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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Feb 09. 2020

안될 땐 되는 거 하자

롱런을 위한 달리기  


못한다는 말을 많이 들으면 주눅이 든다. 할 수 있다는 마음도 점점 작아져서 그냥 숨어버리고 싶을 때 위로가 되는 것도 결국엔 말이다.


"달리기 많이 해보셨어요? 너무 잘 달리시는데요."


3km 지점을 뛰고 있을 때쯤 내 앞에서 달리던 페이서가 말을 걸어왔다. 그 날은 내가 처음으로 저녁에 크로스핏을 가지 않고 러닝 동호회에 나온 날이었다.


"제가 크로스핏을 해서 그런가 봐요. 다 같이 파이팅하는 분위기가 너무 좋네요."


뛰는 그룹 맨 앞에서 km당 속도를 맞추던 페이서가 선창을 하면 뒷사람들이 메아리처럼 화이팅 구호를 반복해서 외쳤다. 여러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응원구호를 반복해서 듣다 보면 없던 힘도 솟구쳐 오르는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버겁게 느껴졌던 업힐 정상에 어느새 올라와 있는 걸 보면 말이 가진 힘이란 게 참 위대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 크로스핏 하시는구나."


페이서는 내가 갑자기 다른 운동 얘기를 꺼내자 떨떠름해했다. 이내 어색한 표정을 감추고선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앞으로 자주 나오세요. 잘 뛰시는데요?"


나는 환한 얼굴로 네라고 대답했다. 첫 느낌이 좋아서였을까. 그 후로 정말 자주 나갔다. 러닝 동호회 정기 런이 월, 목요일 저녁 주 2회였는데 반년 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출석했다. 한번 뛸 때마다 최소 6km에서 최대 10km까지 뛰었다. 꾸준히 달리다 보니 속도가 점점 붙기 시작해서 km 당 6'30"이었던 페이스가 6'00" 5'45" 5'40" 5'30" 5'20"까지 줄어들었다. 차츰차츰 빨라지는 속도처럼 달리기에 대한 자신감도 불어났는데, 퇴근 후 달리기는 어느 순간부터는 고정된 일상이 돼버렸다. 물을 빨아들이는 스펀지처럼 달리기가 내 몸에 배어버린 것이었다. 자주 뛰다보니 뛰러 나온 사람들과 자연히 안면도 트게 되고 함께 운동하면서 사교성 또한 올라갔다.


그즈음 나는 매일 같이 가는 크로스핏에서 달리기 잘하는 애로 간주되었는데 일단 박스(체육관)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내 이름을 부르는 대신 달리기 맨~ 이라 이름 불렀다. 혹여나 크로스핏 WOD(오늘의 운동)로 Run이 나올 때면 오늘 네 운동 나왔어라고 말할 만큼 나를 보는 이미지가 달리기로 굳어졌다. 뛰는데 들인 시간만큼이나 Run WOD 기록도 나쁘지 않았고 이후에 나는 달리는 크린이라는 운동툰을 연재하기까지에 이르게 됐다(달리기를 좋아하는 크로스핏 어린이라는 뜻)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하나도 못해? 정말로? 다시 해봐."


크로스핏 시작한 지 3개월 차, 매일매일 왔으니까 못해도 약 100일은 한 건데 여전히 못하는 것들  천지였다. 못하는 것, 그중에서도 더 못하는 것들이 산재하는 이 정글 같은 곳에서 나보다 센 포식자들은 늘 무섭고 두렵기  마련이었다. 저녁 반에서 같이 운동하는 언니가 얼굴을 한껏 찌푸린 채 내 앞에 독불장군처럼 서있었다. 그 모습이 무섭고 싫었지만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그저 바닥에 떨어진 줄넘기를 다시 잡을 뿐.

타닥. 툭. 타닥. 툭. 타닥. 툭.

크로스핏에서 더블 언더(double-under)라고 부르는 줄넘기 2단 뛰기를 세 명이서 300개를 해내야했다. 이건 내가 가장 싫어하는 취약 종목이었다. 여러 번 시도했지만 끝내 한 번도 줄을 넘지 못한 채 주저앉았다. 금방이라도 욕 할 것 같던 언니 입에서 한숨을 쉬더니 내게서 등 돌린 채 다른 남자 회원에게 말을 걸었다. 해보세요. 남자 회원은 한 번에 2단 뛰기를 10개나 하고난 뒤에야 바닥에 발을 붙였다.


"애는 잘하는데 너는 뭐야, 다시 해봐. 다시. 다시. 다시."


좋아하는 노래라면 몇 백번도 다시 듣고 좋아하는 책이라면 선물하고 다시 사고 선물하고 다시 사길 반복하는 내가 다시, 라는 말을 그렇게 듣기 싫어할 줄 몰랐다. 정말로 나는 이걸 할 수가 없는데. 이런 분위기에서는 더 하고 싶지 않은데. 그래도 다시 또 해내야 했다. 내가 못하면 이 분들이 배수로 해야 될 테니까. 내가 할 때까지 내 앞에 있는 언니의 구겨진 표정은 펴지지 않을 테니까. 코치님이 짜 준 그룹 당 미션은 세 명이서 돌아가며 300개의 더블 언더를 채우는 거였고 나는 어떻게든 폐를 덜 끼쳐야했다. 제발 하나만 넘겨다오. 그러나 결국 하나도 넘기지 못했다. 다음 날, 퇴근하고 다시 크로스핏 박스에 갔다. 또 그 언니와 한 팀이 됐다. 오늘의 운동은 키핑 풀업(두 손으로 철봉을 잡은 채 배를 폴더처럼 접었다 피며 힙의 반동으로 턱을 철봉 위까지 끌어올리는 턱걸이 동작)이었는데 어제의 더블 언더만큼이나 못하는 동작이었다. 배에 힘! 배에 힘! 소리가 들릴 때마다 파르르 몸이 떨렸다. 철봉에 매달린 내 몸은 마치 힘없이 펄럭이는 A4용지 같았는데 당시 내가 사용하던 초록 밴드는 안타깝게도 보호 파일이 돼주지 못했다. 탄력이 제일 좋다는 초록 밴드를 끼고도 계속해서 버벅이는 내 모습을 보더니 언니가 외쳤다.


"야! 배 좀 당기라고!"


다음 날부터 저녁에 크로스핏을 가지 않았다. 계속하고 싶은 마음 반, 가기 싫은 마음 반이었던 크로스핏에 대해서 대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운동하는 곳을 옮겨볼까도 싶었지만 그렇다고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는 않았다. 곧 죽어도 저녁엔 가기 싫은데 퇴근 후 운동은 하고 싶고...그렇게 나는 러닝 동호회에 발을 들이게 됐다. 러닝은 재밌었지만 마음 한쪽에 크로스핏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찝찝한 내 마음처럼 등록 기간 또한 조금 애매하게 남아있었다. 저녁때를 피한다면 갈 수 있는 시간대가 언제일까 고민하다보니 점심시간에 유독 눈길이 갔다. 열두시 반부터 한시 반. 한 번 나가볼까 싶었던 게 시작이었다. 첫 단추를 잘 꿴 덕에 그 후로 이년이 넘게 나는 크로스핏과 달리기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러닝 크루에 처음 나갔을 때처럼 점심 크로스핏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일단 점심에 운동 오는 인원 자체가 적었다. 하루 중 직장인이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 점심시간과 퇴근시간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렇게 기다려지는 시간에 여길 오는 소수 인원들은 조금 남달랐다. 잘한다고 뻐기지도 않고 잘못했다고 혼내지도 않았다. 그 틈에서 운동하고 코칭 받으며 내게도 꽤 긍정적인 변화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선 인간관계에 극한 피로도를 겪던 터라 점심반 인원들과 적당한 거리를 지켜가며 운동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저녁 타임 대비 상대적으로 조용했으며 강요하거나 화를 내지 않아서 마음이 편했다. 다음으로 가장 큰 변화는 점심 크로스핏, 저녁 러닝이라는 일상의 루틴이 생겨난 점이었다. 낮에 크로스핏 하고 저녁에 달리는 습관이 형성되자 체력은 날이 갈수로 올라갔다. 건강해진 신체처럼 심적으로도 좀 더 단단해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누가 뭐라 해도 쫄지 않을 만큼 맷집이 생겨났고, 크로스핏을 못한다는 말을 들어도 난 이거 아니어도 잘하는 게 있는데. 반박할 수 있을 만큼의 자신감 또한 붙어버렸다. 운동 두 개를 병행하다보니 하나가 방패막이가 되어주는 것이었다. 이 방패를 더 막강하게 하기 위해 러닝을 꾸준히 했고, 일 년이 못돼는 기간에 나는 풀 마라토너가 됐다.


시간이 좀 더 흐른 후 이러한 좋은 습관 형성에 계기를 제공해준 언니와 운명의 장난처럼 또 함께 팀 운동을 하게 됐다. 아마 그 때로 말미암아 일 년 반 정도가 지났던 것 같다. 언니에게서 환청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는데


"뭐야, 너 이제 나보다 더 풀업 잘하겠다."


당시 나는 탄력성이 제일 낮다는 검정 밴드로 풀업을 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칭찬 덕분인지 아니면 정말 내 운동 능력이 향상돼서인지 우리는 꽤 만족스러운 기록으로 그 날의 팀 운동을 끝냈다. 운동이 끝나고 언니에게 "수고하셨어요."라고 밝게 인사했다. 언니도 "수고했어! 잘하더라!" 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너무 좋아서 방방 뛰면서 갔다. 포기하지 않으면 정말 이뤄지는구나. 놓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되는구나. 부르르 몸을 떨면서.




<2018 원더우먼 페스티벌> 연단에서 개그우먼 박나래는 이런 말을 했다.


남들이 나를 낮게 얘기하고 깎는 얘기를 하면 자존감이 낮아지지 않냐고 해요.
근데 저는 그런 생각을 하거든요. 개그우먼 박나래가 있고 디제잉을 하는 박나래가 있고 남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까이는 거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거에 대해서 조금 이해가 안 되더라도 오케이 괜찮아. 디제잉하는 박나래가 있으니까. 사람은 누구나 실패할 수가 있잖아요. 그 실패가 인생의 실패처럼 느껴질 수가 있어요. 여러분은 한 사람이 아닌 거예요. 공부하는 누가 될 수도 있고 정말 다른 일을 하는 내가 될 수도 있고 우리는 여러 가지의 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거든요. 그걸 인지하고 있으면 하나가 실패하더라도 괜찮아요. 또 다른 내가 되면 되니까.


이 강연은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었고 나 또한 이 말을 통해 위로 받았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왜 이걸 못하지, 왜 난 재능이 없지, 잘하지도 못하는데 이걸 꼭 계속 해야 하나. 이런 감정이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건지 남의 평가에서 오는 건지 요인은 다 다르겠지만 결국에 답은 하나라고 생각한다. 안 되는 걸 억지로 되게 하면 과부하. 안 될 땐 되는 것부터 하는 게 좋다. 그렇게 매일매일 가던 크로스핏이 하루아침에 도망가고 싶어지는 날이 왔듯이 좋아 마지않는 글쓰기도, 달리기도 어느 순간 싫어지는 때가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이 경험을 토대로 그것들을 놓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힘껏 도망갈 것이다. 달리기가 싫어질 때면 크로스핏으로, 크로스핏이 싫어질 때면 달리기로, 두 개 다 싫어질 때면 글쓰기로. 글쓰기조차 싫어질 때면 그림 그리기로. 생각보다 나라는 사람은 다양한 걸 할 수 있는 사람이고 정말로 중요한 건 좋아하는 것들을 꾸준히 지켜가는 게 중요한 거니까.

그러니 안 될 땐 되는 것부터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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