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로 찾은 회복
심리학에서 말하는 독서치료는 말 그대로 책을 매개로 마음을 돌보는 방법입니다. 심리상담에서 실제로 책이나 시, 소설 같은 텍스트를 활용해서 우울, 불안, 자존감 저하, 상실감 등을 겪는 내담자가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하고, 다시 삶을 정리해 가도록 돕는 방식입니다.
핵심은 감정적 공명과, 감정의 안정화입니다. 감정적 공명은 책 속 문장, 인물, 상황에 마음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면서 '아. 나만 이렇게 느끼는 게 아니었구나'를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감정의 안정화는 책이라는 안전한 거리를 두고 내 감정을 간접적으로 돌아보면서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고 정리되는 과정입니다.
자신이 자주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인지했다면 그 감정과 맞닿아 있는 책을 고르고, 읽기 전에 의도를 정하고, 읽은 뒤에는 감정노트나 필사로 정리하는 과정을 '치유 독서의 3단계'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상 독서 치료를 일상 속에서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이라고 보면 됩니다.
책을 읽고 사람이 달라질 수 있을까
마음이 힘들어질수록 사실 책을 가까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마음이 혼란한 상태에서 책을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뿐더러, 치유의 글은 마음을 더 아프게 했습니다. 그래서 책이 아닌 예능처럼 웃음을 주는 유튜브를 시청했습니다. 특히 아무 생각 안 나게 해 줄 영상들, 스크롤을 내릴수록 끝이 없는 쇼츠, 게임 영상, 짧은 코미디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머리를 좀 비우고 싶다'는 말은 자주 했지만, 실제로 비워지는 건 없었습니다. 영상은 끝났는데 마음속 불편함은 영상을 보는 그 순간에만 잠시 사라졌지만,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책을 오래도록 읽어도 마음이 무너지는 날이 있습니다. 프로젝트가 어정쩡하게 끝나 버리고, 애써 해 둔 것들이 한꺼번에 무시당한 느낌이 들던 날에는 책장 앞을 스치면 이상하게도 자기 비하가 펼쳐졌습니다. 그동안 해온 독서와 글쓰기를 아무리 해도 달라지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자책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며칠을 지나 다시 마음 상태가 약간 회복되면 자동으로 책장으로 이동했습니다. 여기저기 살펴보다가 읽을만한 책이 없으면 스마트폰에서 밀리의 서재 앱을 켭니다. 밀리의 서재에서 절반 가량 읽고 덮어준 인문에세이 도서를 하나 살펴봤습니다. <조용한 회복>은 인생을 흔드는 무너짐 속에서도 다시 나를 찾아가는 길을 알려줍니다.
지금 저에게 딱 알맞은 책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날 저는 오랜만에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끄고 책상에서 오래도록 책의 문장을 읽었습니다.
예전에는 기분이 가라앉으면 일부러 더 밝은 책을 찾았습니다. 읽으면 부정적인 기분이 환기될 것 같았습니다. 성공 스토리가 가득한 자기 계발서, '할 수 있다. 잘 될 것이다'를 반복하는 문장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책을 읽고 나면 더 고립감을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책 속에서 언급한 사람들은 이렇게 잘 버티며 성공하는데 왜 나만 이런 모양일까라는 비교의 과정이 끝도 없이 펼쳐져서, 책을 덮고 더 우울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슬플 때는 자기 계발서가 아닌 잔잔히 위로를 건네는 에세이나 심리학 도서를 꺼내 들었습니다.
꺼내든 에세이는 생각보다 많이 슬픈 책이었습니다. 저자의 상실, 우울, 혼자 버티던 시간들을 솔직하게 적어 내려간 문장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읽다가 이런 문장에 하이라이트 표시를 해두었습니다.
진짜 회복은 항상 '말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침묵 속에 묻힌 상처를 말로 풀어놓을 때, 우리는 조금씩 치유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죄책감을 말하고 드러내는 것'의 힘이다.
<조용한 회복> 中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저는 한참 동안 머물러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더 이상 밝은 표정을 지을 힘이 없었고, 그날은 그냥 너무 힘들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슬플 때는 억지로 나를 끌어올리는 책 보다 내 슬픔과 비슷한 온도의 책이 훨씬 더 큰 위로가 되는 걸 책을 읽고 알았습니다. 책 속의 슬픔이 내가 가진 슬픔을 더 아프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슬퍼해도 괜찮아'라는 허락을 대신해 주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꼭 한 가지는 위로받고 싶다
책을 읽기 전에 의도를 정하고 읽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 책을 펼치기 전에 노트 한 구석에 짧은 문장을 하나 써보면 어떨까요.
'지금 내가 제일 힘든 감정은 무엇인가?'
'이 책에서 나는 어떤 위로를 받고 싶은가?'
<조용한 회복>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성공담이 아닌, 실패와 좌절을 담담하게 적어놓은 인문에세이를 읽으면서 저자의 지난한 과거의 이야기와 다시 일어나는 장면들을 따라가다 보니 완벽하게 회복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오늘 하루만 잘 버텨낸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고 나서 중요하게 생각한 문장이나 내용을 기억하고 싶어서 정리했었다면 의도를 적어 놓고 읽어보니까 책을 읽고 어떤 위로를 받았는지 물어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책은 기대한 것보다 더 많이 위로가 되기도 했고, 어떤 책은 그저 '아 이건 지금의 내 상태와 조금 거리가 있네'라는 걸 확인하는 정도로 끝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 자체가 이미 저를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었습니다.
무작정 읽기에서 감정에 목적을 두고 읽기로 넘어가는 순간, 책은 더 이상 시간을 때우는 도구가 아니라 내 감정을 다루는 구체적인 도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인생의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자신이 겪는 아픔을 온전히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아닐까.
<조용한 회복> 中
이러한 문장이 주는 위로는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온기를 더해줍니다. 이런 온기는 어딘가에 기록해두지 않으면 금방 사라져 버립니다. 예전에는 책을 읽고 서평은 대부분 실용서적이었지만, 에세이나 소설도 어떤 내용에 내가 위로를 받았는지 적어보면 회복의 속도는 조금씩 빨라집니다.
"이 책은 내 마음의 ___한 부분을 어루만져 주었다"라는 빈칸을 채우는 습관은 독서를 통해 진짜 위로받고 싶었던 지점을 찾게 해 줍니다. 줄거리나 문장의 아름다움보다 더 중요한 건 내 마음의 어떤 부분을 위로해 줬는가입니다. 그것은 문장을 써 봐야 알게 됩니다.
책을 덮고 써도 괜찮지만 어떤 형식에 구애받지 않아도 됩니다. 문장을 읽고 책의 빈 공란에 자신의 느낌을 적어도 충분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감정선을 건드린 문장을 마주하고 상처를 말로 풀어내다 보면 책이 끝나도 그 책이 남겨준 것이 분명히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책을 고르는 나만의 기준이 생긴다는 것
치유 독서를 어느 정도 반복하다 보니, 감정별로 자연스럽게 손이 가는 책의 종류가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경우는 이렇습니다.
상실감이 크면 상처를 숨기지 않는 에세이가 적합했습니다. 누군가를 떠나보냈거나, 관계가 끝났거나, 오랫동안 붙들고 있던 것을 놓쳐버린 날에는 누군가의 상실 경험을 솔직하게 담은 에세이를 읽으며 나만 이렇게 오래 끌어안고 있는 게 아니구나를 느낍니다.
책의 문장을 읽다 보면 '아.. 저자는 이렇게 아팠는데 이런 식으로 회복해 나갔구나'를 이해하는 동시에 '그럼. 내 아픔도 이 정도면 어느 정도 회복이 되겠구나'하는 허락을 받는 느낌이 듭니다.
분노가 치밀 때는 감정을 객관화해 주는 심리학이나 뇌과학 책을 읽습니다. 회사에서 억울한 일을 당했거나, 가족과 마음이 맞지 않아서 화가 날 때는 소설보다 심리학 도서가 더 도움이 될 때가 많습니다. 감정의 구조, 분노가 발생하는 원리와 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설명해 주는 뇌과학 책을 읽다 보면 '아 내가 이상한 사람이어서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 반응이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렇게 한 번 객관화를 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그럼 나는 이 분노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라는 조금 생산적인 질문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해결책은 사람마다 다르고, 환경의 변수가 작용하므로 본인 스스로 생각해 보고 적절한 해결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불안이 심한 경우에는 현실 기반의 회복 스토리가 적당합니다. 미래가 너무 불확실하게 느껴져서 불안도가 올라가면 내가 뭘 해도 소용없을 것 같은 생각에 잠식됩니다. 이럴 때는 마음 챙김 명상과 관련된 책을 읽고, 실제로 불안을 겪은 사람이 어떻게 버텨냈는지 적어놓은 이야기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론만 잔뜩 담겨 있는 책보다는 '나도 이렇게 힘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조금씩 나아졌다'라는 구체적인 경험담이 더 안정감을 줍니다. 그 힌트를 바탕으로 나에게 어떻게 적용할지 생각하는 힘을 길러줍니다.
무기력할 때는 조용한 산문이나 느린 책이 도움이 됩니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자기 계발서 제목만 봐도 부담스러울 때는 차분하게 풍경을 묘사하는 산문, 걷기, 계절, 사소한 일상을 담담히 적은 책을 펼칩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도, 지금 이대로 존재하는 것만으로 괜찮다'는 느낌이 문장 사이사이에 배어 있는 책들입니다. 이렇게 감정별로 책과 조금씩 짝이 맞춰지고 나니까 마음이 무너진 날에 유튜브 쇼츠에 빠져드는 대신 지금 내 감정에 어떤 책이 적합할지 먼저 묻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성인은 1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이 거의 50%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굳이 책을 읽어야 하느냐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영상이 훨씬 쉽고 접근하기도 편리하며, 요약된 내용을 인터넷에서 읽으면 충분하지 않냐라고도 합니다.
물론 간단한 지식을 습득하려면 그런 방법도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감정이라는 자신의 문제점은 단지 하나만의 문제로 발생하지 않습니다. 유전자의 영향, 주변 환경의 영향의 여러 요소가 발현하여 나타난 결과입니다. 그러한 주변 환경은 어떤 요약으로 단숨에 해결책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을 공들여 책을 읽으며 스스로 사색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독서가 치유의 결과를 가져오는 길입니다.
치유 독서라는 말은 어딘가 전문가의 영역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사실은 집 안의 가장 조용한 자리에서 스탠드 불 하나 켜놓고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을 겁니다.
감정이 복잡해서 누군가에게 말을 꺼내기 어려운 날, 말 대신 책을 먼저 열어보는 습관과 책을 읽는 과정에서 자신의 상황과 느낌을 적어보는 습관이 더해져 우리는 조금씩 감정을 회복시키는 독서를 몸으로 익혀 가게 될 겁니다.
오늘 하루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면 잠들기 전에 한 꼭지만일도 나를 안아주는 문장이 들어 있을 것 같은 책을 펼쳐 보면 좋겠습니다. 책을 읽기 어려운 분들도 이번 기회에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검색하고 목차를 한 번 살펴보세요. 그 책이 여러분의 치유의 도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mindunf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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