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막소설
0.
샌프란시스코의 주차 규칙은 상당히 체계적입니다. 기본적으로는 인도와 도로 사이의 경계석 색깔에 따라 주차 가능 여부와 시간을 알 수 있습니다.
회색 (페인트 없음) - 주차 가능
빨간색 - 주차 금지
흰색 - 승객 픽업/드롭만 가능 (5분 제한)
초록색 - 단기 주차 (10분에서 30분 사이)
노란색 - 화물차 상/하차 시만 주차 가능
파란색 - 장애인 주차 전용
하지만 경계석이 회색이라고 해서 안심하다가는 주차 딱지를 떼기 십상입니다. 기분이 좋다가도 주차 딱지를 떼면 자책감 때문에 며칠간 무드를 망칠 수가 있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회색 경계석에서도 미터기가 있는 경우에는 화면에 표시되어 있는 금액을 지불해야 하며, 주차 표지판이 있는 경우엔 그 내용도 잘 확인해야 합니다. 제한된 시간만 주차가 가능한 곳도 있으며, 주차가 허용되는 시간과 불가능한 시간이 명시되어 있는 경우도 있으니 모두 확인해야 합니다. 나는 주차 딱지를 여러 번 끊은 후에야 이를 모두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1.
나는 지금 주차가 어렵기로 소문난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을 삼십일 분째 빙글빙글 돌고 있습니다. 해가 짧은 요즘 같은 때에는 자리 찾기가 훨씬 더 까다롭습니다. 약속 장소 근처 몇 블록 안에 있는 거리를 눈에 불을 켜고 천천히 운전하다 보면 어깨가 뻐근해져 옵니다. 여기도 아니고, 여기도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자리는 당연히 몇 시간씩 마음 놓고 주차할 수 있는 회색 경계석 자리입니다. 하지만 그런 자리는 수량이 정해져 있고, 샌프란시스코의 수많은 다른 차들도 저와 마찬가지로 그런 자리를 좋아합니다. 지금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대체 언제들 퇴근하고 온 것인지 인기 있는 자리는 이미 부지런한 사람들이 차지한 지 오래입니다. 아니면 오자마자 운명처럼 꼭 맞는 자리를 찾은 운 좋은 사람도 있겠죠.
간혹 차들이 빽빽이 가득 찬 거리에 두세 자리가 보란 듯이 나란히 비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물론 저도 좋아라고 그런 곳에 차를 대곤 했습니다. 하지만 내려서 주차 미터나 표지판을 잘 확인해보면 그런 곳은 공사 중이라 주차가 불가능하거나, 5분만 주차가 가능하다거나 하는 문제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렵사리 주차한 자리에서 차를 다시 빼다 보면 정말이지 맥이 빠집니다. 이런 일이 몇 번 있고 나면, 붐비는 시간에는 자리가 있어도 웬만하면 믿지 않고 지나치게 됩니다. 거기는 뭔가 이유가 있으니까 비어 있는 겁니다. 아니면 다른 재빠른 사람이 이미 채 갔겠지요. 물론 내가 운이 너무 좋아서 그 자리를 처음 발견했을 수도 있겠지만, 경험상 그럴 확률은 너무나도 낮더군요.
이번엔 빈자리가 하나 있기는 한데, 앞뒤 공간이 조금 짧습니다. 주차가 가능할 것도 같고, 어려울 것도 같고... 확신이 안 섭니다. 예전 같으면 차 엉덩이부터 들이밀고 봤겠지만, 뒷 차 범퍼를 긁기 직전에 나타난 차 주인에게 호되게 혼난 이후로는 되도록이면 모험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여기도 이 바쁜 시간에 비어 있는 걸 보면 남이 생각하기에도 필시 좋은 자리가 아닌 겁니다. 누군가는 여기에 주차를 시도하다 도저히 각이 안 나와서 포기하고 갔을 겁니다. 인기가 없는 덴 다 이유가 있겠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이번에도 애써 지나칩니다. 시간 낭비하지 말자. 어차피 안 맞을 거야.
2.
사실 이곳에 도착하기 약 0.5마일 전에도 빈자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좀 멀긴 하지만, 그곳에 주차를 하고 걸어갔으면 약속 장소에 이미 도착하고도 남았겠죠. 아까도 고민을 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좋은 자리를 잡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일을 그르친 거죠. 생각해보면 매번 그랬습니다. 그때 거기가 조금 아쉽긴 해도 참 좋았는데. 이제는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그곳이 여전히 비어 있으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경영학과 수업에서 배운 '양손잡이 조직 이론'의 탐험Exploration과 활용Exploitation의 딜레마가 생각납니다. 기업이 최선의 결과를 위해서는 이미 가진 것의 활용과 새로운 것의 탐험을 균형 있게 수행해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저는 활용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탐험을 한 셈이죠. 그런데 미래를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이게 어려운 문제인 겁니다.
오! 앞쪽에 차 한 대가 빠질 것 같습니다. 한 남자가 레스토랑에서 나와 차에 탑니다. 회색 혼다 시빅에 시동이 걸리고, 약간의 진동과 함께 후미등에 불이 켜집니다. 자리도 참 좋아 보이고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얼른 저 자리를 차지해야 합니다. 마음이 급해지고 곧바로 제 앞에 있는 차에 눈길이 옮겨갑니다. 제발 그냥 지나가라. 빨간 머스탱 선생님 많이 바쁘시죠? 가던 길 가세요. 하지만 야속하게도 빨간 머스탱은 제 앞에서 차를 멈추더니 우측 깜빡이를 켭니다. 저기에 주차하겠다는 소립니다. 나는 거멓게 탄 속을 부여잡고 빨간 머스탱을 돌아 지나칩니다. 그럼 그렇지. 좋겠다 개새끼. 평소 욕을 하지 않는데도 이럴 땐 나도 모르게 욕이 나옵니다.
이쯤 되면 그냥 차를 돌려 집에 가는 것이 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혼자 있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지 몰라. 약속이 길어봐야 한 시간 반 남짓인데 한 시간을 주차하는데 쓰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눈도 뻑뻑하고 이제 허리도 아픈데 좀 쉬고 싶다. 요즘은 어플을 통해서 자릴 찾기도 한다던데 한 번 이용해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빵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사이드 미러를 보니, 뒤에 있던 벤츠가 거북이처럼 슬금슬금 움직이는 내가 적잖이 답답했나 봅니다. 벤츠는 화를 내듯 요란한 엔진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나를 추월해 사라졌습니다.
3.
나는 여전히 쌀쌀한 다운타운을 삼십일 분째 빙글빙글 돌고 있습니다. 촘촘하게 거리를 메운 차들과 따뜻한 레스토랑 안에서 식사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다 보니 오는 길에 지나쳐왔던 빈자리가 생각납니다. 거기보다 더 좋은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그 자리는 아직 비어 있을까? 나도 언젠가는 내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이러는 와중에도 시간은 흐르고 이러다 정말 집에 돌아갈 수도 있겠구나 싶으면서도, 자리가 또 언제 날 지 몰라 운전대를 부여잡고 두 눈알을 굴리고 있는 제가 우스워 넋두리해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