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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Nov 27. 2019

혹시 달리기 좋아하세요?

달리기를 통해본 사랑

사랑을 왜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구니, 손 들어 봐.


교수님 손에 들려있는 A4용지는 지난주 내가 쓴 리포트가 맞았다.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이라는 책을 읽고 낸 감상문이었다.


너 몇 살이니?

스무 살? 그런데 이렇게 염세적이라고?

넌 인생 더 살아봐야겠다.


교수님은 이마에 손을 짚더니 차갑게 등을 돌렸다. 대체 뭐가 잘못됐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난 분명 책을 정독했고 주제에 맞는 감상문을 써냈다. 돌아선 교수님 등을 멀거니 바라보는데 원형으로 빙 둘러앉은 학생들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몇몇 선배들은 가소롭다는 표정을 추지 않았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나와 기숙사로 향했다. 타인에게 평가받는 시선이 싫었다. 그렇게 돌아온 기숙사 책상에는 무심하게도 예의 그 책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책을 펼치자 손에 익은 부분이 바로 나왔다.


롤랑바르트의『사랑의 단상』


중국의 선비가 한 기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 기녀는 선비에게 "선비님께서 만약 제 집 정원 창문 아래서 의자에 앉아 백일 밤을 기다리며 지새운다면 그때 저는 선비님 사람이 되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흔아홉 번째 되는 날 밤 선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팔에 끼고 그곳을 떠났다 (68p, 사랑의 단상』, 롤랑 바르트)


짧은 우화였지만 이 책의 전반적인 주제를 보여주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100일이 왔을 때 선비가 만난 사람은 과연 99일 동안 꿈에 그리던 그녀가 맞을까?

정말로 사랑한다 생각했는데 막상 갖게 되면 별거 아닌 사람일 수도 있다는 의심, 99일 동안 사랑했던 감정이 퇴색돼버린 순간을 마주해야 하는 두려움, 그래서 선비는 99일 동안 사랑했던 마음을 의자와 함께 들고 떠난 게 아닐까.


이쯤 되면 사랑이란 거, 어쩌면 사랑하는 대상을 사랑하는 자기 모습을 사랑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며 뭐에 홀린 듯 감상문을 써 내려갔다. 감상문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99일 동안 사랑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거라면 그 대상은 굳이 다른 사람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 시간에 누군가를 사랑하기보다는 저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힘쓰겠습니다. 설렘을 느끼고 싶으면 로맨스 영화를 보고 슬픔을 느끼고 싶으면 이별 노래를 듣고...(중략)  


스무 살의 치기라 해도 어쩔 수 없지만 그때는 책을 다시 읽고 나서도 감상문에 뭐가 잘못됐는지  수 없었다. 책을 덮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생각을 정리하는 데는 아무래도 헬스장 트레드밀 만한 것이 없었다.


오늘도 오셨네요.


카운터에 앉아있던 트레이너가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저녁은 먹었냐는 말에 가볍게 목례한 후 곧바로 트레드밀에 올랐다. 1시간 좀 넘게 달렸나. 밥 한 공기 반 정도의 칼로리를 태웠다. 숫자를 보고 나니 그제야 안심이 됐다. 가쁜 호흡을 가다듬었다.


기숙사로 돌아와서는 늘 그렇듯 선식을 타 먹었다. 배고픔을 잊으려 이른 저녁인데도 바로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으니 낮에 들었던 교수님 말씀이  웃풍처럼 밀려들어왔다. 온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하루 1,000칼로리도 안 되는 양을 먹다 보니 몸에서 추위를 받아들이는 정도가 더 심해졌다.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렸다.


너는 좀 더 살아봐야겠다. 


낮에 들었던 말 때문인지 배가 고파서인지 그 후로도 한참을 잠이 오지 않았다. 몸을 뒤척이다 새벽녘이 지나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꼬르륵 소리가 여름밤 매미 소리처럼 눈을 감을 때까지 주기적으로 반복됐다.  




달리기 어떻게 시작했어?

난 헤어지고 나서 힘들어서 시작했는데.


러닝 크루에 나가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별 후에 뛰러 나온 친구들이 많았다. 달리기가 다른 운동보다 상대적으로 접근하기 쉬워서일 수도 있었고, 달리다 보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서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누군가는 달리기를 통해 새로운 인연을 찾으려고 뛰러 나온 걸지도 몰랐다.


나는 뭐 그런 이유로 시작한 건 아닌데.


라고 대답하면서도 내심 그들이 부러웠다. 운동으로 실연의 아픔을 극복할 수 있다는 건 큰 축복이었으니까. 나 또한 조금만 일찍 달리기에 재미를 붙였더라면 사랑을 왜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같은 이상한 리포트를 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먹고 토하길 반복하는 식이장애를 겪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세상이 좀 더 밝고 유쾌하게 보였을 텐데. 그러나 역사엔 가정이 없듯 이제와 지나간 일들에 꼬리를 붙잡는 건 아무래도 쓸모가 없었다.


그래서 힘든 건 다 나아졌어?


물어보면 친구들은 으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달리기 덕분이라며 히죽 미소 짓는 그들을 보면서 나는 다시 한번 달리기의 효능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달리기를 하면 우선 출발선에서 3km 이상만 뛰어도 몸이 꽤 가벼워졌다. 시작 전에 머릿속을 가득 메운 생각들이 점차 줄어들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 후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를 겪게 되면 빠르게 뛰는 심장만큼이나 뇌에서도 꾸준히 아드레날린이 분비됐다. 달리기가 끝나고 나면 땀이 마르면서 온 몸이 상쾌했다. 사실 그보다 더 시원한 건 속이었다. 출발선만 벗어나면 날아갈 듯 가벼워진 마음으로 어느새 도착점에 다다르게 됐다. 적게는 5~6km, 많게는 7~10k를 달리면서 감정선은 이미 슬픔에서 기쁨으로 바뀌었다. 그래서인지 러너들은 달리기가 끝나면 주문처럼 이런 말을 반복했다.


오늘도 참 좋았어.


달리기를 통해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하루 하루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었다.    


때로는 누군가를 잊기 위해 술잔을 비워내는 것처럼 달리기 또한 생각 비우기에 큰 도움이 됐다. 적어도 뛰는 동안에는 하등 우울해질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왜 나는 이 좋은 달리기를 서른 즈음에 알게 됐을까.


무엇을 먹어도 마음이 허할 때가 있었다. 모눈종이만큼 좁아진 속은 무엇을 담기에도 여유롭지 않았다. 그것도 한창 좋을 때라는 스무 살이 그러했으니 지금의 나로서는 아무래도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나는 외양이 바뀌면 모든 것이 좀 더 나아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강박증적인 다이어트에 들어갔고 먹지 않고 토해가며 15kg을 뺐다. 내내 자주 울었지만 어디에다 나 슬프다고, 우울하다고 터놓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들 예쁜 내 모습을 보며 좋아했으니까. 이렇게 예뻐지기 위해서 뒤에서 얼마나 울고 얼마나 토악질을 했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장애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대부분의 것들이 그러하듯 사람들의 시선이 좋지 않기에 나는 내가 식이장애라는 걸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외부에는 쉬쉬하게 되고 건강한 척, 아무 일도 없는 척 스스로에게도 세뇌시켰다. 그 사이 몸과 마음은 갈수록 피폐해져 갔다.


걔가 너랑 헤어진 거 많이 후회해.


다이어트에 성공한 후에 그런 말을 자주 들었다. 걔가 그러든 말든 이젠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비슷한 말을 자주 듣다 보면 왠지 모르게 우울해졌다. 만나면 안부 인사처럼 외모 평가를 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역시 모든 관계는 보이는 걸로 판단되는 건가 싶어서였다.


그 사이 더 살이 빠졌네. 예뻐졌어.

아무래도 네가 그 애보단 훨씬 아깝지. 

정말 인형 같아.


친구 틈에서 표정 없이 앉아있다 보면  정말 인형이 된 기분이었다. 예쁜 바비 인형 말고 팔다리에 실이 걸린 관절 인형이었다.


음식 맛있다고 말하며 새 모이만큼만 먹는 입,  이 가방 예쁘다면서 잡지를 넘기며 빛내는 눈, 이 남자는 뭘 선물해줘서 괜찮다는 이야기에 집중하듯 쫑긋 세워야 하는 귀, 어린 날의 나는 몸에 집착하듯 그 무리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인형극을 하다 보면 나는 점점, 더, 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스스로 사회의 미적 기준이라는 걸 따르면서도 자주 신물이 났다.


아침마다 거울을 보면 핼쑥해진 내가 있었다. 얼굴 광대뼈는 계속해서 튀어나왔는데 친구들은 눈코 입이 갈수록 뚜렷해진다며 이목구비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이따금 손이 떨렸다. 영양 부족 증상이었다.


아무도 내 마음을 알지 못한다는 생각.

타인에게 평가받는 것 자체가 극심한 스트레스로 다가올 무렵, 나는 결국 혼자가 됐다. 살면서 가장 영화를 많이 봤던 때가 그때였던 것 같다. 수업을 듣고 헬스장을 다녀오는 것 빼고는 하루 내내 방에 불을 꺼놓고 영화를 봤다. 집에서 나가지 않는 날이 많아지자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은 점점 떠나갔다. 그나마 여러 사람과 함께 듣는 전공 수업도 사랑, 욕망, 죽음, 윤리와 같이 인생의 무거운 주제들을 고전이나 철학서, 시집을 통해 주로 다루었다. 사회 관계망 안에서 직접 겪고 체화해야 할 것들을 영화를 통해 보고 책을 통해 터득하다 보니 자연스레 사랑은 왜 하나, 현자도 답을 못 찾는 것에 답을 찾으려 해서 뭐하나 같은 염세적인 생각들을 갖게 됐다.


그러다 보니 사랑에 대해서라면 이보다 더 잘 논할 수 없다는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을 읽고 나서도 저는 그냥 로맨스 영화를 보겠습니다. 이별 노래를 들을게요 라는 치기 어린 감상문을 쓰는 스무 살이 돼버린 것이다.




다행히도 지금에 와서는 롤랑 바르트의 책을 읽고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음식을 맛있게 먹고 나서 남몰래 토하거나 칼로리에 예민하게 반응하지도 않았다. 물론 이렇게 사고가 달라지기까지 몇 년에 걸린 시행착오가 있었다.  사이 폭식증과 거식증을 오가며 홀쭉이도 돼보고 뚱뚱이도 돼보았다. 외모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들에게서 도망치기도 해 봤고 반대로 그냥 나 자체를 믿고 지지해주는 사람들 옆에서 힘을 얻기도 했다. 무엇보다 첫 연애의 실패를 딛고 다음 사랑을 시작한 게 큰 도움이 됐다.


올드보이 블루레이 버전 있는데 보내줄까요?


우연처럼 다가온 친구였는데 메신저로 보내온 영화들이 마음에 달린 빗장을 조금씩 풀어주었다. 기억을 잃은 오대수가 설원에서 앞을 보고 있는 나만큼이나 감동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피에타 개봉하는데 보러 가지 않을래요?

학교에서 친구가 햄릿 연극하는데 보러 올래요?


줄곧 혼자만 보던 것들을 같이 보고 나누는 일, 그렇게 나는 조금씩 마음을 열었고 다시 또 누군가를 사랑하게 됐다. 체납고지서처럼 지독히도 따라붙던 식이장애 또한 차츰차츰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런 시간들 덕분에 요즘에 다시 읽는『사랑의 단상』은 조금 다르게 이해된다. 결국 사랑이란 상상이 아닌 실재이며 상대방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면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또한 가질 수 없다는 걸 말하는게 아니었을까. 그러니 남자는 그냥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알게 된 게 아니었을까.


여자가 100일이라는 시간을 주었고 그렇게 시험하고 의심하다 보면 처음에 100이었던 마음도 기껏 해봤 99로 끝나버린다는 것. 그게 바로 롤랑 바르트가 말한 사랑의 단상이 아니었을까? 세상 모든 것이 타이밍이라는 말처럼 함께하는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찰나의 순간, 그 순간의 페이스를 잃지 않는 게 바로 사랑의 시작이자 사랑의 단상일 것이다.


달리기는 그런 의미에서 사랑과 참 비슷하다. 모든 러너에게는 자기만의 페이스가 있기 때문이다.

 거리를 완주하는데 페이스를 오버해버리면 뒤로 갈수록 점점 더 쳐지게 된다. 빠르면 빠를수록 도중에 낙오해버리기도 십상이다. 간신히 골인 지점에 들어와도 기존에 갖고 있는 기록보다 못 나오는 현상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반대로 페이스를 너무 천천히 하면 뛰어도 뛰는 것 같지 않아 도통 재미가 없다. 그러다 보니 달리는 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만 딴생각이 든다. 달리기 자체를 충분히 즐기지 못하고 설렁설렁 뛰다 보면 러너들에겐 최고의 순간이라는 러너스 하이 또한 오지 않는다. 그러니 롱런을 위해서 자기 페이스를 지키는 게 참 중요하다.  


러너로서 꾸준히 내게 맞는 달리기 페이스를 찾아나가는 것처럼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무엇을 할 때 가슴 벅찬지 어떤 것들에 숨이 막히는지 나아가 어떤 방향과 속도로 나아가고 싶은지 알게 되면 자신을 보다 사랑하게 되고 그로 하여금 상대방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되는 여유와 바탕을 가질 수 .


다행히도 요즘의 나는 운동을 통해 외모가 어떻게 달라질까 보다는 운동이 주는 즐거움, 기분 전환 그 자체에 만족하는 사람이 됐다. 내 몸이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하다는 걸 잘 알고 있고(예로 달리기를 시작한 후로는 일 년 내내 감기를 단 한 번도 겪지 않았다.) 건강한 심신 덕분인지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이제 친구들은 내게 예쁘다는 말보다 멋져라는 말을 더 자주 했다.


너라면 해내지. 너라면 완주할 것 같은데.

멋있어. 멋져


나 또한 예쁘다는 말보다는 이런 말을 듣는 게 더 좋다. 보이는 것으로만 평가하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들에 주목해주는 친구들이 있어서 감사할 따름이었다.


사랑의 아픔을 달래고자 숨이 턱끝까지 차오른 적도, 심장이 터질 정도로 뛰어본 적은 없지만  달리기를 통해 꾸준히 노력하는 것, 마라톤을 통해 서로 배려하고 응원하는 것, 러닝 크루에 속해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건강한 달리기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것, 이 모든 게 상처 받은 마음을 보다 단단하게 만든다는 걸 안다. 이 모든 것들이 서른의 나를 만들었고  자신과 내 주변을 사랑하게 해 주었으니까.


그래서 지금 또 어디에선가 거울을 보며 울상 짓는 여자들이 있다면 혹시 달리기 좋아하세요? 슬며시 물어보고 싶다. 때로 우리는 너무 많은 타인들의 시선에 갇혀서 힘든 거라고, 그것들을 잊는 데는 달리기만 한 명약이 없다고 알려주고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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