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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Nov 10. 2019

총이 울렸고 엄마는 바로 고꾸라졌다

유전학적으로서의 달리기

총이 울렸다. 엄마는 바로 고꾸라졌다.

등나무 아래 서있던 모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몇 초의 정적이 지나간 후 슬기 엄마라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운동회날이었다. 엄마는 맞벌이였지만 시간을 빼서 초등학생 딸의 운동회에 왔다. 학급 임원의 엄마라는 이유로 생각지도 못했던 계주 첫 주자로도 뽑혀 나가야 했다. 서른 명이 넘는 시선이 모두 엄마에게 주목됐다. 선생님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파이팅을 외쳤반 아이들 모두 내 이름부르며 엄마를 응원했다. 그땐 마치 우리 엄마가 슈퍼 히어로가 된 것 같았다. 슬기 너네 엄마가 달리는 거야?라는 옆 친구 질문에 응응!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목을 꼿꼿하게 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런 나와는 달리 엄마는 몇 번이고 스타트를 알리는 총구를 봤다가 발밑을 내려다봤다가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운동화 끈을 자주 묶었다 풀었다 하는 엄마에게 응원존에서는 열화와 같은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탕,

하고 총소리가 울리고 출발선 바로 앞에서 엄마가 넘어지는 순간 모든  끝이 났다. 마치 타노스의 손가락 한 번에 친하게 지냈 사람들이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리듯 주변의 모든 게 고요해졌다. 출발선 바로 앞에서 주저앉은 엄마에게 사람들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과 어딘가 일그러진 입모양들을 보면서 나는 손톱을 물어뜯을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은 허 하고 한숨을 쉬며 혀를 찼고 옆 친구는 울상이 된 채 나를 째려보았다. 저쪽 레일에 서 있는 두 번째 주자 아주머니가 머리카락을 쥐며 발을 동동 굴리는 게 보였다. 엄마도 그쪽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도통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일제히 출발했던 다른 팀 주자들이 두 번째 주자에게 바통을 넘겨줄 때쯤 응원존에 있던 어떤 학부형이 말했다.


슬기 엄마 달려요.


엄마가 등나무 쪽을 바라봤고 내 주변에서 일제히 눈을 피하는 사람들. 그들과 마주하며 엄마와 나는 죄지은 것 마냥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엄마는 이내 앞을 보더니 그대로 운동장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기억하건대 그건 달리기도 경보도 아니었다. 그냥, 조금 빠른 걷기였다. 넘어질 때의 파란만장한 동작과는 상이하게 엄마의 뜀박질은 너무도 평온했다. 초가을 태양이 너무 뜨거워서였는지 아니면 예상 못했던 경기 상황 때문인지 내 양 볼은 갈수록 불타올랐다.  


그날 계주가 끝나고 등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도시락 찬합을 혼자 까서 먹었다. 계주 주자로 나섰던 엄마들이 돌아와 숨을 골랐고 친구들과 친구의 엄마들이 서로 껴안으며 자축했다. 우리 엄마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이 왔다. 어머니 급한 일 때문에 집으로 먼저 가신다더라, 전해달라고 했어. 말해주고서 등을 돌렸다. 아무도 나와 같이 점심을 먹으려 하지 않았고 혼자 구석에 앉아 김밥을 우물우물 씹어먹었다. 아침부터 엄마가 정성 들여 싼 김밥은 밥보다 내용물이 더 많았는데도 자꾸만 목이 막혔다. 우리 엄마는 달리기 말고는 다 잘하는데, 이렇게 김밥도 맛있게 만드는데, 달리기라는 게 사람을 참 부끄럽게 만든다는 생각을 했다.

 



잘 뛰는 것에도 유전학적인 영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어려서부터 참 못 뛰는 아이였다. 단거리는 늘 꼴찌였고 빨라봤자 뒤에서 한 두 번째 정도 순위를 기록했다. 엄마처럼 출발선상에서 넘어진 적은 없지만 안 넘어지더라도 1,2,3등은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체육시간은 늘 너무 더웠고 힘들었다.

달리기뿐만 아니라 숨 쉬는 것 빼고는 모든 체육 활동에 자신이 없었기에 다리가 짧은데 왜 멀리 뛰기를 해야 하는지, 키가 작은데 왜 뜀틀 높이는 항상  키만 한 건온통 불만 투성이었다. 국민의례나 새천년 체조 같은 의무 활동 또한 싫어했다. 왜 전교생이 우르르 운동장에 모여 일렬로 줄을 맞춰 새천년 체조를 해야 하는지, 코와 입으로 들어오는 모래를 연신 들이마셔가며 단합하는 게 과연 선생님이 말해준 것처럼 자라나는 아이들의 심신 단련에 좋은 건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어려서 무용을 배울 때에도 쉬는 시간이면 늘 뒤에 가서 동화책을 읽던 아이였다. 피아노 학원에 가서도 건반을 두드리다가 손가락이 아프다는 이유로 슬그머니 만화책을 꺼내 읽곤 했었다. 피아노 학원 서고에 구비된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의 탄생 배경, 바흐 전기 같은 만화책은 오선지 위에 콩나물 모양이나 모자 모양 기호보다 훨씬 더 재밌고 음악에 대해 이해하기 쉬웠다. 그만큼 손가락 하나 쓰는데도 움직이는 것보다 책을 읽고 생각하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다.


중학교 땐 더했다.

귀여니로 대표되는 인터넷 소설이 한창 붐을 일으킬 때였다. 힘센 애들이 너도 나도 일진 흉내를 내며 교내를 활보할 때 나는 어떻게 해서든 체육 시간을 비켜가 보고자 종종걸음으로 양호실로 향했. 빈혈이나 생리통이라는 핑계를 달고서 체육 수업을 빼보려고 한 얄팍한 잔꾀였다. 그때  담임선생님이 체육 교사셨다. 말투도 거칠었고 행동도 내 기준에서는 과한 분이셨다. 체육 시간마다 준비 운동으로 귀 잡고 오리걸음 운동장 한 바퀴를 시켰고 학급 아이들을 체벌할 때면 교탁 위에 무릎 꿇고 올라가게 한 뒤 발바닥을 때렸다. 선생님의 사고방식 중 제일 이해 가지 않았던 건 아빠가 낚시를 자주 간다는 걸 알게 된 후 교무실로 따로 불러 낚싯대를 달라고 촌지를 강요했던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체육을 전공하거나 좋아하는 사람들은 안하무인에 과격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내게 체육 시간이라는 건 사기를 증진시키는 신체 활동이라기보다 힘센 애들이 자기 힘을 과시하는 시간, 강자가 무력으로 약자를 누르는 시간으로 여겨졌다.

 

고등학교 때는 매일 야간 자율 학습을 하느라 체력을 단련할 시간도 체육에 대해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그런 내가 대학교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자발적 운동이란 걸 시작하게 됐는데 다름 아닌 학교 헬스장에 구비된 트레드밀이었다. 트레드밀에서 속도 8을 유지한 채 두 발을 굴리던 게 스스로 행한 첫 운동이었다. 달리기보다는 거의 속보에 가까웠다. 절대 8 이상의 속도로 달리려 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속력을 내야 하는지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었고 숨이 차는 느낌 또한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늘 8 정도의 속도로 매일매일 1시간씩 트레드밀을 타길 반년 동안 반복했다. 운동이 즐겁거나 행복해서 한 일은 전혀 아니었다. 그냥 예뻐지고 싶었다.


인생 첫 실연을 겪고 난 후 예뻐져야겠다 독하게 마음 먹었을 때였다. 애초에 운동 자체를 배우거나 즐기려는 목적이 아니었기에 수단으로써의 운동은 전혀 재밌지 않았다. 오직 감량을 위해서만 달렸다. 선식만 먹고 트레드밀 위에서 걷고 뛰면일반식을 먹지 않은지 달째, 몸무게가 15kg 가까이 빠졌다. 사회적 외모 기준으로는 그때가 아마 제일 예뻤다고 자부하는데 내적으로는 가장 피폐했던 시기였다. 강의실, 교내 헬스장 외에 좀체 어디를 가려하지 않는 은둔형 인간으로 성향이 변했고 예민하고 신경질적이었다. 하루 종일 배가 고파 힘이 없었고 현기증 때문에 쓰러져서 잠드는 날들이 부지기수였다. 어느 날은 너무 어지러워 트레드밀에서 휘청이다 넘어져서 크게 다칠 뻔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도 운동에 별 재미를 붙이진 못했다. 그래도 처음엔 8로 걷는 게 힘들었는데 반복 학습의 효과인지 졸업할 때쯤에는   8이라는 속도가 그렇게 쉬울 수 없었다. 이와는 반대되게 처음엔 쭉쭉 빠지던 살이 이제는 웬만한 속도로 달려도 여간해선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인간의 몸이란 적응의 산물이고 한번 익숙해지면 이후에는 보다 더 격정적이고 다양한 운동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는 걸 그때 깨닫게 됐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요가, 수영, 스피닝과 같은 다양한 장르로 눈을 돌렸다. 반년에서 일 년 정도 운동을 바꿔가며 진행했다. 여전히 그 운동들이 재미있거나 좋아서 한 건 아니었다. 조금만 먹어살이 잘 찌는 체질이었기에 운동은 필수였고 먹으려면 뭘 하든 꾸준히 할 수밖에 없었다. 뭐라도 해야겠어서 뛰어든 마음가짐 때문인 어느 것에도 뚜렷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런 내가 이제는 총이 울리면 득달같이 어 나가곤 한다. 어떻게 하면 좀 더 빨리 나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을 다 뚫고 앞으로 뛰어갈 수 있지. 거미줄 같이 촘촘한 사람들 사이를 테트리스하듯 요리조리 피해 가며 출발선상에서 앞으로, 그보다  더 앞으로 뛰어 나간다.

사람들 한 무리를 빠져나오면 3km가 지나간다. 마라톤 대회는 5km 정도까지 오면 주로가 상대적으로 한산해지곤 하는데 중간중간 사진 찍고 인스타그램 인증하는 사람들을 지나치다 보면 또 어느새 10km에 달한다.  이제 터덜터덜 걷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지나쳐 뛰다 보면 또 21km, 최장거리 42.195km까지... 시작할 때만 해도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던 달리기는 계속하다 보면  즐겁고 재밌어지고 또 반드시 끝이 있다.  신기한 일이다.


유전학적으로든 유년시절의 경험으로든 난 달리기엔 전혀 재능이 없고, 없어야 하는 게 맞는데 이렇게까지 달리기를 좋아하게 될 줄이야.  이렇게까지 장거리를 달게 될 줄이야... 어린 시절의 나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다들 어려서 교육이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이걸 보면 내 경우에는 커서 받아들인 것도 어릴 때만큼이나 중요한 것 같았. 


서른 즈음에 달리기를 시작했고 일 년이 조금 넘는 지금까지 총 1,000km를 달렸다. 크고 작은 마라톤 대회 완주 메달은 어느새 20개에 달했고 나는 매주 한번 이상 재미로 조깅을 한다. 잘 모르겠지만 이건 절대 10살의 부끄러움이 만들어낸 게 아니었다. 초등학교 운동회는 달리기를 더 어렵게 만들었으면 모를까 동기부여는 전혀 되지 않았기에. 그렇다면 학창 시절 달리기는 늘 꼴찌였고 운동에 좀체 재미 못 붙이던 아이가 어떻게 이렇게 열심히 달리게 됐지? 계속 달리게 되는 동력이 뭐 대체? 앞으로 나올 글들은 순수하게 그 질문에 대한 응답에서 비롯된 매거진일 것이다.


그리 오래 달리지는 않았지만 달리기를 하면서 많이 배웠고 지금도 배우고 있다. 그리고 달리기를 계속 해내는 데는 타고나거나 천부적인 재능이 필요 없다는 사실을 매 순간 깨닫고 있다. 아무렴 나이 서른에도 이렇게 잘 달리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서른 살 인생에서 열 살 운동회가 기억에 오래 남았듯, 백세 인생에서도 서른 살의 달리기는 오래오래 기억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쓰려고 한다. 때론 넘어지고 때론 좀 부끄러워도 결국엔 일어나서 달릴 수밖에 없었던 그 모든 순간들을 앞으로 천천히, 차근차근 써 내려갈 예정이다.


마음의 총성은 이미 울려 퍼졌다.

이제는 고꾸라지더라도 열심히 뛰어봐야겠다. 우리 엄마가 그랬듯 조금은 우습더라도, 아무도 응원하지 않더라도 자기 페이스대로 한 걸음씩 뛰어봐야겠다.  내딛는 모든 발자국엔 의미가 있을 테니 다른 사람들보다 더디더라도 끝까지 한 발 한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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