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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놂작가 Nov 25. 2019

팀장님의 귤 한 박스

기운 센 을지로입구 식탐러의 워크&푸드 로그

  어느 무료하고 피곤한 수요일 오후, 사무실로 커다란 박스 하나가 배달되어 왔다.

팀원들이 모여 두근대며 오픈한 박스 안에는 영롱한 주황빛을 내뿜는 반질반질한 제주 감귤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가물어 쩍쩍 갈라진 논바닥마냥 퍼석했던 우리의 회사 생활에 내린 설탕물 탄 단비와도 같이 달콤한 귤이었다.


  사실 겨울에는 딱히 다른 간식이 필요가 없다.

잘 익은 노란 귤 한 박스면 간식 걱정 없이 겨울 나기 딱 좋다. 뜨끈하게 데워진 아랫목에 퍼질러 앉거나 엎드려 TV를 보면서 무아지경으로 귤을 까먹다 보면 금세 손바닥 발바닥이 노오래지기 일쑤다. 귤을 까먹으며 책을 읽다가 새하얀 책장이 노래지기 역시 일상다반사.


  귤을 까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항상 귤의 꼭지 부분이 아래로 오게끔 두 손으로 잡고는 엄지에 힘을 주어 반으로 갈라서 까먹는다. 꽃잎처럼 펼쳐서 껍질을 까기엔 마음이 급해서 일단 반으로 가르고 보는 것은 아마도 내 급한 성격 탓이리라. 톡 하고 터지는 상큼한 과즙에 우선 기분이 좋고, 반 가른 뒤 급히 벗겨낸 귤 알맹이를 한 입에 넣어 우물거리면 입안에서 폭죽처럼 터지는 과육의 향연이 아찔하다.


  젊은이들 사이에 햄최몇 이라는 말이 유행한다던데 누군가 내게 귤최몇이냐고 물어본다면 난 당당히 40 정도는 부를 수 있다. 귤은 보통 작을수록 맛있는 법이라 시장에 가면 나는 주로 작은 조생귤을 고르곤 하는데, 그 정도는 사실 통째로 까서 한 입에 넣어도 부담 없는 크기라 몇 번 손이 왔다 갔다 하고 나면 40개 쯤이야 순식간이다. 어느 순간부터 겨울 하면 두 번째로 생각나는 먹거리는 이 조그맣고 달달한 귤이 되었다. (제일 처음 생각 나는 건 호빵이다.)




  사무실로 배달된 귤은 전임 팀장님의 선물이었다.

왜 '전임' 팀장님이냐 하면, 우리 팀 팀장직을 맡고 계시다가 여름이 시작되기도 전에 갑작스레 다른 팀으로 발령이 나셨기 때문이다. 발령 소식을 듣던 날 우리는 모처럼 팀장님을 모시고 팀 점심을 즐기고 있다가 갑작스런 봉변을 당했는데, 그 때의 심정을 말로 표현하라면 엄마가 오랜만에 놀이 공원에 데려가 준다며 손잡고 롯데월드에 가서 후룸라이드 앞에 날 버리고 떠난 기분 혹은 돈까스 사준다고 꼬셔서 날 유인한 뒤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고래를 잡는 수술대에 홀로 뉘여 놓은 기분이랄까. 


  천애 고아의 심정을 감히 헤아릴 길 없겠으나 그 갑작스런 발령 이후 남은 팀원들 모두 애비 없는 자식으로 눈칫밥을 먹으며 살아 왔음을 생각하면 아 고아란 이런 기분이겠구나 이해도 되는 것이었다. 무슨 일을 해도 힘이 나지 않았고 특히나 다른 부서와 미팅이라도 할 일이 생기면 시작부터 잔뜩 주눅이 들어 하고픈 말도 채 다 못하고 돌아오기가 일쑤였다. 전화 목소리는 날이 갈수록 작아지고 행사를 잘 치뤄 내고도 끊임 없이 불안해 하는 등 우리 모두는 이 갑작스런 부재에 적응하기까지 오래도록 힘든 시간을 겪어야 했다.


  사실 팀장님이 우리 팀장님일 때는 그렇게 매일 좋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생각도 나지 않는 사소한 이유들로 서운하고 밉고 원망스럽기도 했던 적이 다반사였는데 당시에는 팀장님이 영원히 우리 팀장일 줄만 알았지. 그래서 모여서 팀장님 흉도 보고 팀장님이 서운하게 하면 울컥해서 대들기도 하고 아주 맘 편히 투정과 강짜를 부리며 지냈었다. 그러다 이렇게 남의 팀장이 되고 나서야 아 팀장 있을 때가 좋았구나 싶은 게, 이런 류의 깨달음은 비단 남녀 관계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 관계를 통틀어 항상 뒤늦게 오는 것이 진리인가 보다.


  한참을 애비 없이 살던 우리가 수요일 오후 도착한 팀장님의 귤 한 박스에 모두 환호하고 울컥 감동하기까지 했던 까닭 역시 같은 이유에서였겠지. 귤을 핑계로 오래간만에 팀원들이 옹기종기 회의실에 모여 앉아 각자의 방식으로 귤을 까 먹으며 팀장님에 관해 얘기하고 아직 우릴 잊지 않으셨다며 켜켜이 묵혀둔 추억들을 하나씩 꺼내던 그 시간이 그간의 서러움을 달래 주는 치유의 시간이었던 이유 역시.


  귤과의 과일은 한라봉, 천혜향, 레드향부터 조금 더 가지를 치자면 오렌지, 낑깡, 레몬 등까지 변주가 가능하지만 역시 흔히 마주칠 수 있고 가장 만만한 그 귤, 검은 비닐 봉다리에 가득 담아도 만 원이 넘지 않는 그 흔한 귤이 제일 질리지 않고 오래도록 맛있는 이유도 어쩌면 늘 그 자리에 있어 주는 주변 사람의 당연함을 소중히 하라는 귤의 계시가 아닐까. 


  그래서, 우리 새 팀장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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