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운 센 을지로입구 식탐러의 워크&푸드 로그
뉴요커 놀이는 내가 회사에서 즐기는 가장 좋아하는 놀이 중 하나다.
점심 시간에 외투를 챙겨 입고 혼자 나가서 아무 말 없이 걷는다. 목적지는 주로 청계천 변이나 광화문, 종각 일대의 한산한 카페 혹은 조선호텔 라운지. 걸을 때는 여유 있는 걸음으로 센트럴 파크를 산책한다는 기분을 장착하고 공기의 흐름과 햇살의 따스함을 느끼며 걷는 것이 포인트다. 단 절대로 핸드폰을 보거나 너무 두리번대거나 중간에 어딘가에 들르지 말고 목적지까지 곧장 가야 한다.
직장 생활 어느덧 11년차, 고민거리가 생겼을 때 마음 편히 터놓을 동료를 찾기보다는 속으로 감정을 삼키고 혼자서 다스리는 편이 더 쉬운 연차가 되었다. 남자들처럼 우르르 몰려가 담배를 태우면서 이런저런 고급 정보도 주고 받고 남 흉도 보고 신세한탄도 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또래들은 모두 산휴에 들어갔거나 퇴사한 삼십대 중반의 여성 직장인인 나로서는 남자들의 애연 집단에 비집고 들어가 낄 도리도 없고 마음 속에 잔뜩 쌓이는 스트레스를 마땅히 토해낼 다른 방법을 찾기도 막막하니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조선호텔 로비 라운지를 찾았다.
겨울 치고는 포근한 낮 열두시, 사무실을 조용히 빠져 나와 환구단 주변으로 잘 조성해 둔 산책로를 따라 조선호텔로 향한다. 친절한 호텔 보이들이 웃으며 열어주는 문을 통과하면 왼편에 통유리 가득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로비 라운지가 보인다.
모두 점심을 먹으러 간 시간인 덕에 운좋게 창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혼자 와서 커피와 케익을 먹는 일본인 관광객 한 명, 비즈니스 미팅인듯 보이는 정장 차림의 남자 넷 테이블 하나, 그리고 간단한 요기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또다른 직장인 남자 둘의 테이블 하나를 제외하곤 나 뿐이다.
두툼하고 질 좋은 가죽으로 감싸인 메뉴판을 좋아하는 소설인양 흥미롭게 읽은 뒤 나의 올타임페이보릿인 얼그레이티를 주문한다.
뉴요커 놀이를 할 때는 따로 식사를 하지 않는다.
왠지 뉴요커와 배부름이라는 단어는 멀게만 느껴진달까. 내게 뉴요커의 시각적 이미지는 신경질적일 정도로 마른 몸에 무표정하고 차갑지만 잘 정돈된 얼굴, 흐트러짐 없는 고급 브랜드 옷차림의 커리어 우먼이다. 그 어떤 것에도 상처받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마음을 가진, 그래서 늘 여유롭고 강한 커리어 우먼. 어쩌면 내가 뉴요커 놀이를 하고 싶은 날이란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은 날일지도 모르겠다.
조선호텔 라운지의 얼그레이티는 조금은 낡았지만 고급진 다기 세트에 작은 쿠키 두 개가 곁들여져 서브된다. 점심 시간은 열두시부터 한시까지, 정확히 한 시간. 천천히 겨울 햇살을 음미하며 걸어온 십오분과 서둘러 돌아갈 십분을 제하면 약 삼십분 남짓이 내게 주어진 여유 시간이다. 천천히 차 향을 즐기기엔 터무니 없이 짧지만 그래도 여유를 잃지 않는 것이 포인트다.
호텔 라운지라는 공간의 특성 때문인지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사람들의 대화 볼륨이 크지 않다. 다들 조곤조곤 매너 있게 절제된 음량으로, 주위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의 몸짓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창 밖으로 보이는 한낮의 환구단과 초록 풍경이 기분 좋은 대화 소음과 어우러져 나는 잠시간 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것들을 잊고 작위적인 평화 속에 의식을 맡긴다. 어떤 날은 성경이나 책을 펼쳐 읽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하릴 없이 웹 서핑을, 그리고 보통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멍때리기를 하며 짧은 휴식을 만끽하곤 한다.
뉴요커 놀이는 여기에서 끝이다.
회사로 복귀하는 길은 더이상 뉴요커가 아니라 서울의 삼십 대 여성 직장인 이 모씨로 돌아와 오후의 일정 따위를 머릿 속에서 계산하며 재미없이 발걸음을 재촉하는 여정이다. 한 시간 전의 들뜬 기분은 온데간데 없고 나는 다시 우울한 기분으로 터덜터덜 일터로 돌아간다.
그럼에도 뉴요커 놀이는 내게 아주 의미있는 쉼표임에 틀림 없다.
마음이 힘들 수록 뉴요커 놀이의 빈도도 잦아지고 내 마음 속 뉴욕에서의 한 시간이 주는 여유와 평화가 더 빨리 사라지긴 하지만, 그래도 가끔의 이 놀이가 나를 여즉 숨쉬게 하고 버티게 한다.
재미난 것은 나는 실제로는 단 한 번도 뉴욕에 가본 일이 없다는 사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상관이겠는가? 나에게 뉴욕은 미 동부에 실존하는 멋진 대도시가 아니라 점심 시간에 마음만 먹으면 찾아갈 수 있는 조선호텔 라운지인 것을.
아마도 나는 평생 진짜 뉴욕에는 가지 않을 것 같다.
그동안 내게 위로이자 평안이었던 '여기의 뉴욕' 에 대한 환상을 깨고 싶지 않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