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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Nov 17. 2019

힘든 걸 즐기는 사람도 있니?

그냥 재밌어서 하는 운동

“그거 하면 죽을 것 같다던데. 너 힘든 거 즐기니?"


크로스핏 한다고 말하면 주변 지인들이나 친구들이 자주 물었다. 그 운동 정말 힘든 거 아니냐고. 처음에 이런 질문을 받으면 아냐, 생각보다 재밌어. 대충 얼버무리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제대로 답변을 해야 될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면 상대방도 그걸 좋아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사람마다 기호가 다 다르고 내가 좋아하는 것이 타인에게도 좋게 받아들여질지는 자신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 운동을 하면서 삶이 좀 더 풍요로워졌다. 땀을 비 오듯 쏟아내다 보면 일상에서 오는 억울하고 화나는 일들이 어느새 무뎌져 버렸고 세상에 나 혼자 동떨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에도 크로스핏이라는 그룹 운동을 통해 언제 그랬냐는 듯 소속감도 느끼게 됐다. 내가 그랬듯 누군가 크로스핏을 하면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운동을 통해 수혜 받은 내가 그 물꼬를 조금이라도 열어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에 운동에 대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게 됐다. 처음엔 내가 한 운동을 그냥 기록 형태로 그려가다가 크로스핏을 아직 안 하는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운동하다 느낀 점들을 다양하게 그림으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맨 처음 그린 그림은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왜 크로스핏을 하는가> 초심으로 돌아와 이 운동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솔직히 시작은 회사 생활이 힘들어서였다. 세상에 어디 안 힘든 회사가 있겠냐만은 원래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것처럼, 근속 기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우리 회사가 제일 엿 같아 보였다.『신경 끄기의 기술』, 『직장인 퇴사 공부법』같은 책들에 자주 눈길이 갔고, 어느 순간부터는 두 눈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퇴사 콘텐츠가 우후죽순 쏟아졌다. 퇴사가 트렌드가 된 것이었다. 그렇게 인기를 얻는 퇴사 콘텐츠에 힘입어 나도 언젠가 퇴사를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지금도 똑같은 회사에 4년째 꾸준히 다니고 있는 중이다. 엿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 엿을 질겅질겅 씹다가 송곳니가 다 빠져버린 꼴이었다. 사실 그 바탕엔 모두 크로스핏이 있었다. 크로스핏이 너무 좋아서 이직도 못하겠고 어쩌다 보니 알량한 애사 심마저 생겨버렸다.

'월급 받아야 운동 끊지'

'크로스핏 박스랑 회사랑 가깝잖아'

'점심시간에 운동 갈 수 있는 회사니까. 사실 그건 그냥 내가 가는 거래도....'

크로스핏과 관련된 이런저런 이유들로 인해 퇴사를 잠정 보류하게 됐다. 갑질 하는 상사, 일한 만큼 대우해주지 않는 불합리한 직장 내 처우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덮어버릴 수 있게 됐다. 그만큼 이 운동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니까 다른 수입원이 생길 때까지만이라도 좀 더 다녀보자 자기 합리화를 해버리게 된 것이었다.

 



"원래 회사에 욕심 없는 사람이 오래 다닌대요. 승진 욕이나 연봉 이런 거. 언니처럼 운동을 좋아하면 그런데 별로 신경 안 쓰나 봐."


어느 날 운동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란히 걷던 동생이 말했다. 어쩐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날은 연차를 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집에서 40분 거리인, 그것도 회사가 코 앞에 보이는 선릉에 왔다. 선릉은 매일 출퇴근하는 곳이자 굳이 안 봤으면 좋겠는 상사를 마주칠 수 있는 장소였다. 그리고 그 이전에 소중한 크로스핏 박스가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휴가 내고 굳이 여기 왔다고? 너 진짜 할 일 없어? 여기가 그렇게 좋아?"


코치님도 이상하게 여길 만큼 나는 이 운동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런데 이건 비단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나는 사람들이 너같이 왜 휴가 내고 여기 오는지 모르겠어. 가끔은 회식하고 나서도 여기 온다니까."  


내가 다니는 크로스핏 박스에는 적게는 1~2년, 많게는 5년 이상 꾸준히 다니는 장기 회원들이 많았다. 스스로도 변태라고 할 만큼 크로스핏 운동을 좋아했고 헬스 대비 비용이 적지 않은 크로스핏을 재미있어서 꾸준히 등록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그도 그렇거니와 운동을 지속하는 데 있어서 재미 요소는 정말 중요했다. 오래 할 수 있는 운동을 찾는다는 건 그 운동이 내일도 가고 싶고 모레도 가고 싶을 만큼 재밌어야 하는 거니까.


"운동이 어떻게 재밌을 수가 있죠?"


만약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우리가 만났죠? 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


라고 대답하고 싶을 만큼 좋아하는 운동을 찾는다는 건 마치 연애할 상대를 찾는 것과 같았다. 없을 것 같던 운명의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나고 그로 인해 매일 보고 싶어 지고 못할 것 같던 결혼도 하게 되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면 운동 또한 마찬가지였다. 체육 수업 만년 꼴찌에 자칭 타칭 운동 무능아였던 내가 매일 같이 자발적으로 운동을 하러 가고  운동 관련 콘텐츠를 정기적으로 발행하게 된 계기는 기본적으로 재밌기 때문이었다. 갈수록 무료해지는 일상에 찾아온 이 재미를 좀 더 오래 영위하고 싶어서, 그렇게 해서라도 좀 더 행복해지고 싶어서 내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살뜰히 챙기고 있는 거였다.


재밌는 운동을 만나게 되면 일 년에 몇 안 되는 연차를 운동에 쓰는 것도 전혀 아깝지가 않았다.

연차를 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가 원하는 시간에 크로스핏 박스에 올 수 있는데?

(크로스핏은 횟수 제한이 없는 운동이다)

운동 끝나자마자 후다닥 회사로 복귀하지 않아도 되는데?

(나는 주로 점심시간에 운동을 하기 때문에 끝날 때마다 허둥지둥 박스를 나온다)

남들 운동하는 거 구경할 수도 있고 옆에서 응원도 해줄 수 있는데 말이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크로스핏터들을 보면 마치 축구 경기 승부차기를 보는 것만큼 감질난다)

물론 간만의 휴가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있는 게 좋은 사람이라면 그건 그 사람에게 정말 잘 맞는 휴식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누워있는 게 진짜 휴식일까? 왜 쉬어도 쉰 것 같지 않지?라고 생각했다면 이제 휴식에 대해서 새롭게 정의 내릴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심리학자이자 '삶의 질 연구소' 소장인 미하이 칙센트 미하이는『Running Flow』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쉬고 가만히 늘어져있는 것이 편안하고 좋다고 느끼지만 실제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하고 있을 때 느낀다. 사람들은 인생의 최고의 순간을 무언가에 오롯이 집중했을 때 경험한다.


크로스핏을 시작한 후로 나는 눕는 것도 여기 와서 눕는   좋았다. 자취방에 홀로 쓸쓸하게 있는 것보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공간에서 운동하고  흘리는  좋았다. 그건 비단 연차를   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마찬가지였는데, 매일 점심시간마다 상사의 전쟁 같은 가정사를 듣거나 관심 없는 남의  육아 불평을 들으며 거짓 미소를 띠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꽤나 피곤한 일이었다. 건강한 사람들 틈에서  흘리며 운동하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이로웠다. 운동을 통해 몸과 마음의 잡념을 깨끗하게 비워내고 나면 심지어 일의 능률도 올라갔다.

 



재미에 기반해서 <나는 왜 크로스핏을 하는가>에 대한 웹툰을 개인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주변인들 반응은 대략 이러했다.


"진짜 다 떠나서 재미있다는 게 크로스핏을 계속하는 큰 이유인 것 같아요"

 (29 남, H사 신입, 집이 복정이고 회사가 용인인데 퇴근 후 매일매일 선릉으로 운동하러 옴)


"진짜로 그냥 재밌음"

(31 여, 퇴사 후 현 공시생, 퇴사에 후회는 없지만 집이 화성이라 선릉으로 운동을 못 오는 게 너무 아쉬움. 그래도 공부하다 버거울 땐 일일 단위로 운동하러 오고 있음)


"매일 저녁 자기 전 공개되는 다음날 와드를 보며 하루를 살아가는 재미"

(30 남, S사 재직 중, 크로스핏 회원권과 치킨 사 먹을 돈 때문에 회사를 다니고 있음)


저마다의 사정은 있겠지만 결국 이유는 하나였다.
그냥 좋은 게 큰 것 같아요. 맞아. 그냥 좋아. 크로스핏이 그냥 좋아. 그냥 재밌어.

사실 난 용인에 취업한 동생이 1시간 넘게 통근 버스 타고 크로스핏에 오는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전 회사 사람들은 길에서 마주치기도 싫다는 언니가 부모님께 욕먹어 가며 선릉으로 크로스핏 하러 오는 이유 또한 알지 못했다. 나는 100% 그 사람들이 될 수 없으니까. 다만 안다고 믿을 뿐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를 댔지만 어쩌면 우리는 모두 다 공통된 이유로 이 운동을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러니 그냥 좋은 데는 딱히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고 믿을 뿐이다.


세상에 힘든 걸 즐기는 사람은 없다. 그냥 본인이 좋아서 하는 거고 재밌어서 하는 것들에 힘듦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운동을 지속할 수 있는 밑바탕엔 재미가 있어야 하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재미있는 것들에 에너지를 쏟는 삶을 이어가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가치를 나누고 함께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오늘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운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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