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자 마커스와 누리어스는 우리가 마음속에 여러 버전의 '미래의 나'를 품고 살아간다고 설명합니다. 인생이 제법 괜찮게 흘러가는 바람직한 모습이 있습니다. 누구나 존중받는 전문가, 마음이 단단한 어른, 균현 잡힌 부모와 같이 이상적인 '나'의 이미지를 그려봅니다.
반대로 절대로 되고 싶지 않은 두려운 나도 존재합니다. 무기력한 나, 관계를 다 잃어버린 나, 후회만 남은 나, 절대로 아버지와 유사한 삶을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 이상적인 '나'의 모습과 상반된 이미지입니다.
이렇게 마음속에 떠다니는 여러 버전의 나를 심리학에서는 '가능자기'라고 부릅니다. 이 이론의 중요한 포인트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로 사람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이미지가 선명할수록 삶의 방향을 설정하고 행동을 바꾸기가 쉬워진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가능자기'는 그냥 저절로 생기기보다, 타인의 삶을 보고, 이야기를 읽고, 다양한 롤모델을 접하면서 조금씩 다듬어진다는 것입니다.
직접 경험이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여러 사람을 만나는 것은 제약이 따릅니다. 그래서 책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책은 우리에게 간접 경험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책 속 인물과 작가들은 각각 하나의 '가능한 삶의 버전'인 셈입니다.
<월든>을 읽으면 '자연 속에서 단순하게 사는 나'라는 가능성이 떠오르고,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의미를 포기하지 않는 나'라는 가능성이 보이고,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를 읽으면 '타인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닌 나답게 선택하는 나'라는 모습이 떠오르곤 합니다.
반복해서 떠오르는 책, 오래 남는 문장들이 결국 인생의 결정적 순간에 영향을 줍니다. 결국 그 책들이 내 안의 '가능자기'를 만들어 주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좋은 대학, 좋은 회사' 말고 다른 대안이 없던 시절
지난날을 회상해 보면 고등학생 시절까지 인생의 방향은 참 단순합니다. 좋은 대학에 입학해서 대기업에 입사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흐름입니다.
학교의 교사들도, 부모님도, 주변 어른들도 대부분 이 한 줄로 우리의 미래를 설명합니다. 그래서 저 역시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물음 대신 '어느 학교에 진학해야 하지?'를 더 많이 고민했습니다.
당연하게도 책은 시험에 자주 나오는 고전 소설과 문학, 시를 중심으로 공부하며, 대학에서는 전공 교과를 제외한 책은 읽지 않았습니다. 책장에서 가장 손때가 많이 묻어 있던 건 멘투멘 영어, 수학의 정석과 같은 문제집이었죠.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인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은 딱히 해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저 소설 영웅문과 삼국지를 읽으며 타인의 삶을 살짝 엿보는 정도였습니다. 어떤 인물이 가장 마음에 드는지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에 소설 영웅문에서는 '양과'와 같은 자신만의 뚜렷한 방향성으로 밀고 가는 삶, 삼국지에서 적진 한가운데에서 주군의 아이를 구출하여 품에 안고 돌아오는 '조운'처럼 멋진 삶을 꿈꾸곤 했습니다.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인생 방향에 처음으로 '성적'이 아닌 단어, '올곧음'이라는 가치가 들어온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가치가 성인이 되어 읽었던 <자유론>, <정의란 무엇인가>로 이어졌습니다.
마흔 살. 책이 만들어 준 여러 방향의 '미래의 나'
직장에서 직급이 어느 정도 올라가고, 가정에서도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커가는 과정에서 책을 읽을 여유가 조금씩 생겼습니다. 여유뿐만 아니라 생존에 꼭 필요한 도구가 독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우선순위를 독서에 할당했습니다. 그때 저의 뇌에서는 여러 버전의 '미래의 나'가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더 연봉이 높은 직장을 다니며 안정적인 급여를 받는 나, 좋아하는 분야에서 비정규직이라도 버티는 나, 개발자인데도 불구하고 심리학사를 취득 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공부를 더 해보고 싶은 나.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 몇 권의 책들이 저에게 각각 다른 '가능자기'를 보여주었습니다.
<데미안>을 읽어보면 사춘기 소년 싱클레어가 안전한 세계에서 눈을 떼고 자기 안의 '어둠과 빛'을 함께 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데미안> 中
이 문장을 읽고 한참 동안 생각하고 노트에 저의 생각을 적어봤습니다. '나도 언젠가는 남들이 정해준 기준과 방향 말고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새로운 길을 만들고,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라는 '가능자기'가 생겨난 순간이었습니다.
심리학 독서 모임에서 읽었던 책인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아우슈비츠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프랭클이 '삶의 의미를 찾는 태도'를 놓지 않으려 애쓴 이야기입니다. 그 깨달음으로 '로고테라피(의미 치료)'라는 심리치료 기법을 창시하기도 했습니다.
일이 힘들다고 항상 투덜거렸던 저에게 프랭클의 이야기는 부끄럽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한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 '의미'라는 단어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두 번째 '가능자기'였습니다.
반대로 <월든>을 읽으면서는 또 다른 버전의 미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호숫가에 작은 집을 짓고 소박하게 살았던 소로의 이야기를 읽다 보니 '많이 가지지 않아도 꽤 괜찮게 살 수는 있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월든형 나'는 당장 현실에서 채택할 수 있는 버전은 아니었습니다. 아직 학교를 다니는 아이를 양육해야 하며, 경제 활동을 하지 않으면 생계를 꾸려갈 수 없는 상태에서 월든에서 보여준 모습은 아직 저에게는 당장 실현하기 어려운 먼 미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성인이 되어 자립하고 노후 준비가 어느 정도 끝난 상태에서는 소박하게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살고 싶다는 '가능자기'가 생겨난 계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마흔이라는 나이가 되기 전까지 10년이 넘는 사회생활 가운데 '가능자기'를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첫 직장에 들어갔을 때 안도감을 느끼며 '이렇게 꾸준히 경력을 쌓으면 언젠가 나도 전문가가 되겠지'라는 직업 전문가의 미래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10년 정도 시간이 흐르자 삶의 방향성은 점차 흐릿해졌습니다. 일은 익숙해졌지만, 설렘은 줄어들었고 성과는 나오는 것 같은데 '내가 누구인지'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야근을 하던 빈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불현듯 불안한 미래가 떠올랐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그냥 앞으로도 이 방향으로 가는 게 맞나.'라는 혼란 속에서 만난 책은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였습니다.
책에서 저자는 무슨 일을 하든, 어느 자리에 있든 '자신이 동의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문장을 읽으며 노트에 글을 남겨봤습니다.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지? 일 잘하는 기술 전문가 말고,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지 생각해 본 적은 있나?'
그때 처음으로 앞으로 10년의 성공, 실패 기준을 연봉이 아니라'내가 원하는 사람됨'의 기준으로 다시 점검해 보게 되었습니다. 책이 제 인생을 통째로 변화시키지는 않았지만 방향을 한 번은 점검해 보겠다는 다짐을 들게 한 건 분명 책 속의 문장들이었습니다.
인생의 나침반이 되어준 문장들
머리를 짜내며 떠오른 문장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습니다. 그중 유난히 자주 떠오르던 것 세 가지만 적어 보겠습니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가 중요하다.
선택의 반대말은 포기다.
어떤 경험이든 그것이 어떻게 쓰일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책 속 문장은 문장 자체보다, 그 문장을 좋아하는 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조금 흔들릴 때마다 세 문장 중 하나를 떠올려봤습니다.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우면 작은 행복감을 느끼려고 아내와 산책하며 대화를 나누고, 여러 선택지 중에서 어떤 것을 골라야 할지 몰라서 망설인 때는 무엇을 포기하는 편이 괜찮은지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선택을 밀고 나가는 과정에서 크나큰 성과가 없더라도 이후의 삶에 어떻게 작용할지 예측할 수 없으므로 최선을 다하자라는 마음가짐을 얻게 되었습니다.
거창한 인생철학은 아니지만, 몇 줄이 방향을 잃고 망망대해를 떠다닐 때 나침반처럼 '이런 길로 가보자'라며 조금씩 고개를 돌려주었습니다.
마흔이라는 중년이 되고 독서를 하면서 크게 전환을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회사 생활은 조금씩 안정되어 가는데, 마음 한편에서는 이대로 10년이 더 지나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잇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시기에 읽었던 책이 김수현 작가의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였습니다.
솔직히 제목이 조금 유치하다고 생각했고, 너무 뻔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나답게 살면 좋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생각이 곧 뒤따라왔습니다. 그러면서도 책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러다 한 문장을 읽게 되었습니다.
남에게 괜찮게 보이는 대신 나 마음이 덜 상처받는 삶을 선택하는 것도 충분히 괜찮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자라는 극단적인 생각까지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앞으로의 선택에서는 남들이 보기 좋은 길 말고 내가 견딜 수 있는 길을 기준에 올려놓자라는 결심이 생겼습니다. 책은 그렇게 인생을 완전히 뒤집진 않아도 어느 정도 방향 수정은 괜찮지 않을까라는 용기를 건네주곤 했습니다.
지금 독서가 내 인생 방향에 영향을 주는 일
이제는 인생의 큰 방향을 책에서 얻으려고 하진 않습니다. 어떤 직업을 선택해야 하는지, 어디로 이사 가면 좋을지, 이런 질문에 책이 정답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 대신, 책이 해주는 역할은 지원 사격과 같습니다.
'지금의 나'를 확인하게 해 줍니다. 요즘 끌리는 책의 주제를 보면 제가 무엇이 고민인지 알 수 있습니다. 관계 책만 계속 찾고 있다면 마음 한쪽에서 대인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어떻게 풀고, 그 과정에서 생긴 불안이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알고 싶다는 신호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내 선택 기준을 점검하게 합니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책을 읽다 보면, 내가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지 드러납니다. 돈보다 시간인가, 시간보다 의미인가, 의미보다 관계인가. 이런 질문들이 문장 틈에서 고개를 듭니다.
이제 저는 누군가 "독서는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되나요?"라고 묻는다면 단순히 "문해력을 높일 수 있습니다"라고 답변하지 않습니다. 대신 "책이 길을 정해주지는 않지만 어느 길로 가든 그 선택은 내가 스스로 했다고 말할 수 있도록 방향 감각을 키워줍니다"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다.
책은 조용히 문자 하나를 내어줄 뿐이지만, 그 문장을 붙잡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순간 우리는 이미 조금 다른 방향으로 돌리기 시작하고 있을 겁니다.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기 전에 책장에서, 혹은 기억 속에서 나침반이 되어줄 한 문장을 꺼내보면 어떨까요.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 방향이 정답인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선택한 길이니 한 번쯤은 걸어가 봐도 괜찮겠다'라고 속삭여도 괜찮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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