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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놂작가 Jun 25. 2019

여직원의 제육볶음

기운 센 을지로입구 식탐러의 워크&푸드 로그

  회사의 모그룹에서 팀장 진급 예정자 대상으로 실시하는 자격 교육 과정을 수강하였다. 


  강의는 우리 그룹의 타 계열사 팀장님들이 맡아서 해 주셨는데, 강사 교육을 따로 빡세게 받으신 건지 다들 말솜씨도 좋으시고 긴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적절히 재미도 더해 가며 강의해 주셔서 모처럼 즐겁게 교육에 참여했다. 조별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같은 조 조원들이 다 무난하고 착한 아저씨들이라 마음도 편했고.


  딱 한 가지 거슬렸던 것은 강사님이 나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여성 인재' 라는 표현이었다.

강의 주제는 직원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인정하자는 취지로 밀레니얼 세대를 이해하고 젠더 감수성을 갖자는 내용이었는데 정작 강사가 나를 가리킬 때는 '여성 인재' 라고 부르는 것이 나는 끝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자들한테는 '남성 인재' 라고 안 하잖아?


  교육 중 조원들끼리 짝을 지어 면담자(팀장)와 피면담자(직원)의 롤플레잉을 하고 관찰자를 두어 면담 태도를 관찰 후 피드백을 해 주는 실습이 있었다. 나는 얌전하고 젠틀한 조원 아저씨와 짝이 되었고, 인원수를 맞추다 보니 강사님이 우리 조의 관찰자가 되셨다. 강사님은 면담 실습 내내 감탄과 놀라움의 눈초리를 보내다가 웃음도 터뜨렸다가 하더니 피드백 시간이 되자 나에 대한 찬사를 늘어 놓았다.


  "저는 정말 감동했습니다. 지금까지 이 교육을 여섯 차례 정도 진행했는데 책임님 정말 퍼펙트 하세요. 원래 회사에서 면담을 자주 하시나요? 자연스러운 도입부부터 목적한 바를 향해 대화를 주도해서 이끌어 나가는 스킬도 너무 완벽하고 면담 내내 팀원과 눈을 마주치면서 부하직원을 세상 아끼고 사랑하는 느낌까지 주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인사팀에 계셨나요?"


  나는 물론 칭찬 받는 것을 매우 좋아하기 때문에 여기까지는 기분도 너무 좋고 어깨가 다 으쓱할 지경이었다. 오랜만의 칭찬에 심지어 들뜨기까지 했다. 나의 면접 스킬에 감동한 강사가 앞에 나가 마이크를 쥐고 강평을 할 때까지는.


"제가 지금 너무 감동을 해서요. 여성 인재라서 그런지 대화 중에 제스처나 눈빛도 너무 좋으시고 왜 보통 여성 인재들이 말씀을 정말 조리있게 잘 하시잖아요. 함께 실습한 상대 분께서 아주 여성 인재에게 휘둘려서 꼼짝을 못 하시더라구요."


  생각해 보면 교육 내내 나는 그놈의 여성 인재라는 호칭과 함께 조원들 각자의 회사에서 여직원들을 다루기가 얼마나 힘든지에 대한 푸념을 들어왔던 것 같다. 여직원들 많은 조직은 힘들다, 여직원들은 징징댄다, 여직원들은 작은 것에 쉽게 삐진다 등등... 내가 정말 싫어하는 말인 여직원을 조금 더 점잖게 표현하면 여성 인재가 아닌가. 결국 이 모든 여직원에 대한 은근한 비난은, 그들은 의도치 않았겠지만, 여성 인재라 칭하는 나를 향한 것이기도 했던 거다.


  나는 여직원, 여성 인재로 묶여서 은근히 싸잡아 후려쳐지는 느낌이 이제는 정말 지긋지긋하다. 여직원이라는 명제 하에 이 세상의 모든 여성 인력들을 한데 묶어 폄훼하려는 은근하고 꾸준한 시도도 몸서리쳐지게 싫다. 어차피 그렇게 성별을 기준으로 깊고 긴 선을 그어 놓고 여직원들을 건너편으로 보낼 거면 남직원들도 소위 '남성다움'을 좀 보여 주었으면 한다.


  교육 내내 나는 조원들을 리드해 실습과 과제를 해 나갔고 토의 시간이 되면 자연스레 좌장이 되어 분위기를 주도하여 결론을 도출해 냈다. 강사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한 조원이 생기면 내가 나서서 가르쳐 주었고 모두가 공평하게 참여하고 발표할 수 있게끔 기회를 안배하기도 했다. 


  점심 시간에도 역시 구내 식당이 워낙에 형편없었던 터라 모두 밖에 나가 식사를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누구도 선뜻 제안하지 못하고 무한한 눈치 게임을 하던 중 그것이 못내 답답했던 여직원, 즉 내가 나서서 식당을 정했다. 강의 시간과 마찬가지로 모두들 여직원의 리드에 따라 신나게 식당으로 향했다.


  메뉴판을 보고 또다시 다들 깊은 고민에 빠졌는데 이 식당의 메뉴는 1인 주문이 가능한 단품 메뉴와 2인 이상 주문 가능한 메뉴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 마침 옆 테이블에서 한 무리의 아저씨들이 냄비에 끓여 나오는 제육 볶음을 아주 맛있게 먹고 있었고 모두의 눈빛은 그 제육 볶음 냄비로 향해 있었다. 넓고 납작한 냄비에 아주 맛깔스러운 붉은 빛의 제육과 어슷 썬 파와 양파를 듬뿍 넣어 보글보글 끓이는 맛있는 제육 볶음. 심지어 야들야들한 앞다리살로 살코기와 비계가 기가 막히게 조화를 이룬 부위였고 양념이 맛깔나게 골고루 배어 있어 국물만 떠 먹어도 흰 쌀밥 한 그릇은 뚝딱 할 수 있을 만큼 감칠맛이 나 보였다.


  하지만 제육 볶음은 2인 이상만 주문 가능한 메뉴였기에 그 누구도 선뜻 같이 제육을 시키자고 제안하지 못하고 또다시 눈치 게임의 무한 루프. 여직원은 외칠 수 밖에 없었다.


"아주머니, 여기 제육 볶음 5인분이요."


  교육을 해 주신 강사님도, 우리 조원들도 전혀 나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만나온 사람들 중 아주 선하고 훌륭한 사람들 축에 속하는 좋은 분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직원이라는 개념은 너무 오래, 너무 깊숙히 그분들을 포함한 우리 사회 남자들, 심지어 여자들 스스로의 뇌리 속에 박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말하고 싶다. 여직원을 구분해서 부르고 바닥에 그어 놓은 선 너머로 우리를 보낼 거면, 선 이편에 남은 남자들이 제대로 소위 말하는 '남자 구실' 을 하라고. 여직원의 제육 볶음에 숟가락을 얹지 말고 당당히 남성스러움을 뽐내라고. 그렇지 못할 거면 다시는 여직원이라는 단어는 입밖에도 꺼내지 말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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