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에서 저자는 김무성 의원의 갑질을 보며 첫 문장을 완성했다고 언급했다. 그 문장은 "갑질의 신세계를 보았다."이다. 그런데 김무성 의원의 입장에서는 전혀 갑질이 아니고 죄책감이 없다고 말한다. 수행 비서가 자신에게 다가올 거리를 줄여주고자 캐리어를 배려의 차원에서 밀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수많은 기자가 사진 셔터를 누르는 와중에 웃음기 없이 캐리어를 수행 비서에게 보내는 김무성 의원의 행태는 비난을 받는다. 그의 행동이 아니라 이미 심중에 자리 잡은 '갑'과 '을'의 철저한 관계 때문이 아닐까 싶다.
왜 유독 한국 사회에서는 이렇듯 소위 갑질, 꼰대 문화가 팽배할까? <어쩌다 한국인>의 저자 허태균 심리학자는 한국인의 주체성과 관계성에서 해답을 찾으려 한다. 두 가지를 살펴보려면 한국의 경제 발전의 쾌거를 이룬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 봐야 한다.
한국인은 특이하게도 어떤 제품의 성능의 80%만 사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120%, 150%의 성능으로 조작한다. 즉, 본인 마음대로 무언가를 조작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어떤 물건에만 이러한 성향이 나타나지 않고, 일하는 환경에서도 비슷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그렇다면 세계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독보적인 무엇인가가 한국인에게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에 팽배한 관계성과 주체성이 그 주인공이다.
한국 전쟁을 겪고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세대는 주체성이 굉장히 강할 수밖에 없다. 성공이든 실패든 본인이 하고 싶은 무언가를 도전하고 이를 발판 삼아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체성이 하늘 끝까지 치솟아 있는 사람이 주민 센터에서 가끔 하는 말이 있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그들을 가장 화나게 하는 대답은 '몰라요'라는 답변이다. 자신이 누군지 모르면 화를 내는 세상이다. 지구촌이라 부르는 75억 명의 인구 중에서 한 명인 고위 관료가 누군지 알지 못한다고 했을 뿐인데 갑의 위치에 도달한 사람은 인정 욕구가 더욱 필요했던 모양이다. 고위 관료라는 위치에서 바라보면 주변에 온통 '을'로 가득 차 있다. 항상 누군가의 관심과 인정을 받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고위 관직의 갑질만 나타나지 않는다. 갑질은 갑과 을의 힘의 불균형이 발생하는 장소에서 어김없이 나타난다.
식당에서 종업원은 을이고 손님은 갑이라는 관계가 성립된다. 갑의 위치에 자리한 손님은 자신이 수차례 종업원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다는 이유만으로도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도대체 갑질하는 사람의 심리는 어떤 상태일까? 그들은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이야기한다. 도로에서 보복 운전을 하는 사람의 진술서에서 '무시당한 느낌을 받았다'라는 말을 쉽게 볼 수 있다.
유례없는 경제 발전을 이룩한 세대는 대한민국 1호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다. 고속도로를 처음으로 건설했고, 한강에 다리도 처음으로 만들었고, 방송국도 처음으로 만든 사람들이다. 처음으로 무언가를 완성했다는 의미는 다른 말로 자신 마음대로 했다는 뜻이다. 자신의 존재감이 어디에서나 드러나던 시대다.
그들의 부모는 일제 식민지 시대를 겪으며 말 그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무지한 세대다.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 입장에서 공부보다 끼니를 제때 챙기는 생존이 우선이었다. 자식에게 부푼 기대와 함께 '밥은 먹었니?', '건강해야지'와 같은 말을 꺼냈다. 학원은 어디를 가야 하고,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지 간섭하지 않았다. 경제 발전을 이룬 세대의 부모 세대는 말 그대로 생존이 절실했던 세대다.
인본주의 심리학자인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를 5단계로 나누었다. 이를 살펴보면 생리 욕구가 가장 원초적인 욕구임을 알 수 있다. 일본 식민지를 벗어난 직후 세대는 먹고, 자고, 배설하는 생리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자식에게 이러한 욕구가 충족되기를 바라는 부모가 대부분이었다.
한국 전쟁을 겪은 다음 세대는 어린 시절 생리 욕구에 더해 안전 욕구를 해결하려고 고군분투했다. 한국 특유의 집단주의와 외세 침략에서 살아남은 불굴의 의지로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그들은 생리 욕구와 안전 욕구가 제법 해결된 사회를 만들었다. 이러한 환경이 갖춰지면 인간은 인정의 욕구가 추가로 절실해진다.
인간은 누구나 인정의 욕구를 충족하려고 노력한다. 혼자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도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한국 사회는 관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어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더욱 거세진다.
그런데 유례없는 경제부흥을 이끈 세대는 관심을 받고 싶지 않아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사회 구조다. 지금처럼 대기업이 몇만에서 몇십만 명이 근무하지 않았고, 한 명의 인원이 자리를 비우면 금방 기업에 타격이 될 정도로 필요한 존재였다. 주체성을 느끼고 싶지 않아도 그들은 항상 자신의 존재를 느꼈다.
그런데 문제는 주체성이 매우 강한 이들이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부터 시작이다. 왜 이러한 성장 배경이 갑질 문화의 시작이 되었을까?
자신들은 대한민국 1호의 자부심을 토대로 실패와 성공을 맛보며 성장했다. 그런데 자신들이 실패한 경험을 자식 세대에게 물려주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하여 평생토록 한 직장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환경이 성공이라 생각했다. 자식 세대에게 성공의 해답을 알려주려고 입시 경쟁에 강한 압박을 행사한다.
아직 한창 친구들과 뛰놀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국어와 수학이 중요하다며 학원을 강요하고, 입시 경쟁에서 살아남아 대학을 졸업해야만 사회에서 안정적으로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주체성이 강한 그들에게 옳고 그름은 내면에 강하게 생성되고,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처사에 자식 세대는 반응하기 시작했다. 자식 세대가 불만을 해소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분노하거나 무기력하게 지내거나 둘 중 하나다.
현대 사회는 자신의 존재가 사라져도 금방 알아채기 힘들다. 그저 75억 명 중의 하나일 뿐이다. 결국 유례없는 경제 발전의 이면에는 사회를 병들게 하는 부작용이 존재한다. 한국 사회는 왜 OECD 행복지수가 그토록 낮을까? 물질적으로 풍족하지 않아서일까? 지난 70년을 비교해보면 지금처럼 물질적으로 풍요한 시대가 없었다. 그런데 왜 행복지수는 그토록 낮을까? 수많은 사람에게 인정받는 일의 빈도가 낮아지고 존재를 알아주는 사람이 주변에 거의 없어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어쩌다 한국인>의 저자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보다 스스로 인정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과거처럼 타인에게 의존하여 존재감을 찾는 건 무리가 있다. 50-60년 전에는 미국에서 누가 부자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한국 사회에서 부를 쌓은 사람이 가장 부자로 생각했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어떨까. 한국의 부자라고 하더라도 세계 부자 명단에서는 그리 상위권이 아니다. 이런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하더라도 75억 인구와 비교된다.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이 전부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런 사회에서 설사 주체성과 관계성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를 인정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사람을 주변에 많이 만들어야 한다. 한국인이 행복하게 살려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직장에서 인정을 추구하기보다 문화적 삶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고 감탄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해보는 건 어떨까.
참고 도서 : 어쩌다 한국인
저자 : 허태균
출판 : 중앙북스
발매 : 2015.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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