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운 센 을지로입구 식탐러의 워크&푸드 로그
스트레스를 받는 이들은 소위 '달다구리' 라 칭하는 스위츠들에 자연스레 손을 뻗곤 한다.
달콤한 사탕이라든지 캬라멜, 초콜릿과 각종 젤리류들이 주로 인기인데, 간식 매니아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나는 어쩐 일인지 이러한 종류의 주전부리는 별로 즐기지 않는다. 원체 캬라멜과 젤리의 츄이한 식감을 좋아하지 않는 탓도 있겠고, 사탕이나 초콜릿 같은 작은 크기의 음식은 쓸데 없이 칼로리가 높아 왠지 요 조그만 걸 먹고 살이 이렇게나 찐다고? 하는 억울함이 있어서이기도 하다. 같은 이유로 커피나 음료를 선택할 때도 단맛이 나는 종류는 선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자발적으로 단 것을 찾게 되는 순간이 분명 있다.
자의식 강하고 자존감 높은 나라는 인간의 의지로도 이길 수 없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 오랜 시간 참고 견뎌온 비난들을 더 이상 담아내기엔 마음의 곳간이 부족할 때, 이런 기분과 마음을 술로는 달래고 싶지 않을 때.
나는 그럴 때 명동성당 근처에 자리한 초콜릿 음료 가게로 향한다.
이곳을 처음 찾았던 건 2011년 겨울, 누구나 겪는다던 직장생활 3년차의 딜레마를 누구보다 혹독하게 겪고 있을 즈음이었다. 요즘 이런 워딩을 사용하면 큰일이라지만 인간 관계에서 갑을 관계를 굳이 따지자면 나는 한 번도 을이었던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 을이었던 적이 없었던 정도가 아니라 슈퍼 갑이었다. 집에서는 싸가지 없고 게으르지만 부모님 체면을 세워드릴 조건은 시기에 맞춰 정확히 만족시켜 주기 때문에 딱히 불평할 수 없는 어렵고 센 장녀, 학교에서는 책상에 대놓고 엎어져 자거나 하루 종일 쉴새없이 떠들어대는 등 면학 분위기를 망치지만 친구 많고 성적 좋아 얄미운 모범생, 연애 관계에서는 매번 남자를 울리면 울렸지 마음 고생 같은 건 한 적 없는 그야말로 슈퍼 갑의 인생을 살아 왔었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을이 된 것은 첫 직장에서의 첫 직무를 영업으로 배정받으면서였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늘 사과해야 하는 것은 나였다. 내가 제대로 넣은 오더가 현장에서 잘못 처리되어 사과하는 것은 일상다반사, 주말 저녁에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고객의 전화 한 통에 부랴부랴 이미 영업 종료한 회사로 돌아가 일처리를 하면서도 늦어서 죄송합니다, 해외에서 여름 휴가를 즐기다 시차 때문에 전화를 못 받아도 전화를 놓쳐 죄송합니다, 우리 회사가 대금을 수취할 때 부가세와 봉사료를 받는데 나라에서 정한 세율도 내가 잘못한 것이었고 하다 하다 고객이 우리 회사 앞을 지나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내가 죄송한 것이 나의 업이었다. (거짓말 같다고? 진짜다. 우리 회사 앞을 지나던 어느 고객이 우리 회사와 관계 없는 시위대와 마주쳐 길에서 넘어졌고 나는 사과했다.)
정말 못해 먹겠다는 생각이 들던 2011년 겨울, 역시나 사과로 점철된 하루를 보내고 늦은 시간에 퇴근한 나는 무작정 명동으로 돌진했다. 진탕 술을 퍼 마실까도 고민했지만 막상 술잔을 들 기력조차 없어 힘없이 바닥을 보며 걷던 내가 레오니다스 초콜릿 가게 앞에 다다른 것은 명동성당 어딘가에서 그런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던 성모 마리아의 배려였을까? 뜨거운 오리지널 핫초콜릿을 큰 머그 가득 담아 쥐고 가게 지하 구석 자리에 앉아 나는 스스로를 위안하는 달콤한 시간을 즐겼던 것 같다. 왠지 눈물이 날 것도 같았다. 그 부드럽고 달달한 초콜릿을 목구멍으로 꿀꺽 넘기며 나도 모르게 쏟아져 나오던 울음도 같이 삼킬 수 있어 다행이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한 모금, 두 모금, 오래도록 천천히. 나를 괴롭히던 것들을 하나 둘씩 핫초콜릿에 녹여 길티 플레져를 제대로 즐겼던 것이 레오니다스와의 첫 만남이었다.
스물 일곱 어리던 나를 위로해준 레오니다스가 십여 년이 흐른 지금 또다시 그리워진다.
더 이상 영업쪽 업무를 하거나 매일 사과하는 일상을 살아 내고 있지는 않지만, 원래 회사원이라는 직업은 늘 서럽고 억울하고 속상한 법 아닌가. 추운 날씨에 코로나 규제로 마음 놓고 한 잔 함께 기울일 만한 사람도 장소도 아쉬운 지금, 평생 숙명처럼 달고 다니는 다이어트에 대한 생각은 잠시 잊고 레오니다스에서 큰 컵 가득 달콤한 핫초콜릿을 홀짝이며 넌 잘하고 있다고, 네가 틀린 게 아니라고, 남들이 너를 잘 모르고 쉽게 해대는 헛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 없다고, 그러니 멋지고 당당하게 지금처럼 나아가라고 끊임 없이 달콤한 셀프 칭찬과 위로를 해 주도록 하자. 그래서 내일 또 한 걸음, 내가 더 행복해지는 방향으로 걸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