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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로운달빛 Sep 13. 2023

질문 31번. 도플갱어

<글쓰기 좋은 질문 642 중 31>

글쓰기 질문 31: 친구가 전화를 해서는 당신이 어제 경찰차 안에 있는 걸 봤다고 한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띵동! 띵동! 띵동!'

'쾅쾅쾅!'

"야! 김은영! 문 열어!!"


초인종 소리와 현관문을 세차게 걷어 차는 소리, 누군가 고함치는 소리가 서라운드로 울려 퍼졌다. 세상모르고 자고 있던 나는 그 소리에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있는 힘을 다해 눈꺼풀에 힘을 줘 봤지만, 도저히 눈이 떠지지 않는다.


"우욱."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면서, 그와 동시에 깨질듯한 두통과 울렁거림이 동시에 밀려왔다. 나는 문 밖에서 잔뜩 화가 나 있는 누군가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전할 새도 없이 곧장 화장실로 뛰쳐 들어가 몽땅 게워내기 시작했다. 분명 전날 먹은 것들인데, 다음 날 변기통에서 마주하니 기분이 몹시 더럽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묻은 토사물을 옷소매로 쓱 닦았다. 이런 젠장, 잠옷으로 갈아입지도 않고 잠들었던 모양이다. 지훈이 큰맘 먹고 사준 실크 원피스인데, 망했다.


그래도 뭐, 우리 집이 조금만 더 넓었더라면 화장실에 도착하기 전에 맨바닥에 일을 치렀을 것이다. 새삼 좁은 나의 원룸에도 이런 장점이 있구나 싶네.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아직 술이 덜 깬 것 같다. 밖에서는 계속 초인종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고함소리가 차례로 울려 퍼진다. 조금만 더 지체했다가는 옆집에서 민원이 들어올 것이다. 


그런데, 쟤가 왜 지금 문 밖에 있는 거지?


"뭐야? 너 어떻게 왔어?"


나는 거의 기어가다시피 현관문으로 가서 문을 열고는 곧장 바닥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그의 시선에서는 내가 몹시 지저분하고 처량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갑자기 찾아온 남자친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매무새를 가다듬을 기력 따윈 없다.


"김은영! 너 진짜... 죽을래?"


지훈이 시뻘게진 얼굴로 소리치더니, 현관 입구에 쪼그려 앉아 있는 나를 와락 껴안았다. 방금 화장실에서 신나게 게우고 나왔는데... 시큼한 토사물 냄새가 그에게 풍길 것 같아 여간 신경이 쓰인다. 그나저나, 나한테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거지? 그리고 지금 부산에 있어야 할 애가 서울에 왜 온 거야?


"너 내가 전화를 몇 통이나 했는 줄 알아!?"


지훈은 거의 울먹거리다시피 하며 말했다. 나는 그제야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11시 20분. 바깥이 밝은 것을 보니 다행히 밤은 아닌 모양이다. 지훈이 어제부터 나와 연락이 되지 않아 걱정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나는 다시 뒷걸음질로 방바닥을 기어, 널브러져 있는 핸드폰을 주워 들었다. 지훈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50통이 넘게 와 있었다. 


"아... 미안해. 나 어제 오랜만에 너무 많이 마셨나 봐. 진짜 미안......"


나는 이미 전과가 있는 몸이다. 변명을 위해 머리를 굴리지도 않고, 곧장 손바닥을 모아 싹싹 빌었다. 지훈과는 2년째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장거리 연애 중이다. 2년이라는 연애 기간 동안 딱 한번, 술 마시다가 연락이 끊긴 적이 있었는데 지훈이 노발대발하여 다시는 나 없는 데에서 술 마시지 말라고 경고를 한 상태였다. 그러다가 내가 꼬박꼬박 연락도 잘하고, 눈치도 살살 보면서 알랑방귀를 뀌자 지훈도 못 이기는 척, 친구들에 한 해서 술자리를 허락해 준 상태였다. 그런데, 어제는 내가 정말 정신이 나갔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내가 전화 안 받아서 부산에서 여기까지 온 거야? 미안해 지훈아, 진짜 내가 미쳤다 정말."

"너, 어제 대학교 친구들이랑 있는다고 하지 않았어? 부산엔 왜 온 거야?"


지훈이 갑자기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던졌다. 갑자기 웬 부산?


"무슨 소리야? 나 어제 학교 앞 술집에 계속 있었는데, 내가 부산을 왜 가?"

"너 어제 분명히 나 봤잖아!"

"어디서?"

"경찰차에서!"

"뭐?"


술집도 아니도, 부산역도 아니고, 갑자기 뜬금없이 경찰차라니. 다른 여자랑 헷갈린 것이 틀림없다. 아니, 근데 여자친구 얼굴도 못 알아보다니 좀 너무한 거 아닌가?


"딴 여자랑 헷갈렸겠지. 무슨 경찰차야. 게다가 서울도 아니고 부산에서? 갑자기?"

"너 분명 나랑 눈 마주쳤잖아. 나한테 손도 흔들었잖아! 입모양으로 괜찮다고 말도 했었잖아!!"


지훈의 눈이 거의 반쯤 돌아 있었다. 평소에 이렇게 흥분하는 애가 아닌데, 적잖이 놀랬던 것 같다. 나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 너 이 옷! 너 어제 이 옷 입고 경찰차에 있었어. 이거 내가 사준 옷이잖아! 내가 너 얼굴도 못 알아볼 것 같아? 내가 너무 놀라서 그때부터 너한테 전화를 미친 듯이 했는데 전화도 안 받고." 




그제야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순간 머리가 멍해져서 지훈의 목소리가 희미해졌다. 지훈은 부산에서 경찰차 안에 있던 나를 발견하고 인근 경찰서를 다 뒤지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가 결국 못 찾고 혹시나 해서 서울 집까지 와 본 거라고 했다. 그가 '내가 여기까지 오면서 무슨 오만가지 생각을 했는 줄 알아!?'라고 소리쳤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지지직 거리며 허공으로 울려 퍼졌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나와 똑같은 사람을 만난 것이.


몇 년 전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예전 회사 선배가 느닷없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 이직 이야기했던 거 고민 끝났냐고 물었다. 나는 그런 일이 없었다.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그는 며칠 전에 나랑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직 이야기가 나와서 좋은 자리가 있으니 고민해 보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과 착각한 것이 아니냐며 수십 번을 물었지만, 아니라고 했다. 선배는 오히려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했었다. 그러고 보니, 선배가 나를 우연히 만났다고 했던 날도 내가 술을 왕창 마시고 뻗은 날이었다.


기분 나쁜 경험이었지만, 한 동안 같은 일이 없었기에 잊어버리고 지냈던 일이었다. 

그런데, 같은 일이 또 일어났다.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목소리를 하고, 똑같이 살아가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

그녀는 누구일까? 도대체 왜?




<글쓰기 좋은 질문 642> 책 중에서 마음이 가는 주제를 골라 글을 씁니다. 글의 형식이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만, 엉뚱한 상상하기를 좋아하는 저의 성향상 아무래도 소설 형식의 글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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