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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놂작가 Dec 02. 2019

힙지로 노가리로 치료하는 힙병

기운 센 을지로입구 식탐러의 워크&푸드 로그

  바야흐로'힙'이 점령한 시대다.

웬만큼 잘 나가는 가게라면 죄다 이름 앞에 '힙'이 붙으니 말 다했다. 가로수길 힙한 맛집, 한남동 힙한 칵테일바, 보광동 힙한 대패삼겹살집 등 맛집에 이어 힙한 음악, 힙한 패션, 힙한 거리, 힙한 사람까지 이 시대는 온통 힙한 것들 투성이다. 힙하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다.


  내가 밥벌이 중인 곳은 그 중에서도 힙의 성지로 떠오른 을지로, 소위 힙지로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다.

인쇄소와 조명 가게가 즐비해 잿빛으로 죽었던 뒷골목이 루프탑 와인바나 수제 맥주 브루어리 등이 들어서고 잘 나가는 젊은이들이 성지 순례라도 하는 양 찾아 오면서 활기를 띄기 시작했고, 이제는 낮에도 인근 직장인들이 힙한 런치와 밥보다 비싼 커피를 즐기기 위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사실 을지로는 예로부터 노가리나 소세지를 구워 맥주와 함께 저렴하게 판매하는 노포로 유명한 곳이었다.

업무로 지친 주머니 가벼운 아재들이 피로에 쪄든 몸을 이끌고 삼삼오오 모여 술 한 잔을 즐기기에 적당한, 한 마리에 천 원짜리 노가리며 한 잔에 삼천 원짜리 맥주 따위를 파는 전통의 노가리 골목이었던 것. 이 허름하고 저렴한 풍경이 최근의 레트로 트렌드와 절묘하게 맞물려 힙지로라는 성지로 재탄생하게 된 것은 불과 얼마 전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설리가 최자와 길거리 데이트를 즐기다 파파라치에 사진이 찍힌 곳 역시 바로 이 을지로 노가리 골목의 만선포차로, 저녁이 되면 만선포차 주변의 골목마다 플라스틱 의자와 테이블이 쫘악 깔리고 힙지로 바이브를 즐기러 온 잘 차려 입은 젊은이들로 가득해 진다.




  대부분의 회사 사장님들은 소위 힙병을 앓고 계신다.

힙병의 증상은 다음과 같다. 트렌드에 매우 민감하며 SNS를 즐겨 보고 카톡으로 캐쥬얼한 커뮤니케이션을 추구한다. 뭐든 새로운 것이 있다면 도전을 꿈꾸고 각종 강연과 서적을 통한 마켓 트렌드와 정보 입수에 열심이다. 너무 좋지. 연세가 있으신 분들이 젊고 유연한 사고를 하고 힙하게 사신다는 데 좋은 일이고 독려해 드리고 심지어 존경하고 본받아야 할 일이지. 문제는 이 모든 게 사장님의 사생활 영역을 넘어 업무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데 있다.


  여하튼 사장님이 뭐 새로운 신문 기사를 읽으셨거나 괜찮은 강연만 들었다 하면 그 때부터 나와 같은 마케팅 담당자들에게는 지옥이 펼쳐진다. 수시로 떨어지는 카톡 업무 지시는 둘째 치고 그래서 도대체 사장님이 원하는 게 뭔지 점쟁이에 빙의해 알아맞춰 보세요다. 맥락 없이 전달에 전달된 신문 기사 하나를 읽고 실무자가 알아서 우리 업에 적용할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내 보고해야 한다. 열에 아홉 정도는 아예 현업에 응용조차 하기 어려운 내용이라는 현실은 설명하기도 입 아프다. 그러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트렌드 최전선에 서 있어야 할 마케터인 내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가 '트렌드', '디지털', '밀레니얼세대' 가 되어 버렸으니 이걸 누구 탓을 해야 할까.




  젊은이들로 가득한 힙지로 노포에 앉아 술 한 잔을 즐기다 보면 '아, 나 정도면 아직 굉장히 힙하다'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 당신은 그저 평범한 아재거나 심하게는 자각 없는 꼰대일 뿐이다. 을지로에 서 있는 모든 건물이 외관이 비슷하다고 해서 전부 루프탑바가 아니고 어떤 것은 그냥 인쇄소, 어떤 것은 또 그냥 폐건물일 뿐이듯이 말이다. 그야말로 슬픈 착각이 아닐 수 없다. 지금 힙지로 노가리 골목에 앉아 있다면 가만히 주변을 둘러 보자. 옆 테이블과 앞 테이블이 모두 세상 힙한 힙스터들로 가득차 있어 자칫 나도 One of them 이라고 여기고 뿌듯해 했다간 먼 훗날 반드시 찾아올 깨달음의 순간에 이불킥 대여섯 번으로는 부족할 흑역사를 만들게 될 것이다.


  그들이 앉은 힙지로의 만선호프와 내가 앉은 을지로3가 노가리 골목의 노포는 같은 시간 같은 장소지만 완전히 다른 평행 세계다. 처음 인정하기가 힘들고 자존심 상해 그렇지 한 번 스스로의 위치를 자각하고 난 현자에게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마음의 평화와 안정이 찾아온다. 왜 애써 아둥바둥 뱁새가 황새 쫓아가는 모양으로 힙하지 못해 안달들인가. 회사 업무와 스트레스에 쪄든 노땅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시원한 맥주 한 모금에 입가심하는 이쪽 세계의 삶을 충분히 즐기면 될 것을, 왜 굳이 어차피 끼어 들지도 못할 저쪽 세계를 기웃대며 나 정도면 힙하다고 슬픈 자위를 일삼느냔 말이다.


  문득 사장님을 모셔다 만선호프에 앉혀 놓고 노가리를 씹으며 점잖게 말씀 드리고 싶다.

사장님은 아무리 애써도 힙해질 수 없으니 이제 그만 포기하시고 위엄 있고 멋진 경영자로 남아 달라고.

그래도 자꾸만 영감이 주체할 수 없이 떠오르면 차라리 시를 쓰시라고.

적다 보니 이 자리에 불러야 할 힙병 환자들이 너무 많이 생각나는데, 다같이 모아 놓고 힙지로 노포에서 노가리에 맥주 정모라도 하면서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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