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이 묵고 있는 숙소는 표선면에 위치한 해비치 호텔이다.
남편이 현대자동차 직원이어서 가끔 숙박권을 얻게되어 연애시절부터 왔고
양가 부모님도 한번씩 보내드렸던 호텔이다. 제주에서는 꽤 괜찮은 오션뷰를 갖고 있어서
아름다운 제주 바다를 한 눈에 담는 호텔을 찾는다면, 해비치 호텔을 추천한다.
늘 바다뷰를 선호했던 우리는 좀 이색적인 뷰의 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호텔 바로 근처에 제주 민속촌이 있어서, 테라스에서 바라본 뷰는 사진과 같다.
초가집은 우리 대한민국의 전통 건축양식이지만 이렇게 야자수와 함께 어울려 있으니
동남아의 어느 호텔 같은 이국적인 느낌도 들었다. 바다 뷰가 좀 식상하다면 민속촌 뷰도 추천 !!
요즘처럼 해외가 고픈 사람들에게 이만한 대리만족도 없을것이다.
셋째날 아침은 비가 내렸다. 안개도 자욱하게 드리워져 꽤 운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원래 기상 예보로는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해서 야외 일정을 계획했는데
이날따라 기상예보와 실제 날씨가 자꾸만 달라졌다.
그래서 계획에 집착하지 않고, 날씨에 맞게 움직이기로 했다.
아침식사는 전날 사두었던 바나나, 우유, 씨리얼 등으로 간단히 해결하고
1시간 거리에 있는 맛집 "고집돌우럭"의 우럭 정식을 먹기 위해 채비를 하고 나섰다.
이 식당은 제주를 대표하는 맛집 중의 맛집으로, 대기가 어마어마하다.
그래서 우리는 오픈런을 위해 아침 9시에 출발했고, 오픈시간 맞춰 왔을 때 이미 만석에다
우리 앞에 2 팀이 대기하고 있었다. (비오는 일요일 아침 10시의 상황이었다)
그래도 약 30분정도 대기를 했다가 식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5세 미만 아이들에게는 아이 식사가 따로 무료로 제공되지만 우리 딸은 누가봐도 7살이었다
우리는 런치 B세트를 시켰고, 전복이 들어간 우럭찜과 제주 뿔소라 미역국 그리고 옥돔구이를 맛봤다.
새우와 전복이 들어간 우럭찜은 시래기와 함께 낭푼 밥에 담아 촉촉하게 먹는 맛이 일품이었다.
달지도 짜지도 않았지만 자극적이지 않고 깊은 맛을 내는 양념과 부드러운 우럭 그리고 시래기를
밥에 적셔 한 입에 넣다보니 어느새 밥그릇은 깨끗하게 싹싹 비워졌다. 제주에 와서 늘 비슷비슷한 음식들
(흑돼지, 갈치구이, 고기국수)만 먹다가, 이 우럭찜은 정말 별미중의 별미였다.
7살 우리 딸아이는 매운 것을 아직 잘 못먹어서 뿔소라미역국이랑 옥돔구이를 같이 먹었고
반찬들은 모두 정갈하고 맛이 좋았다. 왜 이렇게 인기가 좋은 식당인지 알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올때 되니, 대기가 29팀이었다. 여긴 오픈런을 추천....)
배부르게 먹었으니 이제 커피 한잔을 해야 할 때. 산방산으로 향하던 길에 "마노르블랑"이라는 카페에 들렀다
2018년, 아는 언니가 제주에서 게스트하우스를 하고 있어서 나는 그 당시 23개월된 우리 딸아이와 둘이서
제주에 5일동안 머물렀다. 그때 언니가 데려가 준 이 산방산 '마노르블랑'카페에서는 커다란 스피커로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벽면 전체가 이렇게 아름다운 찻잔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 카페의 가장 큰 특장점은, 원하는 찻잔을 골라 원하는 차를 따라 마실 수 있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음악과 찻잔, 그리고 향긋한 차를 마시며 황홀경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 눈물이 터져나왔다. 육아로 인해 잊고 있었지만, 난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을 참 좋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미술관에 그림보러 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찾아 듣고, 영화를 보면서도
그 장면의 미장센이나 구도를 보며 감상하기를 좋아한다.
아이를 낳고, 나는 좋아하는 음악을 찾아듣지 않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으려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가장 뒤로 미루고 육아만 열심히 하다가,
갑작스레 훅 들어온 그 아름다움의 향연들이 뇌도 거치지 않고 무의식으로 들어와
눈물샘을 터뜨렸던 것이다. 내가 왜 울지? 하며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나는 제주에 오면 이곳을 한번쯤 다시 오고싶다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왠걸, 그 동안 너무 많은것이 달라졌다. 여긴 그저 관광지에 있는 매점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아름다운 찻잔들은 여전히 한쪽벽면을 장식하고 있지만, 더이상 이 찻잔에 차를 마실수도 없었고
(차를 팔지도 않았고) 음악도 나오지 않았고, 수국을 잔뜩 심어두어 관광객들이 바글바글 거렸다.
실망 또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카페를 나섰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이는 딸 때문에 마음이 내내 고단했고
북적거리며 테이블도 제대로 정리안되어 있는 그 곳을 그냥 벗어나고 싶었다.
안녕,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둘께
비가 그치고, 우리는 첫날 반딧불이를 보러 왔던 산양큰엉곶에 다시 왔다.
제주의 숲을 제대로 보고 느끼고 싶어서였다. 비 온 뒤 숲에서 나는 초록초록한 향기를 좋아한다.
나도 남편도 어렸을 때 시골에 살았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풀냄새 흙냄새 비냄새를 좋아한다.
그래서 제주의 숲을 한번 제대로 보고자, 산양큰엉곶으로 왔다.
(사실, 사려니숲길 또는 비자림을 가고 싶었으나, 루트가 꼬이는 바람에 여기를 선택했다)
낮에 보는 숲도 괜찮았다. 덩굴이 얼기설기 얽혀있는 모습조차 낯선 즐거움을 주었고,
돌과 나무와 이파리가 어울려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보였다.
이렇게 많이 걷는 엄마아빠 덕분에 우리딸도 하루 5천보 이상은 걷게 되었다.
우리는 서쪽 코스의 마지막 행선지로 '더클리프'를 갔다.
여기는 해질무렵 노을이 꽤 멋진 곳이지만, 아쉽게도 하늘엔 구름이 가득했다.
저 멀리 색달해수욕장에는 서핑을 즐기는 서퍼들이 가득했다.
중문 색달해수욕장에는 서핑클럽이 있어서, 강사가 서핑을 가르쳐주고 보드도 탈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
7살 아이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아직 즐길 나이는 되지 않은 것 같아서
다음에 우리 딸 좀 더 키워서 언젠가 서핑도 함께 해 보기로 ^^ (비용이 저렴하진 않다)
이 곳에서 간단히 간식이나 해결할까 했지만, 맛있는 메뉴들이 있어서 여기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여행을 가든 맛집을 가든 그 집의 시그니처 메뉴는 꼭 먹어봐야 한다.
여기 더 클리프는 피자 파스타 치킨 감자튀김 등 다양한 음식들이 있는데, 여기서 제일 핫하다는 메뉴 두 가지를 주문했다. 현무암치킨은 겉으로는 거의 숯덩이처럼 타버린 것 같지만, 오징어 먹물을 넣어 튀겨서
튀김옷 그 자체로 고소하고, 고기는 윤기가 좌르르 흐르며 부드러웠다.
멜젓 오일파스타는 멜젓 특유의 향이 있었지만 거부감은 없었다. 7살인 우리 딸아이가 제일 맛있게 먹었던
파스타였다. 고기와 마늘후레이크가 있어서 다양한 식감을 즐길 수 있었다.
호텔에 돌아오니 8시쯤 되었지만, 우리 딸의 못말리는 수영장 사랑 덕분에 오늘 저녁도 마감할때까지
저녁수영, 아니 밤수영을 즐겼다. 다음날이 호텔 수영장 정기점검날이라 수영을 할 수 없으므로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해 밤수영을 즐겼다.
튜브가 없으면 불안해 하던 우리 딸도, 구명조끼를 입고 혼자 개헤엄을 칠 수 있을만큼
물을 꽤 즐기게 되었다. 우리딸 걷지도 못했던 1살때 오고, 3살때 오고, 이제 7살때 오는 해비치 호텔.
장소는 그대로지만 그 시간동안 우리 딸이 쑥쑥 자라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셋째 날이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