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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로운달빛 Jul 23. 2023

#3. 그의 뱃살에 대한 고찰


사진: Unsplash의Hans-Jurgen Mager

언제부터인가 남편의 큼지막한 티셔츠 위로 낯익은 것 하나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앗, 저것은? 어디서 많이 봤던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아하, 내가 어릴 적 우리 아빠 배에서 보던 바로 그것이로군. 탐스러운 D라인. 나는 밥을 먹으면 아랫배만 볼록 나오는데, 명치 끝부터 단전 아래까지 유려하게 이어지는 그의 둥그레 한 라인은 참 신기할 따름이다. 우리의 옛 선조들이 이러한 모양의 기둥을 보고 ‘배흘림 기둥’ 이라 명명하였는데, 실로 무릎을 탁 치는 작명 센스이다. 


어어? 이게 언제 이렇게 됐지? 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의 배는 나의 눈길을 피해 시나브로 전진을 하고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매일 조금씩 조금씩 자라고 있는데, 평소에는 그것을 잘 인지하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보면 훅 커버린 것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나는 그녀석의 정체를 확인하고자 검지손가락으로 그의 배를 쿡 찔러본다. 쑤욱- 들어가는 것이 꽤 깊이감이 있다. 그와 동시에 남편은 이게 무슨 짓이냐며 황급히 몸을 돌려 배를 가려보지만 때는 늦었다. 이미 내 손가락은 몰랑몰랑하고 푹신한 감촉을 충분히 아로 새긴 후였다. 




 그와 처음 연애를 시작했을 무렵, 그의 179cm 키에, 몸무게 70kg이라는 아주 호리호리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어렴풋이 복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원래는 없었으나 나도 모르게 희미한 과거를 미화한 것일 수도 있지만 굳이 확인사살을 하지는 않겠다.) 그랬던 그는 연애 포함 14년이라는 시간을 나와 함께 하면서, 이제 어디 가서 풍채로는 뒤지지 않을 몸매를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저녁 식사를 하면서 “여보, 오늘은 진짜 야식 먹지 말자.” “진짜. 꼭 그러자.”라고 지켜지지 않을 약속을 위해 새끼 손가락을 걸곤 했다. 새끼 손가락의 감촉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우리는 늦은 밤 넷플릭스에서 <슬기로운 산촌생활>의 멤버들이 끓여 먹는 라면 냄새가 실제로 코 끝에 맴도는 듯한 환상을 체험하고 만다. 우리는 서로 ‘니가 먼저 야식 먹자고 이야기해.’라며 슬금슬금 눈빛을 보낸다. (일말의 양심이 있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애매하다.) 


어쨌거나 어제는 그가, 오늘은 내가, 내일은 그가, “야식 콜?”을 외치며 주방으로 달려간다. “우리가 오늘 저녁을 너무 일찍 먹었지?” “그럼 그럼, 지금 배 고픈 건 당연해.”라며 서로의 행위에 당위성을 한껏 부여해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 때 주의할 점은, 이 대사를 내뱉으며 서로의 눈을 바라보게 되면 너무 민망하고 웃겨서 빵 터지기 십상이기 때문에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고 라면 끓이기 미션을 완수해야 한다. (이렇게 쓰고 보니 그가 지금의 풍채를 갖게 된 데에는 나의 책임이 정말 막중하다.)




 나는 그의 뱃살을 확인한 이후 ‘살을 좀 빼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을 하곤 한다. 내장 지방이 성인병의 주범이라는데… 순전히 그의 건강이 걱정되어 다이어트를 권하곤 하지만 사실 속으로는 ‘저 뱃살이 없어지면 너무 아쉽겠는걸.’하고 입맛을 쩝쩝다신다. 


나는 그의 뱃살을 만지면서 왜 아이들이 슬라임이나 클레이 같은 것을 만지며 촉감 놀이를 하는지 120% 이해하게 되었다. 그의 뱃살은 탱글탱글하면서도 몰랑몰랑한 감촉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촉촉하면서도 커버력이 좋은 파운데이션과 같이, 양립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촉감이 공존하며 가져다주는 쾌감 같은 것이 있달까. 가끔 그의 배에 입을 갖다 대고 날숨을 내쉬면 부르르 떨리는데,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른다. 처음에는 민망해하던 남편도 이제는 자신의 배를 양 손 엄지와 중지로 둥글게 감싸며 ‘이것 봐라! 사과다! 아니다 배다!!’라면서 나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의 뱃살을 사랑하는 것은 비단 나 뿐만이 아니다. 우리 집에 서식중인 두 마리의 강아지들은 나 이상으로 아빠곰의 배를 좋아한다. (왜 아빠는 곰인데 애들은 강아지인지 묻지 말라…) 나 못지 않게 장난기가 많은 첫째 강아지는 다양한 방법으로 아빠의 배를 가지고 놀다가 아빠에게 헤드락을 당하기 일쑤이다. 표현력이 뛰어난 첫째 강아지는 ‘탱글탱글 하면서도 몰랑몰랑하다.’는 느낌을 한 단어로 표현해냈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엄마 배는 찰방찰방(?)한데 아빠 배는 딩딩(?)하단다. 딩딩하다는 단어는 처음 들어보았지만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정말 탱탱과 몰랑의 느낌을 모두 가지고 있는 기가 맥히는 의태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어의 위대함에 새삼 놀라는 순간이었다.) 


 둘째 강아지는 아빠곰이 소파에 대자로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의 배위에 올라타 부비적댄다. 가끔은 부비적대다가 둘이 함께 잠이 들기도 하는데, 남편이 숨을 쉴 때마다 배가 들썩거리며 자동으로 흔들 침대를 만들어준다. 내가 5킬로만 덜 나갔어도 시도해 볼 텐데 아쉽기 그지없다. 남편과 아이가 한 몸이 되어 쌔근쌔근 졸고 있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노라면 내 마음도 괜히 낭창낭창해진다. 




 결혼 전, 어렸을 때는 막연히 그런 다짐을 했더랬다. 나는 결혼 후에도 철저한 자기 관리를 통해 남편에게 절대 배 나온 모습은 보여주지 말아야지, 라고. 나잇살이 찌고 여기저기 퍼져 있는 모습은 나 스스로도 별로인데, 남편은 오죽할까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혼 11년차가 된 지금은 그런 나의 생각이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이었는지 안다. 


나는 진심으로 그의 툭 튀어나온 뱃살까지 사랑스럽고, 그 역시 내가 아무리 배가 나오고 얼굴이 주름으로 뒤덮여도 진심으로 나를 사랑해 줄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는 서로에게 서로의 가장 추한 모습, 가장 밑바닥인 모습, 가장 날 것의 모습을 모두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많이 늦었다. 먼저 잠들어 있는 그의 볼록 튀어나온 배를 베개 삼아 어서 잠자리에 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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