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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놂작가 Jan 11. 2019

오후 네 시의 땅콩버터, 마말레이드잼 그리고 흰우유

기운 센 을지로입구 식탐러의 워크&푸드 로그

 어릴 적 즐겨 읽었던 '꼬마 니콜라' 에서 내가 가장 몰입했던 캐릭터는 뚱보 알세스트였다. 무리들 중 조금 부유한 축에 속했고 항상 주머니에 챙기는 버터 바른 빵을 먹느라 통통한 손가락은 늘 번들거리는 아주 사랑스러운 캐릭터였다.


 장자끄상뻬의 귀여운 일러스트가 더해져 버닝하며 읽었던 꼬마 니콜라를 한동안 잊고 살다가 최근에 문득 다시 떠올리게 된 계기는 다름아닌 땅콩버터다. 회사 팀원들과 함께 워크샵을 준비하면서 워크샵 장소에서 아침을 해먹자는 요란한 꿈에 부풀어 식빵이며 잼이며 치즈에 심지어 날계란까지 잔뜩 구매했었는데 불가피한 사유로 워크샵이 전일 취소되면서 처치곤란 재료들이 사무실 책상 서랍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 중 내가 강력하게 주장해서 구입 목록에 올랐던 땅콩버터가 결국 내 몫으로 돌아온 것이다.


 주방 식탁 위에 방치해 둔 채 몇 일이 지났을까 지난 주말 컴퓨터방에서 실컷 놀다가 나온 내 눈에 그 땅콩버터가 들어왔다. 순간 꼬마 니콜라에서 탐스런 호빵 같은 얼굴을 하고 버터 바른 빵을 쉴새 없이 먹어대던 알세스트가 떠올랐고 나는 미칠 듯한 식욕에 사로잡혀 순식간에 뚱보 알세스트로 빙의되고 말았다.


 그 뒤의 일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마치 무언가에 취한 듯 급히 빵바구니에서 우유식빵을 꺼내 접시에 세팅하고 땅콩버터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본마망 마말레이드잼, 그리고 이 모든 단짠느끼함을 한 번에 잡아줄 흰우유 한 컵을 꺼내어 미친듯이 두근대는 마음으로 식탁 앞에 앉을 때까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보드라운 우유식빵을 절대 토스트하지 않고 한 면에 마말레이드잼을 반쪽만 얇게 펴바르고 나머지 반쪽에는 땅콩버터를 인정사정없이 푹 떠서 두껍게 바르고 또 덧바르고 특히 모서리 부분엔 버터나이프를 눕혀 더 두툼하게 얹은 뒤 잼과 땅콩버터의 경계를 기준으로 반으로 조심스레 접어 드디어 한 입.


 씹지 않아도 삼켜질 듯한 부드러운 식감에 입 안 가득 엉겨 붙는 진하고 고소한 땅콩버터, 그리고 순간 순간 강렬히 치고 들어오는 달콤쌉싸름한 마말레이드 잼. 한껏 우물대다가 마지막으로 시원하고 신선한 흰우유와 함께 꿀꺽 삼킬 때의 만족감이란. 기분 좋은 얼굴로 시계를 보니 오후 네 시였다.




 행복한 주말을 보내고 오랜만에 주5일 근무가 예정된 사무실로 출근한 월요일은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업무는 밀려들지 월요병은 심각하지 부실하게 먹은 점심 탓에 기분은 계속 다운이지 그것도 식사는 식사라고 식곤증은 몰려오지 그 와중에 미팅은 계속되지 정말이지 정신 없이 불쾌한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시계를 쳐다보니 오후 네 시.


 순간 자동 반사처럼 주말 오후 네 시의 버터 바른 식빵이 연상되었고 나는 말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또다시 뚱보 알세스트로 변신하고 말았다. 무력했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고 이미 알고 있는 그 맛을 떠올리며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올랐다. 상상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해 질 수 있다니!


 회사원이라면 종종 겪는 세상 꺼질 듯한 무력감을 오후 네 시의 버터바른 빵으로 치유할 수 있다니, 어쩌면 쉽게 행복해지는 나의 성향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강한 식탐 덕분에 나는 오늘도 스트레스가 만연한 회사 생활을 견뎌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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