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놂작가 Apr 16. 2019

을지로입구역 조식 뷔페

기운 센 을지로입구 식탐러의 워크&푸드 로그

  2호선 을지로입구역에 내리면 개찰구를 통과하는 순간 갓 구운 고소한 빵 냄새가 제일 먼저 코끝을 강타한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노숙자들이 사방에 널려 있던 곳이었는데 시에서 관리를 한 것인지 역 중앙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던 그들은 온데 간데 없고 콤콤한 냄새 대신 식욕을 자극하는 빵 냄새가 출근길 직장인들을 반긴다.


  나는 현대인의 보편적 생활 습관과는 달리 무조건 아침을 먹어야 하는 삼식이파다.

학창 시절에도 지각을 할지언정 아침은 챙겨 먹고 다녔고 세 번의 끼니 중 특히 아침을 가장 든든하고 만족스럽게 차려 먹는 편이었을 정도로 아침 식사는 나에게 굉장히 중요한 한 끼다. 취직을 하고 나서도 엄마가 지난 밤 차려 놓은 반찬들을 가지고 한 상 금방 차려 먹고 출근하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었다.

 

  결혼하고 난 뒤에는 사정이 조금 달라졌다.

우선 엄마가 차려놓은 반찬이라는 사치는 누릴 수 없었고, 아침은 커녕 하루에 한 끼만 먹는 간헐적 단식파인 남편의 생활 습관 역시 존중해야 했기에 아침으로 집밥은 무리였다. 고민하던 찰나 을지로입구역의 빵 냄새를 맡게 된 것은 어쩌면 운명이었을까.


  알고 보니 을지로입구역은 조식 뷔페나 다름 없었다.

제일 먼저 마주치는 가게는 '마노핀'. 이름답게 두어 가지 종류의 머핀과 커피를 파는 곳이다. 개찰구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어 때로는 출구로 나오려는 사람들이 마노핀의 대기열 때문에 돌아가야 할 정도로 인기가 좋지만 어쩐지 나는 이 곳의 메뉴가 그닥 당기지 않는다. 선택 가능한 옵션이 오로지 단맛의 베이커리류 뿐이어서 그런 것일 확률이 높다. 한국인이라면 역시 단짠단짠이 진리 아닌가.


  큰 유혹 없이 마노핀을 쿨하게 지나치면 옆은 '브레드앤코', 나의 페이보릿 조식 코너다.

수십 가지의 빵들이 종류별로 진열되어 있어 그 날의 기분에 따라 메뉴를 선택할 수 있다. 아침부터 푸짐한 '음식' 느낌이 당길 때는 피자빵이나 소세지빵, 마늘 바게뜨, 햄치즈가 든 잉글리쉬 머핀 등을 고르고, 오늘은 약간 뉴요커 느낌이다 싶을 때는 블루베리 베이글과 크림치즈를 선택한다. 배가 딱히 고프지는 않지만 입이 심심해 뭔가를 먹고 싶을 때는 사라다빵이나 머핀도 구입할 수 있다.


  성경은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했다.

한국인은 밥심, 아침 댓바람부터 밥이 그리운 날이 분명히 있는데 을지로입구역 조식 뷔페는 이런 날에도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밥이 먹고 싶은 날에는 큰 유혹 없이 빵집들을 지나칠 수 있고 역 중앙에 위치한 롭스를 지나 또 한참을 걸어 을지로3가역 쪽으로 향하는 지하통로를 걷다 보면 분식 코너가 등장한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이모님들이 뚝딱 끓여 주시는 떡라면이라도 한 그릇 할테지만 직장인의 출근길이란 그리 사치스러운 식사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럴 때 나의 선택은 당연히 김밥이다.


  여러 종류의 김밥집들이 즐비해 있지만 내가 즐겨 찾는 곳은 독일 분식.

독일 분식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내부에서는 4~5개 남짓의 테이블을 운영하며 착석 손님을 받고 통로 쪽으로 난 가게의 작은 창문을 통해서는 숙련된 이모님들의 협업 시스템으로 마치 공장처럼 김밥을 찍어 내어 포장 판매하는 을지로입구역 분식계의 터줏대감 되시겠다. 다양한 종류의 김밥이 제공되며 특히 위가 작은 여성들을 위한 반줄짜리 김밥도 판매하지만 나? 나는 그 반편이 김밥 따위 한 번도 생각조차 한 적 없다. (뿌듯) 


  내 선택은 항상 매운멸치김밥, 일명 매멸김밥이다.

심심하게 간이 된 고슬고슬한 밥에 햄, 단무지, 계란 지단, 오이, 소량의 당근이 들어 있고 잔멸치를 매운 양념과 조청으로 볶아 낸 매운멸치볶음이 깻잎에 싸여 아낌 없이 들어 있는 이 김밥은 한 줄만 먹기에는 너무도 아쉬운 별미다. 분식집 옆 세븐일레븐에서 커피우유나 초코우유를 사서 함께 먹으면 매운맛과 단맛의 마리아쥬가 고급 프랑스 식당 못지 않다(고 하면 과장일까). 하지만 역에 내려서 독일분식까지 걸어가는 데 꽤나 시간이 소모되며 심지어 주문과 동시에 제작에 들어가는 주문 제작 시스템이기 때문에 아침 시간이 웬만큼 여유 있지 않으면 매멸김밥의 사치를 누릴 수는 없다는 것이 큰 단점이자 아쉬움이다.


  시간이 부족한데 밥을 먹고 싶을 때는 역시 편의점으로 절충하는 수 밖에 없다.

아직 일본의 편의점을 따라 가려면 갈 길이 멀지만 우리 나라 편의점들도 구비 식품의 종류와 질적인 면에서 성장 속도가 꽤 빠른 편이다. 그 중 삼각김밥의 발전은 특히 인정하는 바인데, 편의점마다 각기 다른 다양한 종류의 시그니처 삼각김밥들을 내놓고 있어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 을지로입구역 개찰구에서 가장 가까운 편의점은 GS25라서 나는 주로 이 곳으로 향한다. 다양한 종류의 삼각김밥이 있지만 거의 항상 내가 선택하는 것은 전주비빔 아니면 고추참치맛으로 사무실에 있는 전자렌지에 20초 돌려 먹으면 정말 꿀맛이다.


  누구에게나 출근길은 고달프다.

아침에 일어나 "아싸 오늘도 신나는 출근이다! 회사 가는 길 너무 너무 좋아!" 라고 외칠 싸이코는 사주 아들이거나 로또 당첨자 외에는 없을 거라고 본다. 지옥같은 출근길을 그나마 조금쯤 기대하게 만드는 건 역시 매일같이 펼쳐지는 을지로입구역 조식 뷔페가 아닐까. 영혼 없이 지하철에 몸을 맡기고 실려 오다가 을지로3가쯤부터 오늘의 아침 메뉴를 고민하고 개찰구를 통과하면서 마음을 결정해 가장 좋아하는 조식 코너로 향하는 순간 만큼은 회사가 아닌 조식뷔페로 가는 기분이니까. 내일도 여느 때와 다름 없이 나의 출근길은 고달플 테지만 을지로입구역 조식 뷔페가 제공하는 다양한 메뉴를 생각하며 또 잠깐을 살아갈 힘을 내 보기로 한다.




이전 07화 힙지로 노가리로 치료하는 힙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