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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May 17. 2020

너네 동네인데 여길 안 뛰어봤다고?

달려라 동네 한 바퀴  

돈을 모아보려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자취방을 옮기는 일이었다. 지출을 좀 줄여보려고 아득바득 전세로 집을 구했는데 어쩌다 보니 언덕 위, 역에서 먼 곳, 서울에서 제일 길다는 8호선~2호선 환승 구간을 거쳐야 통근이 가능한 낡은 주택에서 살게 됐다. 리모델링을 해서 내부가 깨끗하다 것 빼고는 별다른 이점은 없었다.

 

새로 옮긴 동네는 정 붙이기도 여간 쉽지가 않았는데 역에서 내리면 주변이 왜 이렇게 복잡하기만 한 건지, 지하도와 백화점이 연결돼있는 것도 백화점 뒤로 로데오거리라 이름 붙인 술집들이 즐비한 것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곳을 지나쳐 걷다 보면 재개발 현장과 함께 간판, 열쇠, 현수막 제작 업체들이 테트리스 맞추듯 얼기설기 붙어 있었는데 어둡고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있는 공원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이 든 할아버지, 할머니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니 어디 하나 마음 둘 곳이 없었다. 집에 들어가면 집 밖을 벗어날 일도 없었고. 나는 너무 급하게 집을 구한 걸까. 있는 예산에 맞춰서 어떻게든 월세를 벗어나 보고자 전셋집을 찾다 보니 전혀 생뚱맞은 동네에 생뚱맞은 곳에 살게 되었다. 게다가 나는 러너였는데 말이다.




"너네 동네인데 여길 안 가봤다고?"


러닝 크루 장을 맡고 있는 오빠와 잠실을 달리던 참이었다. 이사 오고 나서는 동네를 단 한 번도 뛰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오빠는 토끼눈을 뜨고서 따지듯 말했다.


"여기가 얼마나 뛰기 좋은 곳인데! 이쪽 살면서 안 뛴다는 건 말이 안 되는데?"


이 쪽이란 범주는 참 넓은가 보다. 잠실이 우리 동네라고 할 수 있는가. 지하철 역으로만 따져도 세 정거장이나 차이 나는데.


"잠실, 천호, 올림픽공원 이 라인이 런세권이야. 네가 아직 몰라서 그러는데 이쪽으로 좀만 가면 너네 집 나오고 너네 집에서 10분만 뛰면 올림픽공원 나와."


지리 분석도 러너답게 체감형 달리기 시간으로 말해주었다. 말마따나 정말로 런세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후로도 한참 동안 뛰기 좋은 곳에 대해 설명 들었다. 아산 병원 옆은 남들이 잘 모르는 벚꽃 명소였고 올림픽 공원에 오면 평화의 문 앞에서 러너들이 꼭 사진을 찍는다는 것, 이쪽 기반 러닝 크루들은  벽화 앞을 자주 지나간다 등등등. 5'30" 페이스 10km를 뛰는데도 이렇게 말을 많이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동네를 훤히 꿰고 있는 러너답게 당연히 아는 것도 많고 아는 사람도 많았다. 뛰다가 마주치는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는 건 일상이었고 달린 뒤에는 어디냐고 연락 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덕분에 처음 보는 러너들과 안면도 트고 맥주도 마시게 됐다.


"롯데월드타워 지하 마트에서 캔맥주를 산 후에 5층으로 올라가면 긴 벤치가 있어. 거기서 맥주를 마시면 크으.. 아경이 예술이야."


거짓말처럼 탁 트인 조망이 정말로 예술이었다. 어두운 밤, 하늘에는 별이 도로에는 차들이 저마다의 빛을 뿜어내며 길을 밝히고 있었다. 고작 사천원에 이런 멋진 야경을 볼 수 있다니 이제는 신봉해야했다. 이 사람이 이 동네 찐 러너라는 걸.


"대체 이런 꿀팁은 어떻게 아는 거예요?"


"뛰다 보면 알게 돼있어. 그러니까 너는 축복받은 동네에 살고 있는 거라니까?"


밤 처음으로 이 동네에 둥지를 튼 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생각하게 됐다.

 



오래 사귀다 헤어진 연인의 빈자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지듯 사람은 대개 뭔가가 없어졌을 때 그것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곤 했다. 내게는 이전에 살던 동네가 그랬다. 집 밖을 나와 신호등 하나만 건너면 천변이 있던 다세대 건물 3층에 살았다. 봄이면 하천 옆 자전거 도로를 따라 일렬로 흐드러지게 피어나던 개나리, 벚꽃 무리. 사시사철 아이들이 뛰놀고 부부가 유모차 끌며 산책하던 평화로운 풍경들, 그리고 천을 따라 뛰다 보면 나오던 너른 한강... 이사 온 동네에 정을 붙이기 어려웠던 것도 어쩌면 이전 동네에 대한 그리움, 아쉬움, 상실감에서 비롯된 건지도 몰랐다. 그리하여 어울리지도 않는 방구석 폐인이 돼버렸을 때쯤 그만 문 열고 나오라고 말한 것도 달리기였다.


"오늘 뛸래 10km? 그보다 더 뛰어도 되고."


누구보다 이 동네를 좋아하는 러너 옆에서 뛰게 되면 특유의 긍정적인 정신에 서서히 물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달리기가 매주 10km씩 3주 차에 접어들자 여기로 가면 어떨까? 뭐가 나올까? 이 정도면 지하철 안 타고도 뛸 만한데? 여긴 너무 예쁘네? 생각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이 동네에 걸어둔 마음의 빗장이 서서히 풀려가고 있었다. 낯선 장소를 알아가면서 본다는 것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너무나 상대적인 것이었다. 보는 사람의 의지에 따라 좋고 나쁨이 결정됐다. 


가령 아무리 좋은 그림도 어린아이의 눈으로만 보면 장난처럼 비쳐질 수 있듯이, 반대로 세간에 저평가된 그림도 누군가 좀 더 알아가려 노력하고 좋은 부분을 찾아내려 애쓰면 얼마든지 그 가치가 상승할 수 있었다. 동네도 마찬가지였다. 이 동네는 변하지 않았는데 바라보는 방식이 변해버리자 눈에 들어오는 것 또한 달라졌는데, 가령 로데오 거리 뒷골목엔 내가 좋아하는 작은 식당이나 아기자기한 카페가 곳곳에 숨어있었다. 재개발 지역 옆엔 몇십 년도 더 된 노포 맛집들이 자리해있었고. 어느 날 저녁 퇴근길엔 우리 집 앞에 핀 가로수 벚꽃이 너무 예뻐서 한참이나 넋 놓고 바라보았다.


"너네 동네인데 여길 안 뛰어봤다고?" 


그리하여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땐 황당하기가 그지없었는데 이제는 말이 가진 힘을 몸소 체감하게 됐다. 나 또한 나만의 루트를 찾아내고 싶기도 했고 내가 찾은 발견을 다른 이한테 나누고 싶기도 했다. 친한 친구, 동생을 집으로 초대해서 밤새 얘기하고 다음날 동네 맛집을 탐방하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유쾌한 경험이었다. 그래도 아직 이 동네의 찐러너는 되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그러려면 이 동네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고 찬찬히 둘러봐야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요즘엔 역에서 내리면 바로 집으로 오지 않고 조금씩 걸어도 보고 샛길로 새보기도 한다. 무심코 지나쳤던 곳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서 내가 놓친 이 없나 그렇게 살펴도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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