기서 벗어나면 또래 그룹에서 뒤쳐진 아이가 됐다. 10대 때는 시험 성적에 따라 나라는 사람의 인격이 지켜지느냐, 안 지켜지느냐가 자주  판가름됐고 엄마 또한 그걸 내게 매 순간 주지 시켰다. 가고 싶은 학과를 가더라도 이왕이면 대학을 가야 했고, 대학을 갈 거면 서울로 가라고 했다.


"한국 교육열이 워낙 심해야지 말이지. 그래도 새벽에 뛰면 무서웠겠다."


내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하자 J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며 고개를 저었다.  도리어 달리기를 통해 답답했던 속이 뻥 뚫려서 좋았다고 웃었. 나도 자꾸 웃음이 났다. 예나 지금이나 나빠졌으면 더 나빠졌지 좋아지지는 않은 듯한 한국의 주입식 교육에 대해 떠올리다 보면 건강하게 자란 J를 보고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한체대는 기회가 많은데.. 거기는 나이키에도 선배들이 많아서 취업하기 더 유리하거든요. 저희는 여대라서 기회가 좀 적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 내가 그랬듯 J는 열심히 달리고 있는 도중에도 구직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아직 어린데 벌써부터 그런 고민하지 마. 스무 살이면 뭐든 다 해볼 만한 나이잖아."


"어리긴요. 여대는 24살만 돼도 나이가 많아 보여요. 연합동아리 하면서 남녀 공학도 가봤는데 28살도 있던데요? 그런데 저희는 그런 게 없어요. 군대 가는 사람이 없으니까. 보통 다들 스트레이트 졸업을 하고."


J는 다시 비교를 하기 시작했는데 대학생 시절을 보는 것 같았다. 나 또한 저렇게 초조하고 불안해했었다. 저성장 시대에 일자리는 줄어들고 물가는 갈수록 높아지는데 그만큼의 연봉을 보장해주는 회사가 적었기 때문이었다. 신문에는 청년 취업률이 매해 최저를 찍고 대학은 취업준비소로 전락해버렸다는 기사가 하루 건너 하루 보도되는 시기였다. 모두가 한 곳을 바라보고 바쁘게 달리는 환경 속에서 작가로 밥 벌어먹고 살 수 있냐는 질문에 나는 어느 순간부터 침묵했다.


머리로는 다르게 살길 원했지만 행동은 열심히 취업 준비를 했고 20대 중후반에 가까스로 대기업이라 분류되는 곳에 입사를 했다. 스무 개가 넘는 마케팅 대외활동, 두 번의 인턴 경력, 디자인 포트폴리오와 마케팅 전략 방안, 불필요한 자격증과 수상실적가지고 문송한 나는 계약직을 거쳐 정직이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원하던 회사에 다니고 보이게 진짜 내가 원하는 거였나 이따금 슬퍼질 때가 있었다.


"길이 없으면 길을 먼저 뚫어보는 게 어떨까? 내가 보기엔 뭐든 충분히 잘할 것 같은데."


틀에 맞춰 살아보려 그렇게도 아등바등 거렸던 내가 스무 살 친구에게 이토록 무책임한 말을 꺼낸다는 게 스스로도 우습게 느껴졌.


"사실... 저 영어 회화 아르바이트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그만두고 배스킨라빈스 해보려고요."


대화가 난데없이 탱탱볼처럼 튀자 아이스크림? 하고서 되물었다.


"아이스크림 좋아하거든요... 좋아하는 건 꼭 해야겠어요. 사실 친척분이 나이키 본사에 다니고 있어서 팁도 좀 얻고 열심히 하면 도전해볼 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 일단은 전 아이스크림을 정말 좋아해요!"


좋아하는 이라는 말을 강조하며 눈을 반짝이는 J를 보며 웃음이 나와버렸다. 작가가 되고 싶어했던 내 옛날 모습이 떠올랐다.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상상할 때면 으레 나오던 행복한 표정, 그 미소가 얼굴에 드리워져 있었다. 왜 사람들이 스무 살이 꽃다운 나이라고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달리기를 시작한 계기, 좋아하는 걸 꾸준히 찾으려는 태도가 보여주듯 흔들리고 불안한 가운데서도 자기 길을 잘 찾아갈 친구였다.  


그 날 우리는 총 5.5km를 뛰었다. 첫날이라 겁먹었는데 생각보다  만했다고 J가웃으며 말했다. 나는 체대라서 운동 많이 할 텐데 이렇게 또 러닝 하는 거 안 지겹냐고 물었다.


" 러닝은 완주만 해도 뭔가 했다는 느낌이 들잖아요. 인정해주고. 그래서 러닝을 하게 된 것 같아요. 계속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정확히 이 지점에서부터 출발됐다. 가끔 어떤 장면은 사진으로 남아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 순간의 J가 그러했다.


생각해보면 러닝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운동이었다. 저 사람보다 더 빨리 달려야지,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따라 잡아야지 이 악물고 뛰는 사람은 없었다. 달리는 사람은 오직 움직이고 있는 그 순간에 집중했고 특히나 장거리는 완주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 힘을 높이 샀다. 러닝과 마찬가지로 사실 우리네 인생도 그렇게 크게 무언가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됐다. 그저 완주만 한다면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며 매 순간 열심히 살아내기만 한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멋진 삶이지 않을까.  



이전 03화 안될 땐 되는 거 하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