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출장 차 캐나다에 가 있던 친동생과 영상 통화를 하다가 동생의 지인이자 나와도 교회 언니동생으로 알고 지내던 E와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E는 회사에 휴가를 내고 내 동생의 출장에 여행 메이트 겸 업무 지원 자격으로 동행했다고 한다.
이미 새벽인 시간이었던 캐나다에서 E는 와인에 얼큰히 취해 있었다.
다니던 교회를 옮기고서 약 2년 만에 보는 얼굴이 반가웠는지 E는 처음부터 텐션이 높았다.
알고 보니 대화 중 내 얘기가 나오자 얼굴이 보고 싶으니 영상 통화를 걸어 달라고 동생을 졸랐단다.
취기에 수줍음을 더해 발그레 해진 채로 언니를 정말 좋아한다느니 롤모델이라느니 세상에서 제일 멋지고 예쁘다는 얘기를 늘어놓는 E는 그래, 흡사 팬미팅에 참석 중인 열성팬 같았다.
나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나와의 첫만남을 대사 하나 하나까지 상세히 되짚으며 눈을 반짝이는 E의 애정이 고마운 한편 부담스럽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나에겐 유독 따르는 여자 후배며 동생들이 많았다.
일견 여초 집단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성향이지만 실상 내가 회사 생활 중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구성원이 거의 전부 나보다 어린 여성이었던 마케팅팀 시절이기도 하다.
이제 더이상 상사와 부하 관계가 아닌 그 시절의 직원들은 여전히 나를 대부님으로 부르며 관계를 이어 가고 있는데, 그 중 한 명과 나눈 인스타 DM을 본 나의 친우는 혹시 이 곳이 북한이며 나는 김일성이냐고 물었다.
그나마 평이한 수준의 대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햇님이 왜 이리 아름다우신가 했더니 엄빠 닮으셔서 그러신 거였오!! 햇님같은 분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효도+세상의 축복이라 생각함돠!!"
*이 아이들은 나를 종종 태양에 비유해 햇님이라 부른다...
늘상 내게 이런 류의 찬양과 칭송을 일삼던 후배인지라 그러려니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여간 이상한 게 아니다.
나는 그저 마흔 다 되어 가는, 그리 잘 나가지도 않는 회사의 평범한 직장인일 뿐인데 왜 내게 이토록 열광하는 여성 팬들이 많은 것일까?
칭찬을 주고 받거나 덕담을 해 주는 스윗함도 전혀 없고 오히려 업무적으로는 무섭다거나 냉정하다는 평을 듣는 편인데도 유독 내겐 이런 일이 잦았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여전히 이 사회는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고 움직인다는 것을 자연스레 알게 된다.
경제 활동이라고는 오로지 수렵과 채집 뿐이던 시절, 더욱 강인한 육체를 지닌 남성이 무리를 먹여 살리고 여성은 출산과 양육으로 집단에 기여하던 DNA가 여전히 남아 있는 거다.
그것이 오랜 시간 인간 사회를 지배해 온 질서이자 모두에게 익숙한 구조이기 때문에 남성은 자신에게 주어진 우위를 당연히 여기고 여성은 만연한 차별을 저항 없이 받아 들인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이것이 부당하며 부조리하다는 것을 느낀다.
어린 나이에 대기업에 입사해 한 직장에만 14년째 근무하면서 나 역시 소위 유리천장이라 불리는 절대 깨지지 않는 한계를 무수히도 경험해 왔었다.
겉으로는 여성 인재를 우대한다며 여성 팀장이나 관리자 보직을 늘리는 등 수혜를 베풀지만 실상 이면에는 남성 중심의 네트워크가 강하게 형성되어 있다.
소위 알파 메일이라 불리우는 능력 좋은 남성들을 중심으로 일종의 파벌이 형성되고 여성들은 업무 능력과 상관 없이 어떤 파벌에 가서 붙느냐가 그녀들의 출세를 좌우한다.
일은 못해도 된다.
인성이 좋지 않거나 무능력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꽃같이 웃고 애교 섞인 톤으로 무리의 우두머리를 추켜 세울 줄만 알면 성공인 셈이다.
그러니 새롭고 신선한 구심점이 필요했던 거다.
남성 위주의 네트워크와 그들만의 리그에 억지로 끼어 앉아 방긋 방긋 웃는 역할도 신물이 나고 왠지 울컥하는 억울하고 아니꼬운 마음도 들고 말이다.
여자들끼리도 뭉칠 수 있고 쓸데 없이 웃음을 팔지 않아도 편안한 우리만의 '무리'를 만들고 싶은 은근한 욕망이 모두의 마음에 스며 있었을 거다.
그 중심이 되어 주기에 나만큼 적당한 사람이 또 있었을까?
웬만한 남자들에 갖다 대도 절대 질 것 같지 않은 기운에 내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업무 능력, 그리고 적당히 매력적인 스펙과 성격, 무엇보다 그 어느 남성 파벌에도 굽히고 들어가지 않은 청정지대라는 점까지.
그간 우리만의 무리에 목말랐던 여자 후배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 이런 내 주위로 슬금슬금 모여들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멋들어지게 그 어떤 남성 우두머리보다 훌륭한 무리를 만들어 보란듯이 자신들을 끌고 나아가 줄 것이라 기대했을 것도 같다.
하지만 이제 와 너희들이 틀렸다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하는 입 안이 쓰다.
내게는 너희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 줄 능력도, 무엇보다 그 어떤 의지나 에너지도 없다고 얘기하는 마음이 씁쓸하다.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나는 너무 지쳐 버렸다.
부조리함을 보아도 그러려니 하는 것이 편하다.
더 이상 잔다르크처럼 여기 저기 쑤시고 다닐 힘이 내겐 없다.
그래봤자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뼈저리게 체감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서서 부딪힐 만큼의 열정은 사라진 지 오래다.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내게 감흥을 주지 못한다.
미안하지만 얘들아, 너희들의 대통령은 하야하고 말았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