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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주영 Oct 21. 2024

[소설] 완결. 댓플레이스

[판타지 장편 소설] 댓플레이스 (That Place)

한림을 만나고 온 후 3주가 지났다. 


지난 3주 동안 희주는 다시 한번 애도의 시간을 보냈다. 8년 전 떠나 보낸 현승과 사후 세계에서 만났던 현승, 그리고 27년 전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자신과 불과 한 달 전 죽다 살아난 자신 모두를 향한 것이었다. 병원에 누워있는 동안 방치되어 있던 방안의 묵은 먼지들을 털어내고, 현승의 오래된 등산화도 정리했다. 그의 등산화를 정리하며 그 안에 함께 묻어둔 그를 향한 그리움, 먼저 떠나버린 것에 대한 원망, 고통스러웠을 죽음의 순간에 대한 연민, 오롯이 그녀의 몫이었던 슬픔들을 함께 정리했다. 모두 정리하고 보니 그에 대한 고마움만 남았다. 8년만에 진정한 애도가 마무리됐다.


희주는 오랜만에 집 밖으로 왔다. 약속했던 한 달 간의 휴가를 마치고 엠마의 매니저로 복직하는 첫 날이다. 그 동안 저축해 두었던 돈을 탈탈 털어 주인집 아주머니께 밀린 월세와 관리비를 갚았고, 비록 중고이긴 했지만 리노에게 팔과 다리를 달아주었다. 미즈키 덕에 인연을 맺은 로봇스테이션의 이치카가 도와준 덕분이다. 순식간에 통장이 가벼워졌지만, 마음도 함께 가벼워졌다. 


“희주, 좋은 아침! 잘 다녀와!”

리노가 양팔을 힘껏 흔들며 인사했다. 새로 생긴 팔이 마음에 드는지 틈만 나면 팔을 휘젓고 다닌다.


“그래, 복직하기 딱 좋은 아침이네.”

희주는 힘차게 대답한다. 그래, 리노는 늘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했었어. 그런 리노에게 늘 죽기 딱 좋은 아침이네, 라고 대답했었지. 희주는 생각했다.




“웰컴백! 한희주!”

희주가 헤어샵으로 들어오자 엠마가 헤어롤로 머리를 말다 말고 벌떡 일어나 그녀를 반겼다. 희주도 사자머리 상태인 엠마를 꼭 끌어안았다.


“언니, 진짜 고마워요. 덕분에 잘 쉬었어요. 저 완전히 싹 회복했다고요.”


“진짜지? 희주야, 그럼 이리 와서 이것 좀 봐봐.”

엠마가 얼른 포옹을 풀고 희주의 코 앞에서 손바닥을 휘저으며화면을 띄웠다. 


“짜증나 죽겠어. 신체 나이 31세 보이지? 너 없는 동안 나 혼자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신체 나이가 이제 서른 살 아래로 떨어지질 않는다 진짜.”


“아휴, 언니! 30대 신체가 은근히 더 우아하고 육감적이라고요. 그리고 이제 저 왔으니까 원한다면 금방 20대로 내려갈 테니 걱정 마세요.”


“한희주 말 하는 것 보니 진짜 다 돌아왔네.”


“그럼요.”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서로를 얼싸안았다. 희주는 엠마의 짜증과 신경질을 다시 볼 수 있어서 진심으로 다행스러웠다.




퇴근 후 희주는 집 앞 카페로 가 커피를 테이크아웃했다. 복직 첫날부터 늦을 수 없어서 아침 커피를 걸렀더니 하루 종일 멍한 느낌이라 늦게 라도 카페인 충전이 필요했다.


“오늘은 저녁에 오셨네요.”

카페 사장이 드립 포트에 커피를 내리며 말했다.


“네?”


“늘 아침에 아이스커피 테이크아웃해서 가셨잖아요. 아, 저번에는 딱 한번 따뜻한 커피 주문하셨었죠?”


“그런 걸 하나하나 다 기억하세요?”


“매일 아침마다 오시던 분이 한 동안 안 오셔서 궁금했거든요. 그래서 저번에 오랜만에 오셨을 때 아는 척을 좀 하고 싶었는데 그 땐 표정이 정말 안 좋아 보이셔서 눈치만 봤어요.”


“아, 제가 한 동안 몸이 좀 안 좋았어요. 그 때도 그랬고.”


희주는 퇴원 후 <남은 마음 교정 회사>에서 한림을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 때 카페에서 만난 어린 아기 덕분에 미즈키와 은정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제 발로 바다에 들어 가려던 수한을 구하고, 결국 현승의 정체까지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그 모든 시작이 바로 이 카페였다.


“그러셨군요. 뭔가 좀 예전이랑 분위기가 달라 보이세요. 좋은 의미로요.”


“그런가요?”

카페 사장이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희주는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칭찬을 듣자 괜히 멋쩍은 기분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수고하세…….”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희주가 커피를 챙겨 서둘러 나가려는데 그가 갑작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한……희주요.”

희주가 엉겁결에 대답했다.


“저는 신우영입니다. 아침 말고 저녁에도 종종 오세요.”

희주는 환하게 웃으며 “그럴게요.”라고 대답한 후 카페를 나왔다. 아주 오랜만에 희주의 얼굴에 꽃이 피었다.




‘띠링.’


스마트칩의 희주의 선잠을 깨웠다. 복직 첫 날부터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스케줄 탓에 집에 돌아오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뻗어버렸다. 희주는 눈을 찌푸린 채 알람을 확인했다. 한림의 메시지였다.


‘오늘이 복직 첫 날이라고 했수? 고생길이 열렸겠구먼. 그러게 우리 회사로 이직하라는 데 왜 고집을 부리나? 그건 그렇고 복직 선물로 돈 주고도 못 사는 정보를 주리다. 내가 자네보다 정보력으로보다 경제력으로 보나 여러모로 우위에 있어서 전해주는걸세. 파일 열어보게. 고맙다는 인사는 미리 사양하겠수다.’


희주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한림이 보낸 파일을 열어보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한림이 고르고 고른 파라스페이스 입국 컨설팅 회사 리스트였다. 리스트를 본 희주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희주는 그것을 한참 보다가 이내 삭제해버린다. 아무래도 그 회사들을 찾아갈 일은 없을 것 같다. 




[82년 후, 댓플레이스 심사 1구역 181번 심사대]


희주는 아주 딱딱한 종이를 세차게 구겨 버린 것처럼 생긴 땅 위를 천천히 걸었다. 위아래가 구분되지 않는 이상한 공간감에 압도되어 얼굴이 사색이 되어 버린 다른 영혼들과는 달리, 희주는 걷다가 잠시 멈춰서 땅을 손가락으로 훑어볼 정도로 여유로웠다. 


“어서 오시게. 못다한 이야기까지 나누려면 시간이 없다우. 이미 잘 알겠지만 심사 대기줄이 엄청나다네.”


“잠시만요. 금방 갈게요.”


희주를 앞서가던 한림이 그녀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뒤를 돌아보며 볼멘 소리를 했지만, 희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랜만에 밟은 사후 세계의 땅과 공기를 천천히 음미하고 있었다. 그런 희주를 보며 한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10분만일세!”하고 소리쳤다. 


희주는 늘 이 순간을 그리워하기도, 또 그리워하지 않기도 했다. 늘 이 곳에 다시 오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최대한 늦게 가고 싶기도 했다. 희주는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하던 한림의 얼굴에 어느새 희미한 주름들이 보이는 것을 깨닫고, 다시 발걸음을 서둘렀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한림도 얼른 심사를 마치고 들어가 쉬고 싶을 것이다. 희주는 거대한 아치를 그리고 있는 <댓플레이스> 심사대 앞에 놓인 익숙한 테이블에 조심히 앉았다.


“또 사고사라니. 참 기구한 인생이구려.”


“늘 남편과 한 날 한 시에 함께 세상을 떠났으면 했는데, 어쩌다 보니 실현됐지 뭐예요. 애초에 한 날 한 시에 죽는다는 게 자연사로는 희박한 가능성이었으니 잘된거라고 해두죠 뭐.”


“한 마디도 지지 않는 걸 보니 정말 희주가 맞구먼.”


새하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댓플레이스> 입장 심사 문지기와 심사 대기자로 만난 한림과 희주는 한동안 키득거리며 자기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던 마음을 풀어냈다.


“남편 이름이 신우영이라고 했던가? 얼굴이 아주 좋아 보이던데. 남자 볼 때 얼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타입인가봐?”


“제가 다시 한번 결혼을 결심한 이유 중에 빠질 수 없는 이유이긴 했죠.”


한림이 심사 대기자들의 프로필이 적힌 책 속에서 희주의 남편 사진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말하자, 희주가 그와 함께 남편 사진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농담조로 답했다. 희주는 사진에서 시선을 거두고 한림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제야 조금 주름이 가긴 했지만, 조각 같은 이목구비는 여전했고, 능청스럽고 여유로운 할아버지 같은 말투도 여전했다. 희주는 그를 바라보며 한참동안 망설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현승 소식, 궁금하지?”

눈치 빠른 한림이 희주의 망설임을 먼저 알아채고 물었다. 희주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은 현승이 심연에 있는 심사 구역으로 쫓겨나 문지기로 일하고 있다는 것 까지야. 워낙 깊은 차원의 구역이라 정확한 번호를 아는 사람도 없더군.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네. 내가 이 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현승의 존재 자체를 아는 이들마저 드물었수다. 벌써 82년이 지난 일이니까.”


“심연의 심사 구역으로…… 쫓겨났다고요?”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망각 효소가 빠진 주스를 줘서 인간 세상으로 복귀 시킨 것을 들킨 모양이야.”


“아…….”

한림의 말에 희주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가 항상 염려했던 부분이었다. 무리한 일을 벌였던 현승이 들키지 않고 과연 무사하게 지낼 수 있을지 걱정이었는데, 역시 들켜버렸던 것이다.


“처음부터 들킨 건 아니었는데, 인간 세상 모니터링을 담당하던 라비라는 친구에게 문제가 생겼나보더군. 그가 간간히 사적으로 인간 세상 모니터링을 하고 있었는데, 그걸 감사 담당 관리자에게 들켰다고 들었수다. 데이터를 복구하던 중에 라비가 나와 희주 당신의 신체 상태를 확인했던 사실이 드러난거지. 이걸 이상하게 여긴 감사 문지기가 인간 세상으로 돌아간 우리를 모니터링 했고, 결국 우리가 기억을 가진 채로 인간 세상에 돌아가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됐다는구먼.”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겠군요.”


“맞수다. 동시에 두 사람이 기억을 가진 채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라 분명 내부자의 소행이라고 생각했고, 라비를 추궁한 끝에 현승이 벌인 짓이라는 것이 드러난 게야.”


한림의 말에 희주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는 아무리 노력해봐도 현승의 얼굴이 어땠는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마지막으로 봤던, 관리자 문지기들의 위장용 가면을 쓰고 있던 모습이 더 잘 그려졌다.

 

희주는 인간 세상에 돌아간 후 새로운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그와 결혼까지 했지만, 희주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늘 현승의 존재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또 다시 사후 세계에 가면 현승을 마주하고 고마웠다고 말하리라 고대해왔는데, 결국 그는 찾을 수도 없는 깊고 깊은 곳으로 떠나버리고 말았다. 


“당신이 <댓플레이스>에 입장해서 잘 지내고 있다면, 언젠가 현승과 재회할 날이 있겠지. 심사 볼 준비가 되었수?”

한림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이제 심사 준비를 해야 한다.


“한 가지만 더요.”


“허허. 오늘은 추가 근무 확정이로구먼. 뭔가?”

희주가 심사대 옆으로 가려는 한림의 옷깃을 붙잡자 한림이 싫지만은 않은 듯 너털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실은 오래전에 당신의 사망 소식을 기사로 봤어요.”


“나야 뭐, 꽤 유명했으니까. 부고가 기사로 실리는 게 놀랄 일은 아니지.”


“아직 이렇게…… 문지기로 일하고 계실 줄은 몰랐어요.”

희주가 한 참을 망설이다 말했다. 희주의 말에 한림은 말없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이렇게 또 다시 심사에 탈락해서 문지기로 일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 아마 희주 자네를 맞이하려고 그랬나보구먼.”


“농담하지 말고요. 한 동안 <댓플레이스> 심사 컨설팅 회사를 키운다고 하시다가 어느 순간 소식이 끊겨서 궁금했거든요.”


“그랬었지. 그런 종류의 회사는 살아 있는 인간은 절대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수다. 인간 세상으로 되돌아온 이후, 당신과 나, 그리고 박지승을 비롯해서 사후 세계를 경험했던 사람들을 백방으로 찾아 나섰다우. 성과가 꽤 있었지. 생각보다 사후 세계의 망각 주스 관리가 그리 촘촘하지 못했더라고. 정말 잘못 만들어진 망각 주스를 마시고 기억을 간직한 채로 깨어난 사람들이 꽤 많았다네. 그들의 사후 세계 증언도 상당 부분 일치했지. 오랜만에 이 늙은이를 흥분시키는 일이었수다. 사람들의 사후 세계 경험을 바탕으로 돈이 될만한 프로그램들을 만들어봤지만, 심사에 통과해 보지 못했던 사람이 만든 껍데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네. 결국 <댓플레이스>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


한림이 마지막 말에 호흡을 가득 실어 말했다. 그 호흡에 한림의 지난 세월에 대한 회한이 가득 담겨있는 듯했다.


“아직 답을 찾지 못하셨군요.”


“이젠 알 수 있을 것 같수다. 그렇지만 그 답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우. 그건 내 노력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


“선물 같은 거였죠.”


“말하는 걸 보니 자네는 그 선물을 받은 모양이구려.”


“글쎄요. 그건 이 심사대가 알려주겠죠.”


 희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심사대 앞에 섰다. 심사대 앞에 서 있으니 아주 오래 전, 그녀의 첫 번째 죽음 때 엉겁결에 심사를 봤던 기억과 재심사에 떨어져 분을 참지 못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준비됐나?”

 한림의 질문에 희주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떤 점수가 나와도 괜찮다고 생각해왔기에, 생각보다 긴장이 되지는 않았다. 드디어 한림이 심사대 문 한쪽 귀퉁이에 붙어 있는 빨간색 버튼을 길게 눌렀다. 


 ‘띵동, 69점입니다. 입장하세요.’


 익숙한 안내음과 함께 심사대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던 환한 빛이 드디어 열린 문 틈 사이를 비집고 줄기처럼 쏟아졌다. 희주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빛이 자신의 감은 눈꺼풀 사이로 스며드는 느낌을 온전히 만끽하고 있었다. 그 빛은 마치 바람처럼 형체가 있는 듯 움직이며 희주의 온 몸을 에워쌌다. 


 “축하하네.”

 희주의 점수를 확인한 한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 희주는 그런 한림에게 조금은 슬픈 눈빛으로,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언젠가는 그도 이 문으로 들어갈 날이 오리라. 


 “망각 주스를 내가 아주 기가 막히게 만들어주겠네. 내 경력은 자네가 더 잘 알테고. 허허.”

 한림이 주머니에서 죽음의 시계를 여는 열쇠를 꺼내며 말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유머를 잃지 않았다.


 “제가 직접 해봐도 될까요?”

 희주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한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흠, 자기 인생의 마침표를 직접 찍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먼. 그렇게 하게나.”


 한림이 희주에게 열쇠를 건네주었다. 희주는 열쇠를 받아 들어 자신의 <죽음의 시계> 밑바닥에 있는 구멍에 열쇠를 집어넣고 살짝 돌렸다. 딸깍. 잊었던 아주 오래된 촉각이 되살아났다. 희주는 망각 주스 뚜껑을 열어 죽음의 시계에 담긴 액체를 부어 섞었다. 망각 주스의 색이 점점 주황색으로 변했다.


“정말 고마웠어요.”

 희주의 마지막 인사에 한림이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띄웠다. 희주는 단숨에 망각 주스를 마셨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다. 


희주는 댓플레이스 문 안쪽으로 한 걸음을 옮겼다. 희주는 무언가에 끌리듯,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앞으로 걸어나갔다. 희주의 모습이 한림의 시야에서 거의 사라질 무렵, 심사대 문이 서서히 닫혔다. 


한림은 심사대 앞에 우두커니 서서, 닫힌 문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댓플레이스 길목]

 

“어서오세요.”


나는 희주를 밝게 맞이한다. 그녀가 어린 아이처럼 새로 태어난 듯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 인사한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과 깊어진 주름만 제외하면 똑 같은 모습이다. 82년만에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녀를 다시 만났다. 


매일 같이 그리던 순간,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표현할 수 없다. 누군가 나의 왼쪽 가슴을 움켜쥔 것처럼 저릿하다. 나는 터져 버릴 뻔한 눈물을 가까스로 참았다. 


 “이 곳은 <댓플레이스>라고 합니다. 저는 아주 오래전에 이곳에 왔어요.”

나는 그렇게 인사하고, 정말 하고 싶었던 다음 말을 꾹 삼켰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리워하고 기다렸어 희주야.’ 


“아, 그러시군요. 반갑습니다. 정말 좋은 곳이네요.”

 희주가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며 말했다. 더 없이 평온한 표정이다. 그녀의 평온한 얼굴을 보니 그간의 고된 세월을 한 순간에 보상 받는 느낌이다. 


망각 주스를 조작한 벌로 오랜 시간 심연의 구역에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심사를 진행했다. 자신이 왜 <댓플레이스> 심사에 계속 떨어지는지 깨닫지 못하고 계속 아래로, 끝없는 심연으로 내려가는 영혼들의 심사를 진행하고 그들의 하소연을 듣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50년 간의 벌을 마치고, 32년 전 <댓플레이스> 심사에 통과해 드디어 희주를 다시 만난 사실이 꿈만 같다.


“저는 어떻게 이 곳에 온 건가요?”

한 참 동안 주변을 살펴보던 희주가 이 곳이 신기한 듯 묻는다.


“기억 못하시겠지만, 당신은 방금 이 곳 <댓플레이스>로 입장하기 위해 심사를 거쳤어요. 당신은 그 심사에 통과했고, 망각 주스라는 걸 마시고 자신의 죽음과 기억을 소멸시키고 이 곳에 왔어요.”


“심사요?”


“네. 인간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따라 입장 여부가 달라져요. 당신은 심사에 무사히 통과해서 좋은 곳에 오신 겁니다. 심사에 통과하지 못하면 계속해서 재심사를 보게 되거든요.”


“아, 제가 심사에 통과했군요. 다행이네요. 그런데…….”

희주가 뭔가 걸리는 것이 있다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당신은 어떻게 다 기억하고 있는거죠?”


“아, 그게…….”

나는 잠시 대답을 망설인다. 이 이야기를 해도 괜찮은 걸까?


“일종의 벌입니다.”


“네? 벌이라고요?”

희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다. 


“그러니까, 실은 제가 과거에 사고를 좀 쳤거든요.”


“어머나, 그러셨군요. 과거의 벌이 계속 이어지는 건가요? 무슨 잘못을 하셨길래, 좀 너무하네요.”

 희주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한다. 기억은 잃었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던 본연의 성격은 그대로 남아 있다.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모든 기억을 가지고 가는 벌을 받았죠. 저 말고도 가끔 그런 벌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만 기억하는 상태에서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혹은 과거의 잘못들과 영원히 대면해야 하는 벌이죠.” 


“세상에.”

희주가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며 한숨을 내뱉는다. 이런, 그녀의 마음을 어렵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혹시…….”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희주가 뜸을 들이며 주저한다. 설마, 나를 알아본 걸까? 그런 말도 안되지만 행복한 상상을 짧게 나마 해 본다.


“당신 기억 속에…… 제가 있나요?”


희주가 조심스레 묻는다. 순간,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그렇다는 대답이 튀어나올 뻔했다. 역시, 기억은 잃었지만 눈치 빠르고 센스 있는 것은 여전하다. 


“아, 아닙니다. 절대요. 기억에 대해 물어보셔서 대답한 것뿐입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사실을 말할 수는 없다. 모든 걸 잊은 그녀에게 과거의 기억은 그저 덫일 뿐이니까. 


“그렇군요.”

희주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않고 대답한다. 


“하나만 더 여쭤봐도 될까요?”


“음, 시간이 많진 않아서 마지막 하나만 더요.”

82년의 그리움에 자꾸 이야기를 꺼내다 보니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그녀와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른 곳도 있는 건가요?”


“네?”


“그러니까, 재심사에 계속 떨어진 사람들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게 되는 거예요?”

희주가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묻는다. 나도 아주 긴 시간 품었던 질문이었다.


“글쎄요, 다른 곳이 있다고 해야 할지 없다고 해야 할지……. <댓플레이스>와 구분된, 소위 말하는 무시무시한 지옥 같은 곳이 있냐는 질문이라면 그런 곳은 없는 게 맞아요. 하지만 자신이 왜 댓플레이스에 들어가지 못하는지 영원히 깨닫지 못하고 계속해서 재심사를 봐야 하는 그것 자체가 지옥에 있는 것 아닐까요? 나의 삶이 얼마나 빛났는지, 그리고 나의 삶만큼이나 다른 사람의 삶도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을 영원히 깨닫지 못한 채 말이죠.”


“그렇네요.”


희주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중요한 것을 깨달은 이의 미소였다. 비로소 나의 마음도 편안하다.


이제 정말 그녀를 보내줄 시간이다. 

희주야, 네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세상으로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 너무 늦게 지켜서 미안해. 


“한희주씨, 이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세상으로 갈 시간이에요.”

나는 빛이 쏟아지는 공간을 향해 손을 길게 뻗었다.


“댓플레이스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끝>



- 그 동안 <댓플레이스>를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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