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놂작가 Jan 15. 2019

포스트 모더니즘 도시락 파티

기운 센 을지로입구 식탐러의 워크&푸드 로그

 내 기억 속 마지막 도시락은 수능 보던 날 엄마가 싸주신 3단 보온 도시락이었다. 얕은 두 개의 반찬통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양념두부조림과 비엔나소세지 케챱 볶음, 엄마표 특제 김무침이, 그리고 제일 아래의 깊은 밥통에는 갓 지은 따스한 흰 쌀밥이 꾹꾹 눌러 담겨져 있었고 별도의 국통에 참치김치찌개를 가득 담아 근사한 한 끼를 준비해 수능 시험장으로 향했던 기억이 난다.


 그 해 수능 시험이 어려웠는지 어땠는지, 누구와 함께 고사장에 들어섰는지 등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점심에 최고로 좋아하는 메뉴로 든든히 배를 채울 생각에 오전 내내 기분 좋은 기대감으로 문제를 잘 풀고, 고대하던 점심 시간이 되자마자 소중한 도시락을 두근대며 오픈했던 행복한 기억은 지금까지도 매우 또렷하다.


 사실 말이 쉽지 매일 도시락을 싸는 것은 상당히 귀찮은 일이라서 사회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도시락 점심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지만 도시락 점심에 대한 향수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아침에 그 날의 메뉴를 미리 정해서 원하는 양만큼 예쁜 도시락 통에 골라 담는 재미라든지 도시락 멤버끼리 한 공간에 모여 앉아 서로의 홈메이드 반찬을 오픈하고 나눠 먹는 재미가 사먹는 밥이나 식판에 배식받는 급식과는 전혀 다른 즐거움을 주기 때문.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떠올린 것이 바로 신개념 백화점 도시락 점심이다. 도시락 점심을 너무 하고 싶어서 팀원들과 함께 예쁜 어벤저스 캐릭터 도시락 통도 구매해 보고 - 나는 캡틴이니까 캡틴 아메리카 - 매주 월요일엔 도시락을 싸오자고 도원결의 버금가는 굳은 맹세도 해 보았지만 아침잠 5분이 아쉬운 직장인에게 도시락은 사치고 무리였다. 그러나 도시락을 싸는 게 무리라면 사면 그만. 어차피 ①각자 맛있는 걸 준비해 와서 ②모여 앉아 먹는다, 이 두 가지가 도시락 점심의 핵심 아니던가.


 우리 회사는 돈도 많이 안 주고(모든 부서에 적용됨) 일은 정말 많이 시키고(우리 부서에 한함) 딱히 장점이랄 것은 길고 긴 육아 휴직(출산 여성에 한함) 뿐이지만 그래도 내가 우리 회사에 가장 만족하는 점은 바로 사무실 빌딩이 백화점과 연결되어 있다는 부분이다. 특히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바로 백화점 식품관으로 통하니 점심 도시락을 구입하기에 최적의 입지가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탄생한 현대 직장인 맞춤형 포스트 모더니즘 도시락 파티.


 여섯 명의 팀원들이 각자 백화점 지하로 출동하여 미리 생각해 둔 코너에 가서 먹고 싶은 메뉴를 골라 작은 회의실로 모인다. 메뉴는 주로 구운몽 만두, 중식 패스트푸드 판다 익스프레스, 여섯시오븐 샐러드와 파니니 등 쉐어할 수 있는 것으로 구입하고 가끔 제일 나이 많은 사람(나)이나 직책자(나) 또는 좋은 일이 있는 사람(주로 나)이 음료나 후식을 사기도 한다. 그렇게 모여서 각자가 준비한 음식을 쨔쟌 하고 꺼내어 신나게 나눠 먹으며 수다를 떨면 마치 매일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가던 학창 시절로 순식간에 타임워프한 기분이다.


 삭막하고 때로는 냉혹한 사회인들의 세계에서 가끔은 마음을 다치고 감정이 상하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 간편한 도시락 점심을 매개체로 순수했던 학생 때로 돌아가 웃고 떠들 수 있으니 정말이지 포스트 모더니즘 도시락 파티를 포기할 수가 없다. 내일도 쉽지 않은 업무와 각박한 인간 관계에 지쳐 있을 때쯤 누군가가 먼저 "도시락 점심 콜?" 을 외치길 소심한 우리들은 서로 간절히 기다리겠지.



이전 11화 팀장님의 귤 한 박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