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행동치료에서는 우리가 힘들어지는 이유를 사건 자체보다 그 사건을 바라보는 해석 때문에 우리의 감정과 행동이 달라진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발표 중에 말을 더듬었다'라는 사건을 겪어도, '역시 난 안돼. 나는 항상 망쳐'라고 해석하면 수치심과 우울감이 온몸을 뒤덮지만, 어떤 날은 '아. 오늘은 긴장했구나. 다음에는 이 부분만 잘 준비해 보자'라고 해석하면 아쉬움은 남아있지만, 다시 해보려는 의욕이 생깁니다.
이렇게 내면에서 어떤 말을 나에게 들려주느냐에 따라 감정과 행동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인지행동치료에서는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생각들을 자동사고라고 부르고, '나는 항상', '역시 난 안 돼' 같은 왜곡된 패턴을 찾아 현실적이고 따뜻한 언어로 인지를 재구성하는 연습을 합니다.
실수보다 더 아픈 건 내 안으로 향한 화살
회사에서 중요한 메일을 하나 잘못 보낸 날이었습니다. 받는 사람 이름이 헷갈려서, 내부에서만 봐야 할 내용을 다른 부서 팀장에게 그대로 보내버렸습니다. 메일 보내고 나서 참조에 이름이 다른 걸 발견하고 마음속으로 큰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사과 메일을 보내고, 팀장님께 상황을 설명하고, 실제로는 그리 큰 사고로 번지지는 않았습니다. 큰 문제는 아니니까 다음부터는 조심해 달라고 넘어갔습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입니다. 자리로 돌아와 앉아 한숨을 내쉬면서 제 머릿속에는 자기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아.. 이런 기본도 확인하지 않고 처리하면서 뭘 하겠다고.. 쯧'
누가 저에게 이렇게 말한 건 아니었습니다. 팀장님도, 동료도, 누구도 이런 비난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팀장님은 큰 문제가 아니라고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제 안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기 비하'가 끊임없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만 번 생각하고 그 대부분이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혼잣말이라고 합니다. 그날의 저는 실수 그 자체로 힘들어하기보다, 그 실수를 붙잡고 몇 시간 동안 나를 찌르던 내 안의 목소리에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스스로에게 향한 화살은 퇴근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책상 의자에 앉아 멍하니 있다가 회사에서 실수한 상황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내면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졌죠.
'아.. 이런 작은 메일 업무에도 실수하면 어쩌냐'
'다른 사람처럼 못 하니까 부족한 사람이 맞지'
'앞으로도 계속 실수하면 어쩌냐'
이러한 내면대화는 심각한 인지 오류를 여러 가지 담고 있습니다. 메일 업무에서 항상 망치는 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일반화를 했으며, 스스로 부족한 사람이라는 잘못된 명명으로 낙인을 찍었고, 앞으로도 망칠 것 같은 미래 비관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저 '오늘 메일을 하나 잘못 보냈다' 정도가 사실인데, 내면의 대화는 이 사건을 한껏 부풀려서 마치 인생 통째를 다 부정하는 말투로 규정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저의 사고방식은 늘 자기혐오와 비하로 귀결되었죠.
이상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인지 오류의 10가지를 배우고, 저의 사고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면 사실과 감정을 분리해보려 했습니다. 그래서 노트를 하나 꺼내고 왼쪽에는 제가 실제 나눴던 내면대화를 오른쪽에는 만약 친구가 이런 생각을 한다면 어떻게 말해주었을지 다른 버전으로 써보기로 했습니다.
실제 내면 대화
'너는 왜 이렇게 기본도 못 지키냐'
'이런 실수하는 거 보니까 진짜 실력이 형편없다'
'하는 일이 맨날 실수 투성이지'
이렇게 옮겨 적어 보면서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오른쪽 칸에는 친한 친구가 같은 실수를 했다고 상상하면서 다시 써보았습니다.
친구에게 해줄 말
'오늘 메일 업무에서 실수한 건 누구나 그럴 수 있지. 그래도 속은 좀 쓰리겠다'
'중요한 건 다음에 이런 일이 줄어들게 시스템을 만들어볼까를 생각하는 거지. 너의 존재 가치를 깎는 건 아닌 것 같아'
'그래도 바로 사과도 하고, 보고도 해서 마무리했으니까. 책임감 있게 잘 마무리했네'
노트에 쓴 글을 번갈아 가며 읽어 보니까 마음속에서 묘한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오른쪽 칸에 쓴 글을 읽어보면 위로가 가득한데 정작 내면 대화는 비난이 가득한 말들 뿐이었습니다.
내면대화 일지를 쓰면서 보인 패턴
그 후로 미철 동안 '내면대화 일지'를 써보았습니다. 거창하게 어떤 형식을 만들어서 쓰지는 건 아니고, 하루 중에 기분이 확 가라앉았던 순간을 기억하며 머릿속에 스친 문장을 가능한 그대로 적어보는 방식이었습니다.
회의에서 플랫폼의 설계를 설명하는 도중 다른 직원이 "언제까지 설명한데요?"라면서 옆에 앉은 직원에게 마치 제가 들으라는 듯이 말하는 내용을 듣고 '괜히 자세히 설명했네. 역시 난 필요 없는 사림이야'라는 기록. '오늘도 운동을 못 했네. 역시 의지력이라고는 진짜 없다. 게으른 사람'이라는 기록.
이러한 일지의 기록을 하나씩 살펴보니 공통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항상, 절대, 전혀 같은 단어가 너무 많았습니다. 한 번의 사건을 가지고 일반화를 하며, 존재 전체를 비하하는 평가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에휴.. 내가 그렇지 뭐'라는 문장이 거의 매일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한 번씩 그 밑에 작은 글씨로 '이런 말을 친구에게도 할 수 있을까?'라고 적어보았습니다. 대답은 대부분 '아니요'였습니다. 머리로는 아는데 대화의 끝은 비난의 화살을 저에게 돌리고 있었던 겁니다.
친구에게는 "오늘은 좀 위축되어 보이네", "요즘 일이 많아서 운동까지 챙기기 힘들겠다"라며 위로의 말을 해줄 수 있는데, 스스로에게는 기가 막히게 독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한숨이 나옵니다. 어쩌면 타인에게는 괜찮은 사람일 수 있지만, 제 자신에게는 유독 나쁜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친구에게 해줄 말을 자신에게 해주는 연습이 과연 진정한 효과가 있는지 의심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위로의 말만 해주면 '현실을 회피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하는 걱정입니다. 저도 그 부분이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하지만 인지행동치료(CBT)에서 말하는 인지 재구성은 사실을 미화하는 작업이 아니라, 왜곡된 생각의 크기를 현실 크기만큼으로 되돌리는 작업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항상 망쳐'를 사실은 '오늘 발표하는 중에 특정한 부분에서 실수를 했다'로 바꿀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나는 잘될 리가 없어'라는 생각을 '이번에는 잘 안 됐지만, 다른 시도들은 아직 하지 않았으니까 모른다'라고 변경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과 해석 문장을 나눠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문장은 팩트를 그대로 적는 겁니다. 메일을 잘못 보낸 사실이나 발표 보고에서 말을 제대로 못 했다는 상황입니다. 해석 문장은 말 그대로 내면에서 파생된 다른 대화입니다. '그래서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야', '그래서 나는 승진할 수 없어'와 같은 말들이죠.
이러한 문장을 분리해서 작성하면 두 번째 문장이 일반화의 오류라고 바로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조금 더 현실적인 버전으로 다시 써봅니다. '오늘 메일을 보낼 때 실수했으니까,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체크리스트를 한 번 만들어보자'라는 다짐을 써보는 겁니다.
이건 '긍정 마인드' 같은 구호라기보다 그냥 앞으로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을 만큼 자기 비하를 조금 줄이는 말하기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 나에게 건네는 '존중의 말'
잠들기 전 스스로에게 존중의 문장을 써보고 입으로 소리 내어 읽어보는 미션을 하나 추가해 봤습니다. 대신 너무 거창하게 쓰면 읽지 못할 것 같아서 아주 짧은 문장만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도 오늘 여기까지 잘 버텼다. 수고했어.'
'오늘 많이 긴장했는데도, 회의에 참석한 것만으로도 잘했다'
'실수했지만 도망가지 않고 수습한 점은 칭찬해 줄 만해'
이런 문장을 소리 내어 말하기까지 솔직히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처음에는 노트에 쓰고 크게 소리 내어 읽지 못하고,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말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사실 목소리는 타인보다 자신이 가장 빨리 듣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긍정 문장을 소리 내어 읽으면 조금은 기분 전환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실수를 하거나, 관계에서 갈등이 생겼을 때 완전히 비난하는 목소리가 사라진 건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마음속에서는 끊임없이 자기 비하가 튀어나옵니다. 하지만 예전과 달라진 건 그 말 뒤에 다른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끼어둘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둔 점입니다.
'그래. 내가 못나서 그렇지. 애초에 내가 조절하지 못해서 그렇지'가 나온 뒤에 '무슨 연유로 이렇게 감정이 복잡해졌지? 왜 이렇게 무너진 건지 확인해 봐야겠다'라는 말로 억지로라도 우울의 늪에서 벗어나려고 애씁니다.
이렇게 살짝 브레이크를 걸어보는 것이 크게 보면 별 차이 없어 보이지만, 작은 브레이크 덕분에 감정에 곤두박질치는 속도가 조금은 느려지기도 하고, 다시 회복으로 오는 길이 예전보다 빨라지는 걸 느낍니다.
자존감이란 '나는 내 편이 되어줄 수 있다'라는 문장을 믿는 연습의 반복입니다. 결국 내면대화를 바꾸는 일은 나를 멋진 사람으로 세뇌하는 작업이 아니라 힘든 나를 비하하고 혐오하는 대신 힘든 자아 옆에 앉아 '그럴 만했다'라고 한 번 말해주는 아주 중요한 연습일지도 모릅니다.
혹시 오늘 하루 동안 머릿속에 스쳐간 내면의 대화 중에서 특히 마음에 걸리는 문장이 하나 있을까요. 예를 들면 '나는 왜 이렇게 못하냐', '역시 난 안 돼', '난 항상 실패해'와 유사한 내면의 대화가 있었다면 어떻게 위로해 줄지 노트에 적어보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______' 말해왔다. 그러나 오늘은 '______' 말해보고 싶다. 사실 두 번째 칸이 어색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렇게 써봐야 상황이 변하겠어?'라는 반발이 올라와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건 그 두 번째 칸의 문장을 '한 번'이라도 적어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문장 하나가 당장 인생을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언젠가 힘든 날에 분명히 떠오르는 새로운 내면의 목소리가 되어 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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