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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준원 Jul 06. 2021

극한에서 발견하는 삶의 가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강제 수용소를 설치했다. 강제 수용소는 노동력 확보, 처벌, 격리 등의 목적으로 재판을 거치지 않는다. 그저 사람들을 강제로 대량으로 수용하는 시설이다. 이러한 강제수용소에서 그들은 상황 면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자유를 박탈당한다.


평범한 삶에서 누려왔던 모든 인간적인 존엄과 가치가 철저히 무시당한다. 그들에게 남는 것이라고 오로지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이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지 선택뿐이다. 그 상황이 아무리 참담해도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뉠 수 있다.


전자의 경우처럼 긍정적인 태도는 희박한 삶의 연명에도 불구하고 책임감이 생겨나고 이를 바탕으로 험난한 상황 속에서도 버티는 힘으로 작용한다. 어떻게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 빅터 프랭클은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자신의 경험담을 토대로 실존적 심리치료 기법을 말한다.



강제 수용소에서의 체험

강제 수용소에는 특별한 계급이 존재한다. 바로 수감자 중에서 선출되는 '카포'라는 계급이다. 수감자를 감시하는 병사들보다, 나치 대원들보다도 '카포'가 오히려 수감자에게 더 가혹하고 악질적인 행동을 일삼았다. 그들은 나치 대원들에게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다.


'카포'에게는 특별히 '담배'를 피울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한다. 강제 수용소에서 담배는 수프 열두 그릇과 바꾸어야 할 만큼 값어치가 높은 상품이다. 수프 열두 그릇이면 한동안 굶주림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양이다. 실제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특권은 '카포'에게 주어졌지만, 때로는 더이상 살아갈 의욕을 잃은 사람들이 담배를 음식과 바꾸기도 한다. 그들에게 미래는 희망이 없었고,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잃고 나면 삶을 이어가는 의지가 다시 생기기 힘들었다. 결국 수감자가 담배를 피우는 행위는 삶의 포기인 죽음을 뜻한다.


강제 수용소에서 인간은 자율성을 박탈당한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가진 삶의 의미를 굳건히 지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 긍정적인 마인드로 삶을 이끌어갈 의지를 갖춘 사람은 극히 드물다. 자율성을 억압당한 수감자달은 자유의지가 없는 상태에서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가 어렵다. 그저 하루하루 절망 속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간다.


그런 생활조차도 적응하며 살아가는 인간이 어찌보면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다른 면에서는 불행한 존재가 아닐까 한다. 이렇게 감정이 무뎌진 내면은 자신의 환경과 상태를 무덤덤하게 바라본다. 아무리 무서운 장면이라고 하더라도, 자주 감정을 억압하면 결국 참담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도 무감각해진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사건들의 잔인성이 점점 더 심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러나 저자는 수감자들이 극한의 상황에서 내면세계를 극대화함으로써 자기 존재의 공허함과 고독감, 그리고 영적인 빈곤으로부터 피난처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며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는 일이 하나의 방법이다. 때로는 내적이 삶이 심화되어 있어서 과거의 추억속에서 느끼지 못했던 예술과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새롭게 경험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죽음의 수용소에서> 中


이처럼 극한의 절망 속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건 다름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연에서부터 시작해서가 아닐까. 우리는 햇빛의 산란으로 빚어진 다양한 현상을 아름답다고 표현한다. 왜 그런 빛의 향연이 아름답다고 느껴질까.



인간의 고통은 그 누구도 수치로 환산할 수 없다. 고통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인간의 영혼과 의식을 완전하게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크기는 완전히 상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타인이 느끼는 고통을 온전히 공감할 수 없다. 고통의 전부를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고통은 주체인 그 사람이 느끼기에 객관적일 수 없다.


강제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통해 저자는 어느 곳에서든 사람은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감각 증세를 극복하고, 불안감을 제압한 경우는 얼마든지 많이 있었다. 인간에게 자율성을 박탈하여도 빼앗아갈 수 없는 단 한가지는 인간의 지유, 즉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자유만은 결코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한다. 그런 감정에 사로잡혀 태도를 불행하게 이끄는 건 본인 자신의 선택이다. 자신의 삶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올바르게 선택하려면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할까. 바로 자신의 존엄성에 대해 의미를 찾아가는 태도가 아닐까 한다.



근본적으로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 강제 수용소같이 척박한 환경에 놓인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지는 선택할 수 있다. 시련은 운명과 죽음처럼 우리 삶의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시련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


항상 즐거움과 낭만적인 여유를 즐기며 생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생활들이 행복의 척도라면 시련 앞에서 인간은 항상 불행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인생에서 시련이 삶의 일부라고 생각한다면 당장 눈앞에 펼쳐진 문제로 힘들지만, 이러한 시련을 극복하면 더 성장한다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극소수의 사람만이 도달하는 초월적 영역이지만, 자신이 그 극소수의 사람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고 말했다. 자신의 삶에 더 이상의 느낌이 없는 사람, 이루어야 할 아무런 목적도, 목표도 그리고 의미가 없는 사람은 곧 파멸한다. 인생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자포자기하는 사람에게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자세가 가장 필요하다.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또한 상황에 따라 다르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포괄적이고, 보편적으로 말할 수 없다. 삶이란 막연하지 않고, 모든 개인에게 각각 현실적이고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삶에 대한 책임과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다.



참고도서 : <죽음의 수용소에서>

저자 : 빅터 프랭클

출판 : 청아출판사

발매 : 2005.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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