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운 센 을지로입구 식탐러의 워크&푸드 로그
건강 염려증이 있는 나는 최근 과도한 취미 생활에의 몰두로 인한 경미한 목디스크 증상을 발견하곤 겁에 질려 도수 치료를 시작하였다.
퇴근 이후 을지로입구 근처에 단 1초라도 더 머무르는 것을 병적으로 질색하는 지라 역시 의료 행위는 한 시간 남짓의 점심 시간을 활용하여 해치운다. 회사에서 걸어서 약 5~8분 거리에 있는 도수 치료실에서 40분 코스에 12만원짜리 도수치료를 받고 또다시 부지런히 걸어 복귀하는 일정이기 때문에 점심 식사를 할 여유 따위는 당연히 없다.
다행히 나의 직장은 소비의 성지 을지로입구, 그것도 롯데백화점과 연결된 곳에 위치해 있어 백화점 지하 식품 코너는 점심 시간이 바쁜 나에게 굉장히 훌륭한 한끼 영양소 공급원이 되곤 한다. '점심 시간이 바쁜 나' 라고 포장하긴 했지만 사실 나는 회사에서 자발적 아싸이자 굉장한 비주류로 점심 약속이 거의 전무하기 때문에 혼밥을 즐겨할 수 밖에 없는 처지다. 그나마 점심 시간을 이용한 각종 의료 행위 - 도수 치료, 피부과 진료, 정형외과 물리 치료 등 - 덕분에 '시간이 없어서' 혼밥을 한다는 때깔 좋은 핑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유일한 위로랄까?
말은 이렇게 했어도 사실 혼밥은 하루 종일 업무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 나에게 간절히 필요한 힐링 타임이자 무엇보다 나의 폭발하는 식탐을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발현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우리 회사는 점심 시간이 되면 사무실 전등을 모두 소등하는 굉장히 좋은 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이 때 나만의 공간인 작고 어지럽지만 cozy한 책상에서 오전 내내 고심해서 사온 메뉴를 펼쳐 놓고 만끽하는 혼밥 시간은 그야말로 가뭄에 단비, 사막에 오아시스를 만난 격이다.
시간이 많을 때에는 아예 푸짐하게 정찬을 차려 놓고 먹기도 하지만 오늘처럼 도수 치료를 하고 왔다거나 볼일을 보고 나서 밥을 먹어야 할 때에는 주로 도제의 타코와사비 유부초밥을 선택한다. 성인 여성 주먹만한 크기에 달콤하게 졸여진 유부가 넉넉히 밥을 감싸고 있고 새콤달콤한 양념이 간간히 밴 미끄덩하고 찰진 밥알들 위로 화룡점정인 알싸한 타코와사비가 잔뜩 올려져 있는 빅사이즈 유부초밥. 심지어 냄새도 거의 나지 않고 포장재도 깔끔해서 먹고 난 후 뒷처리하기 좋은 그야말로 혼밥을 위한 메뉴다. 무엇보다 이자까야에서 술안주로 치킨가라아게니 오뎅탕 등을 잔뜩 먹어치운 뒤 입가심으로 주문해 많은 사람들과 나눠먹느라 늘 조금은 부족하게 먹어야 했던 타코와사비를 나 혼자 모조리 다 먹을 수 있다는 점이 굉장히 매력적이라는 사실.
기분 좋은 포만감과 함께 젓가락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오후 업무를 준비하는 과정은 일종의 의식ritual과도 같아서, 역시 나에게 혼밥은 지치고 힘든 회사원의 일과 중 크게 쉬어가는 쉼표의 의미를 갖는다. 물론 점심을 먹고 돌아오던 동료들의 안쓰러운 시선을 견뎌야 하고 간혹 "왜 혼자 이러고 있어?" 와 같은 치욕스런 질문에 답해야 하지만, 그래도 내게 혼밥은 여전히 가장 매력적인 점심 옵션 중 하나인 것.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메뉴를 마음대로 골라서 남을 의식하거나 배려하지 않고 다 먹어 치울 수 있다니 식탐러에게 이보다 훌륭한 한 끼 식사가 또 어디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