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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민웅 Aug 03. 2019

아보카도 핸드

토막소설

- What’s your favorite food?
- 음.. 어… 아보... 아니, 아보… 카도?


오픽을 망치고 집에 온 지현은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무너지는 걸 느꼈다. 좋아하는 음식을 묻는 질문에 하필이면 먹어 본 적도 없는 아보카도가 떠오르고, 아보카도의 ‘ㅂ’이 b 인지 v 인지 생각하느라 대답을 30초에 걸쳐 한 후에는 누구라도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안전빵’으로 지원한 한 ‘듣보잡’ 중소기업으로부터 불합격 문자를 받았다.


옛날 같으면 ‘결혼이라도 잘하면 되지’라고 생각했겠지만, 요즘은 여자도 직장 없이는 결혼이 힘들다는 건 지현의 엄마도 교회 아주머니들을 통해 아는 사실이었다. 지현은 부모님과 떨어져 살고 있었는데, 우울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인 건지, 아니면 위로받을 수 없어 불행인 건지 잠시 고민했다. 그래도 아직 전자라고 느끼는 것을 보니 아직 자존심이 남아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여권신장 따위가 다 뭐야, 먹고살 수 있다면 취집이라도 좋겠어. 지현은 생각했다.


그래도 지금 지현은 작은 행복을 느끼고 있었고, 그 근원은 손에 들린 아보카도였다. 집에 오는 길에 이마트에 들렀다가 갑자기 알 수 없는 열망에 사로잡혀 아보카도를 산 것이다. 한 개에 이천 원이 넘는 이 수입 과일은 결코 싸지 않았지만, 지현에게 묘한 위로를 주었다.


사실 아보카도는 결코 인기 있는 과일이 아니었다. 지현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보카도를 알지도 못했었다. 한 연예인이 티브이에서 아보카도밥을 만들어 먹은 후로 갑자기 모두가 아보카도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눈을 감고 먹으면 참치 뱃살 맛이 난다고도 했다. 전국의 마트에 아보카도가 진열되었고, 아보카도는 불과 몇 달 만에 친숙한 과일이 되었다. 이미 인스타그램에서 아보카도밥 인증샷을 많이 본 터라 지현은 아보카도를 어떻게 잘라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동그란 구 형태의 씨앗이 가운데에 있으니 씨앗의 둘레를 따라 반으로 갈라 나눈 후에 씨앗을 빼내면 된다.


지현은 가장 좋아하는 그릇에 밥을 동그랗게 담은 후, 비닐봉투에서 아보카도를 꺼내 왼손으로 감싸잡았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식칼을 들어 아보카도를 길쭉한 방향으로 탁 친 다음 손가락으로 굴려가며 갈라 나갔다. 잘 익은 아보카도는 생각보다 속이 연하고 미끄러워서, 오른손에 힘을 주자 식칼은 동그랗고 단단한 아보카도 씨앗을 비껴 아래로 쓱 하고 미끄러졌다. 순간 지현은 미국에 살다 온 전 남자친구가 함께 티브이를 보다 이야기해준 ‘아보카도 핸드’ 생각이 났다.


- 요즘 미국엔 ‘아보카도 핸드’라는 말이 유행이래.
- 그게 뭐야? 아보카도 같이 생긴 손이야?
- 저게 겉껍질에 비해서 속이 엄청 연하거든. 그런데 아보카도를 손에 들고 썰다가 힘 조절을 못해서 손까지 같이 베어버리는 거지. 그걸 ‘아보카도 핸드’라고 한대.
- 헐… 소름 돋는다. 그냥 도마에 올려놓고 썰면 안 되나?


당시엔 생소했던 과일인 아보카도가 별 것 아닌 것처럼 말하는 남자친구에게 지현은 약간의 자격지심을 느꼈었다. 썰스데이 파티, 혹은 떨스데이 파티에서 만난 남자친구는 한국에서 자리잡을 것처럼 이야기하더니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나중에 그의 미국행은 이미 예정되어 있던 것임을 알았는데, 이상하게 별로 화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었다.


지현은 손바닥의 살집 부분에 반쯤 들어가 있는 식칼과, 손가락 끝으로 아직도 위태롭게 잡고 있는 아보카도를 내려보았다. 손목을 타고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지현은 그 상태로 한참을 서 있었다. 지현은 여전히 아보카도의 ‘보’가 b로 시작하는지, v로 시작하는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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