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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주영 Oct 20. 2024

[소설] 23장. 재구성

[판타지 장편 소설] 댓플레이스 (That Place)

[한림의 사무실]


“언제 눈치 채고 찾아오나 기다렸수다.”

 한림이 희주에게 차를 권하며 말했다. 한림은 비서에게 이제 그만 나가보라며, 급한 일 아니면 들어오지 말라는 당부도 덧붙였다. 


한림의 사무실은 서울 시내와 한강이 한 눈에 보이는 초고층 빌딩에 위치해 있었다. 희주는 응접실의 소파가 자신의 집 크기 보다도 큰 호화스러운 사무실에 발을 들여 놓자 순간적으로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엠마의 집도 내로라하는 건설사에서 지은 최고급 빌라였는데, 그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급스러움과 정갈함이 흘러 넘치는 공간이었다. 


사후 세계에서는 똑 같은 문지기 복장을 하고 말을 섞었기에 그가 성공한 사업가이자 투자자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크게 와닿지 않았었는데, 이렇게 인간 세상에서 그가 지내는 환경을 두 눈으로 확인하니 엄청난 거리감이 느껴졌다.


희주가 사무실을 훑어보다가 한림의 책상 위에 시선이 멈췄다. 그 곳에 사진이 놓여있었다. 한림과 현승이 함께 ‘히말라야 로체샤르 원정대 발대식’이라고 쓰여진 플래카드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미 다 알고 계셨는데 왜 거짓말을…….”

 희주가 긴장감을 애써 감추고 한림에게 물었다.


 “어쩔 수 없었수다. 약속은 지켜야했거든. 자네가 워낙 눈치도 빠르고 센스있는 사람이라 언젠가 스스로 깨달을 수도 있겠다, 생각만 하고 있었다우.”


“현승…… 씨의 부탁이었나요?”

 입 밖으로 현승의 이름을 내뱉자 입술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한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된 건지 끝까지 말씀 안해주실 거예요?”


 “흠, 자네가 이미 눈치 채고 나를 먼저 찾아온 것이니, 내가 진실을 말해줘도 나중에 현승이 날 책망하진 않겠지? 허허.”


 초조한 희주와는 다르게 한림이 늘 그렇듯, 일관되게 여유로운 태도로 말했다. 사실, 현승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희주 못지 않게, 한림도 현승의 이야기를 희주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현승의 부탁 때문에 그러지 못 했을 뿐.


“자, 그럼 어디서부터 다시 이야기를 해야 하나…… 그래, 내가 현승이 바닥에 깨 버린 망각 주스통의 조각을 주워들었던 부분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구먼.”




[망각 주스 제조실]


“주의, 망각…… 효소?”

한림은 자기도 모르게 망각 주스 통의 파편에 새겨진 글귀를 읽고 말았다. 


그 소리에 잠시 가면을 벗고 이마에 흐른 땀을 닦고 있던 관리자 문지기가 깜짝 놀라 한림을 바라보았다.  


“서, 선생님…….”

망각 주스를 만들던 관리자 문지기가 말했다. 그의 손에 쥐고 있던 만들다 만 주스 통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당신…… 현승, 이현승 맞지?”


한림은 단번에 문지기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는 한림이 죽기 전, 인간 세상에서 후원하고 있던 산악회의 대장이었던 현승이었다. 그가 히말라야 로체샤르를 등반하다가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선생님, 선생님이 어떻게 여기에…….”

현승이 말을 끝맺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그는 인간 세상에서 자신의 후원자였던 한림을 갑작스레 맞닥뜨린 놀라움과 더불어, 자신이 몰래 망각 주스를 제조하다가 들켰다는 사실까지 맞물려 이미 판단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현승, 역시 당신 맞구먼! 그리고 이 망각 효소는……”

한림이 현승을 만난 반가움을 뒤로 한 채, 손에 쥔 파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일부러 바닥에 던져 버린 것 일테고.”

한림의 말에 현승이 ‘흡!’하며 짧고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한림이 어디서부터 지켜봤는지는 모르겠지만, 망각 효소를 일부러 바닥에 던져 버리는 장면을 목격한 것만은 분명했다. 현승의 머릿속에 변명거리들이 수십가지 스쳐 지나갔지만, 어느 하나 그럴싸한 것은 없어 보였다. 


당황한 현승이 가까스로 변명거리를 골라 말하려던 순간, 한림이 몸을 돌려 주스 제조실 문 쪽으로 향하더니 안 쪽에서 문을 딸깍, 잠궈버렸다.


“아무래도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현승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닥에 철푸덕 주저 앉았다. 그는 한 동안 입을 열지 못했고, 한림은 그런 그를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고요한 공간 속에서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서로의 귓가를 어색하게 간지럽히고 있었다.


“예전에 제가 아내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거 혹시 기억하시나요?”

기나긴 침묵을 깨고 현승이 입을 열었다.


“기억하다마다. 자네가 부인을 끔찍이 생각하는 것을 내 익히 알고 있었지. 아내가 산에 오르는 것을 불안해한다고 하지 않았나.”


“기억하시는 군요.”


“당연하지. 자네가 아내의 불안함이 이해가 간다고, 아내를 너무 사랑해서 산에 오르는 것을 그만둬야 할지 고민이 많다고 했었지.”

한림이 현승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 때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다독여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감사 인사는 그 때 충분히 받았어. 그런데, 그 이야기를 왜 지금 다시 하는겐가?”


“제 아내가.”

현승이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키며 말에 뜸을 들였다.


“희주입니다. 이미 아시죠?”


“희주? 지금 나랑 같이 문지기로 일하고 있는 한희주?”


“맞습니다.”

현승에 말에 한림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고보니 희주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의 남편이 산을 타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희주의 남편이 현승일 줄이야. 


“희주도 알고 있나? 자네의 정체 말일세.”


“물론 모릅니다. 저희 정체가 들통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잖아요. 징계는 둘째 치더라도, 제 정체를 알아봤자 희주에게 좋을 게 없어요.”


현승의 말에 한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사후 세계 생활을 오래한 것은 아니었지만, 인간 세상에서 알던 사람을 사후 세계에서 마주치는 것은 어떠한 형태든 간에 아주 불편한 일이었다. 


“선생님,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는 극비 중에 극비예요. 관리자 문지기들 중에서도 일부만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저도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건인지 갈팡질팡한 상태라서 선생님께 조언을 구하기 위해 털어 놓는 겁니다.”


현승이 고개를 떨구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현승의 이야기는 실로 놀라웠다. 그는 이미 죽음의 단계로 넘어온 영혼들 중, 심사에 세 번 이상 탈락하고, 신체 상태가 아직 회복 가능한 정도라면 다시 인간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말했다. 인간 세상에서는 극도로 발달된 의학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이런 일들을 보통 ‘기적’이라고 이야기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현승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한림은 뭔가 마실 거리라도 하나 있었다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음료를 마시는 척하며 흥분한 얼굴을 가릴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아무것도 없이 평정심을 유지하는 척하는 것이 여간 쉽지 않았다. 이미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인간 세상으로 되돌아갈 기회가 생길 수도 있다니.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희주는 지금 코마상태에요. 의식은 없지만, 아직까지 신체 상태는 괜찮죠. 게다가 두번째 재심사에 탈락한 상태고요. 만약, 세번째 재심사까지 탈락한다면 인간세상으로 되돌아갈 기회를 얻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인간세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과연 그녀에게 좋은 일인지는 판단이 서질 않았죠.”

현승은 여전히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듯, 두 손으로 마른 세수를 하며 말했다.


“그러다가, 희주를 이 곳의 기억을 간직한 채로 인간 세상에 되돌려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뭐라고?”


“그래서 망각 주스에 넣어야 할 망각 효소를 빼 버린 겁니다…….”


현승은 망각 효소를 빼 버렸다는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흐린 채 고개를 깊게 떨구었다. 한림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니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는 두 눈을 감고 한 손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에 뒷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고를 저지른 이 무모한 문지기에게 무슨 조언을 해줘야 할까.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사후 세계의 기억을 가진 채로 다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겠지. 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주변에서 미쳤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걸세. 하지만, 나는 당신의 심정을 십분 이해해. 그리고 희주라면,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을거야.”


한림이 눈을 감은 채 천천히 말을 이었다. 현승을 위로하기 위한 빈말은 아니었다. 희주를 머릿속에 떠올리니 그런 확신이 들었을 뿐이다.


“내가 희주를 알게 된 기간은 짧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희주의 강인함을 느낄 수 있었지. 그녀는 아주 단단한 여자야. 하지만, <댓플레이스> 입장 심사에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은 찾지 못했어. 나도 마찬가지지만 말이야. 이 곳의 기억을 가지고 인간 세상에 되돌아간다면, 희주는 아마 분명 해답을 찾아낼거야. 수많은 영혼들을 심사하며 힌트를 찾았을걸세. 나는 오랜 시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왔네. 사람보는 내 눈은…….”


“120% 정확하시죠.”


한림의 말에 현승이 맞장구를 치자 한림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에 현승의 마음이 노곤하게 녹아내렸다. 망각 효소를 바닥에 던져 버리던 순간까지도 현승은 자신이 옳은 판단을 한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희주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그녀의 인생을 마음대로 꼬아 버리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한림의 조언을 듣고 나니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 


“고맙습니다. 살아 있을 때도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주셨는데, 죽어서까지 이렇게 은혜를 입네요.”


“현승씨, 난 투자자야.”


“네? 그거야 잘 알고 있죠.”

맥락을 끊는 갑작스러운 한림의 말에 현승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나는 그냥 투자하거나 후원하지 않아. 반드시 투자 수익률을 고려하지. 만약, 내가 기대한 수익률이 나오지 않는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수익률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만들어버리지.”

한림이 현승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방금 전까지 따뜻한 조언을 해주던 그가 갑자기 돌변하자 현승은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나는 오늘 내가 목격한 일을 관리자 문지기 회의체에 신고해 버릴 수도 있네.”

한림의 말에 현승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또는, 오늘 일을 조용히 묻고 내 입을 닫는 투자를 하는 대신에 뭔가를 하나 얻어 가고 싶은데 말일세.”


현승은 한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지 빠르게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어리숙한 라비라면 모를까, 산전수전 다 겪은 한림을 상대로 그의 생각을 읽고 밀고 당기기를 시도해봤자, 결과가 이미 정해진 게임을 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나에게도 망각 효소가 빠진 망각 주스를 하나 주게. 아, 망각 효소가 빠졌는데 망각 주스라도 부르는 것도 이상하군. 우리끼리만 알 수 있는 무슨 이름을 만들든지 해야겠어.”


한림이 망각 효소를 뺀 주스를 달라는 말을 마치 ‘목 마른데 물 한잔만 좀 줘.’ 라고 하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툭 뱉었다.


“그, 그건!”

현승은 반사적으로 “그건 안됩니다!”라고 말하려다가 자신은 그럴 말을 할 자격도, 상황도 안된다는 것을 깨닫고 곧 입을 다물었다. 


현승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림의 죽음의 시계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한림의 죽음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한림의 신체 상태가 어떤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통계로 봤을 때, 이렇게 긴 기간동안 신체가 온전하게 보전된 상태는 매우 드물었다. 한림이 인간 세상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희박할 것이다. 현승은 일단 이 상황을 모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좋습니다. 그 전에, 선생님의 신체 상태를 확인해 봐야해요. 돌아갈 수 있는 신체 상태여야만, 인간 세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조건이 되니까요. 만약 어쩔 수 없는 상태라면, 오늘 일은 못 본 것으로 입을 닫겠다고 약속해 주시죠. 만약 그렇지 않다면…….”


현승이 생각나는대로 말을 내뱉다가 이내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한림을 협박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기껏해야 재심사 순번을 맨 뒤로 미뤄버리겠다는 것 정도인데, 그건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 치졸했다.


“하하하핫! 자네는 협상, 아니 협박하는 법을 좀 더 배워야 할 것 같군. 내 약속하지. 어쩔 수 없는 상태라면 이번 일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기로.”


한림이 주스 제조실 밖으로 웃음소리가 들릴 정도로 크게 웃으며 말했다. 현승은 찝찝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그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인간 세상 모니터링을 담당하는 라비를 찾아갈 수 밖에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라비를 찾아간 현승은 일전에 그가 전 부인의 집을 몰래 염탐하고 있던 것을 빌미로 한림의 신체 상태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 아니 협박했다. 그는 이미 끝난 거래가 아니었냐며 방방 뛰었지만, 이미 현승에게 약점을 잡힌 상태에서 그 역시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라비는 적을 가까이 두라는 격언에 따라 이를 바득바득 갈며 한림의 신체 상태를 모니터링 해주었다. 


한림은 세계적인 부자 답게 최첨단 시설이 갖추어진 병실에서 가느다란 생명줄을 부여잡은 채 멀쩡한 사지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현승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그의 신체 상태는 충분히 되돌아 갈 만했다. 그는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는 말로 라비를 안심시키고는 모니터링실을 나왔다. 현승은 한 동안 복도에 서서 깊은 한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그리고 곧 결심한듯, 다시 망각 주스 제조실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났다. 현승은 다른 문지기들의 눈을 피해 한림의 주머니 속으로 편지 한 장을 몰래 넣었다. 한림은 혹시나 일과 중에 누군가에게 주머니 속에 든 편지의 정체를 들킬까 봐 하루 종일 조마조마했다. 그는 개인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현승의 편지를 펼쳤다.


선생님, 먼저 이 편지를 읽은 직후 반드시 파쇄해서 흔적을 없애 주십시오. 더불어 이번 일은 희주에게는 끝까지 비밀로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제가 벌인 일이라는 걸 희주가 알게 되면 아마 많이 힘들어 할 거예요.

고민 끝에 망각 효소를 뺀 주스를 하나 더 만들어 두었습니다. 모니터링 결과 선생님의 신체는 아직 병원에서 최첨단 생명 연장 장치들을 달고 무사히 누워 있었습니다. 앞으로 한 달 뒤에 희주의 세 번째 심사가 진행됩니다. 선생님의 심사 일정도 같은 날로 변경해 두었습니다. 만약 두 사람이 세 번째 심사에 탈락하게 된다면 인간 세상으로 되돌아 갈 기회를 얻게 될 겁니다. 그 때 이 망각 주스를 드리겠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보면 선생님께 망각 주스 제조실에서 있었던 일을 들켰던 게 천운이었던 것 같습니다. 두 분이 함께 인간 세상으로 되돌아 가게 된다면 제 마음이 한결 놓일 것 같습니다. 희주가 다시 돌아가 또 다시 삶의 굴곡에 넘어지더라도 선생님께서 지켜주십시오.

그리고, 마지막 부탁이 있습니다. 희주에게 이 말을 해 주시겠습니까? 물론,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처럼요.




 희주는 고개를 똑바로 든 채 한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희주는 복받치는 감정을 추스리기 위해 애썼지만, 결국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눈물을 두 손으로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현승씨를 못 알아봤어요……. 어떻게 그 사람을 못 알아볼 수가……. 그것도 모르고 저는…….”

 희주가 가쁜 숨을 내쉬며 말인지 울음인지 모를 것을 쏟아냈다. 신나게 이야기를 이어가던 한림이 이내 말을 멈추고 그녀의 등을 조심스레 토닥였다.


 “왜 저한테 끝까지 숨겼을까요? 마지막 순간에라도 말해줬다면…….”


 긴 시간 잊고 있던 현승에 대한 그리움이 한 순간에 몰려 들어와 희주는 견딜 수가 없었다. 사고로 그를 잃었을 때의 충격과 절망감,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산에 올랐던 그에 대한 원망, 그 원망을 뛰어넘는 심장을 옥죄는 슬픔과 그리움,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따뜻한 눈빛과 다정한 손길, 함께 마주 보고 웃었던 기억들이 무방비로 그녀에게 달려 들었다. 남편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생생한 기억들이 한데 뒤엉켜 날카로운 모양새를 하고 그녀의 폐부를 찔러대는 것만 같았다.


“현승이 당신을 위해 많은 것을 감내했다우.”

 한림은 한참 동안 숨이 넘어갈 듯 울던 희주를 오랫동안 내버려두었다가 그녀가 겨우 진정을 되찾자 조용히 말했다.


“다시 그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희주가 가까스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다시 만나겠지. 언젠가 찾아올 진짜 죽음, 그 이후에 말이우.”

한림이 ‘진짜 죽음’이라는 단어를 유독 곱씹으며 답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희주의 질문에 한림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희주가 미처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찻잔으로 시선을 옮겼다. 희주의 질문은 사실 한림이 깨어난 이후 스스로에게 숱하게 했던 것이었다. 사후 세계에서도 찾지 못했던 답을 과연 인간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찾을 수 있을까? 과연 스스로 답을 찾았다고 깨닫는 순간이 올까? 답을 찾았다 한들, 다시 <댓플레이스> 심사를 보기 위해서는 또 다시 지루하기 이를 데 없는 매일을 보내고, 다시 찾아올 죽음의 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것이 과연 정말 살아가는 것일까? 한림은 찻잔에 비춘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연노랑 찻물은 잠잠했지만, 그의 눈빛은 갈 곳을 모르고 흔들리고 있었다. 


“그저 살아가야겠지. 예전처럼.”

한림이 먼저 침묵을 깼다.


“그 답은 이제부터 각자 찾아야하지 않겠수. 내가 현승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앞으로 자네가 답을 찾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였지. 여러 번 말했지만, 나는 되받을 것 없는 투자는 하지 않는 편이지만 사후 세계의 인연은 특별하니까.”

한림이 여전에 얼굴을 무릎 사이에 파묻고 있는 희주를 일으키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희주가 퉁퉁 부은 눈으로 한림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현승이 그 편지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있수다. 자네에게 꼭 전해달라고 했다네.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고.”


“남긴…… 말이요?”


“자네가 사랑받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좋은 사람 만나서 남은 여생 행복하게만 살았으면 좋겠다고. 아직 젊지 않나.”


한림의 말에 겨우 울음을 그쳤던 희주가 다시 한번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한림은 그녀가 실컷 울도록 내버려두었다. 드넓은 한림의 사무실을 희주의 울음소리가 한동안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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