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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놂작가 Oct 28. 2022

재미로 면접 좀 보면 안되나요?

비호감 연예인의 삶 체험기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에서 지금까지 14년째 근무 중이다.

변덕이 심한 성향 치고는 꽤 오랜 기간, 그것도 작년 말 4개월의 병가 휴직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길게 쉰 적 없이 한 직장에 다닐 수 있었던 이유는 나의 게으름 탓이 크다.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보러 다니고 연봉 협상이니 기간 조율 따위의 작업을 해야 한다니 상상만 해도 지치고 귀찮았다.

게다가 인생의 목표가 거창한 커리어나 직업적인 성취에 있지 않으니 회사란 그저 나에게 안정적인 일터와 월급을 보장해 주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러다가 작년 연말, 신변에 크게 위협을 받는 일을 겪으며 이직 시장에 첫 발을 디디게 되었다.

도저히 안전하게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환경에 변화를 주어야 했다.

미국에 사는 친한 친구의 조언으로 이민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이 땅을 떠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차선책으로 이직과 이사를 동시에 준비하면서 난생 처음으로 경력직 이력서라는 것을 써 보았고 여차하면 외국으로 피할 수 있게끔 외국계 기업에 관심이 있다는 정보를 헤드헌터에게 전달했다.


A사와 P사에서 연락이 온 것은 지난 4월이었다.

당시 나는 위협에서 벗어나 겨우 안정된 생활을 되찾고 적응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이직할 이유를 이미 상실한 상태였다.

외국계 기업의 특성상 서류 심사가 오래 걸려서 이제야 면접 제안을 받게 된 것이다.

그냥 거절을 하려는데 문득 이번 기회가 아니면 언제 '경력직 이직 면접' 이라는 이벤트를 경험해볼까 싶은 아쉬움과 호기심이 들었다.

경험하고 하는 후회가 해보지도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낫다는 게 내 지론이다.

순전히 재미로 우선 P사의 면접에 참여했고 결과는 합격이었다.


곤란했다.

사실 이동할 생각이 없었는데 면접을 본 것은 상대 회사에 실례가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만약 합격한다면 처우 등을 들어 보고 맘이 바뀔 가능성이 작게나마 있다고 생각하고 면접에 임했기 때문에 이게 큰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곤란한 이유는 면접을 본 바로 다음 날 우리 회사에 내가 이직을 시도하고 있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말 많은 회사다.

뒷담화와 헛소문이 심한 조직문화를 십수 년간 겪어 왔기 때문에 면접을 보기 전부터 헤드헌터를 통해 레퍼런스 체크는 정식으로 당사자인 나에게 통지한 뒤 공식적인 루트로 진행해 달라고 여러 차례 부탁했던 터다.

그런데 면접을 보자 마자 소문이 난 걸 보니 동업계인 P사에서 우리 회사에 다니는 지인을 통해 나에 대해 비공식적으로 문의를 한 모양이다.

팀장님은 나를 불러 이직하는 것이 사실인지 묻고 기분이 상했다고 표현하셨다.

전후설명을 드리고 나서야 오해는 풀렸지만 애초에 갈 생각도 없던 회사의 프로답지 않은 대처 때문에 내가 죄인이 된 상황이 썩 기분 좋지는 않았다.


헤드헌터에게 전화를 걸어 컴플레인을 했다.

P사의 비즈니스 매너가 바람직하지 못했음을 알리고 나와 맞지 않는 조직 분위기인 것 같으니 앞으로도 P사의 포지션에는 지원하지 않겠다고 못박았다.

회사에 희한하게 소문이 돈 바람에 정작 정말 가고 싶었던 A사의 면접은 포기해야 했다.

조건이 상당히 좋은 편인 프랑스 본사 채용 포지션이었고 본사 임원과의 컨콜 면접을 앞두고 있었는데 눈물을 머금고 면접 불참 의사를 메일로 밝혔다.

복직한 지 1년도 되지 않았고 여러 가지 일들로 심신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여서 이런 작은 루머에도 마음이 요동쳐 도저히 이직을 시도할 수 없었다.


가끔 나는 우리 회사에서 비호감 연예인으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만히 있어도 미운데 심지어 가만히 있지도 않으니 더 미운 비호감 연예인.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괜히 꼴보기 싫고 잘 되는 게 배아픈, 망했으면 좋겠는 비호감 연예인.

고루하고 보수적인 관료제 꼰대 조직에서 입사 때부터 지금까지 홀로 튀는 돌연변이가 심지어 무슨 욕을 먹어도 타격이 없어 보이니 심사가 뒤틀리고 배알이 꼬일만 하지.


우스운 얘기지만 난 그래서 평생 단 한 번도 연예인에게 악플을 달거나 조금이라도 부정적 코멘트를 남겨본 적이 없다.

모두에게 욕을 먹는 비호감 연예인일수록 동질감을 느껴 마음이 아팠기 때문이랄까.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네들의 삶이 나보다 백 배는 낫다.

걔들은 욕 먹으면서 돈이라도 벌지, 나는 뭐 하나 얻는 것 없이 욕만 먹은지 14년째다.

물론 팬이 있어야 까도 있다고 나 역시 이래 저래 은근히 나를 응원하고 지탱해 주는 팬들이 있긴 하지만 이제는 정말 팬도 까도 없이 조용하고 평온한 삶을 살고 싶다.

나는 언제쯤 이 작고 험난한 연예계에서 은퇴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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