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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주영 Oct 06. 2024

[소설] 15장. 죽음의 시계

[판타지 장편 소설] 댓플레이스(That Place)

“말도 안돼……. 이, 이거…… 고장 난 거 아니에요!?”


 희주는 점수판에 또렷하게 새겨진 ‘23’이라는 숫자를 보며 이미 영혼인 상태이지만, 영혼이 나간 것처럼 멍 해졌다. 첫 심사 점수와 1점도 차이가 나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순간 꿈을 꾸는 것인가 싶어서 눈을 부비고 다시 점수판을 바라보았지만 ‘23’이라는 숫자는 흔들림 없이, 오히려 고고하기까지 했다. 이내 점수판에서 숫자가 사라졌다. 굳게 닫힌 심사대의 문이 더 없이 무겁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다음! 왕웨이 올라오세요.”

 점수판에 글자가 사라지지 관리자 문지기가 다음 순번 심사 대기자를 호명했다. 심사대 문 앞에서 굳어 버린 희주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안돼요!”

 희주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급히 관리자 문지기의 말을 막았다. 이대로 재심사 기회를 날려버릴 수는 없었다. 희주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관리자 문지기에게 돌진했다. 


“아니, 이유라도 알려줘야 할 것 아니에요! 네!?”


 희주는 관리자 문지기의 양 팔을 마구 흔들며 소리쳤다. 잔뜩 흥분한 자신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림 없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더욱 약이 올랐다. 희주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관리자 문지기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면을 거칠게 잡아챘다. 관리자라는 작자가 가면 뒤에 숨어 기계적으로 심사 진행만 하는 것이 영 못마땅했던 그녀는 얼굴이나 보고 따져야겠다는 심산이었다. 일반 영혼들이 심사를 할 때에도 이렇게 성의 없게 하지는 않는다. 희주는 이 참에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이 곳의 시스템을 몽땅 뒤엎어 버리라 생각했다. 


 “한희주! 그만해요!”

 관리자 문지기의 가면이 완전히 벗겨지려는 순간,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경호 문지기 하나가 소리치며 희주의 손을 재빨리 막았다. 그 옆에 있던 또다른 문지기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 황급히 관리자 문지기의 얼굴을 가렸다. 경호 문지기가 겉옷을 펄럭거리는 바람에 관리자 문지기의 머리에서 떨어진 가면이 공중으로 붕 뜨더니 마치 시계추처럼 흔들리다가 바닥에 살포시 내려 앉았다.


희주의 돌발 행동에 재심사를 대기하고 있던 문지기들의 얼굴이 죄다 사색이 되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 속에 ‘이번에 심사 결과가 잘못되면 다 희주 네 탓이야!’라는 뜻을 가득담아 희주를 노려보았다. 경호 문지기 둘이 희주의 양 팔을 단단히 포박한 채 어디론가 끌고 갔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데! 아니, 차라리 점수가 확 낮아진 것도 아니고 왜 똑같이 23점이냐고요! 왜!!!”


희주는 끌려 가면서도 계속 소리를 질렀다. 처음부터 아무런 설명 없이 무조건 따르라는 식의 이 곳의 시스템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재심사에 탈락하고 나니, 애써 꾹꾹 눌러 돌덩이로 만들어 놓았던 반감이 용암이 되어 솟구치는 듯했다. 그 동안 재심사를 위해 여기저기에 자문을 구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심사 통과 힌트를 찾으려 했던 자신의 모습이 전부 바보같이 느껴졌다. 


“한희주씨, 시끄럽게 굴어 봤자 좋을 거 하나 없어요. 흥분 가라 앉혀요. 나중에 꼭 관리자 문지기에게 사과하고요.”

희주의 왼쪽 팔을 단단히 붙들고 있던 경호 문지기가 짜증 섞인 말투로 희주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의 쌀쌀맞은 말에 희주는 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사과를 하라고요? 당신들은 정말 이 곳이 아무 문제도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고 통과할 때까지 계속 심사만 보라고 하는 건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닌가요?”

 희주가 경호 문지기에게 쏘아붙였다.


“나 참, 이 곳의 규칙이 이런 걸 왜 나한테 따져요? 나도 심사 통과를 못해서 답답하기는 매한가지라고요!”

 희주가 뭐라고 하든 동요 없이 그녀를 끌고 가던 경호 문지기 하나가 참다 참다 못 들어주겠다는 듯, 발걸음을 멈추고 붙잡은 희주의 팔을 뿌리치며 말했다. 희주의 오른쪽 팔을 붙들고 있던 다른 문지기는 조만간 싸움이 날 것 같은 일촉즉발의 분위기에 눈알을 양쪽으로 굴리며 눈치만 살폈다. 주변 공기가 한 순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얼어 붙었다. 


희주는 그녀에게 소리친 경호 문지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잔뜩 찡그린 미간에서 그의 답답함과 피곤함이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사실 그의 말에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도 희주와 마찬가지로 <댓플레이스> 입장 심사에 탈락하고 어쩔 수 없이 경호 문지기로 일하며 재심사만을 기다리고 있는 불쌍한 영혼 중 하나일 뿐이었다. 희주는 괜히 그에게 화풀이한 것이 머쓱해졌다.


 “미안해요. 흥분해서 괜히 당신에게 소리쳤네요.”

 희주가 사과하자 경호 문지기가 그제야 한숨을 푹 쉬며 그만 하자는 의미로 희주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래도, 그 관리자 문지기한테 따지기는 해야겠어요. 이렇게 가서는 속이 터져서 한번 더 죽을지도 몰라요. 뭐, 제가 몰아붙인 부분에 대해서는 사과도 하긴 할 거고요.”

 “지금은 안돼요. 문지기 관리자에게 공격적인 행동을 한 경우에는 규정상 담당 관리자와 면담을 먼저 해야 해요. 문제 행동했을 때 재심사 순서가 맨 뒤로 밀리는 것은 알고 있죠?”


 그 말에 희주는 갑자기 망치로 뒷통수를 맞은 듯 머리가 띵 해졌다. 문지기 대기실로 왔던 다음 날,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있던 한 여자가 난동을 피우다가 문지기들에게 힘 없이 끌려 갔던 모습이 희주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당시에 미즈키가 이런 경우 재심사 순번이 맨 뒤로 밀린다는 경고를 했던 것도 생생했다. 지금은 그녀를 도와줄 미즈키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빠르게 미즈키의 빈자리를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희주는 잠시 눈을 감고,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임기응변 하나로 버텨온 세월이다. 이 정도 위기쯤은 구렁이 담 넘어 가듯 스리슬쩍 넘어갈 수 있다. 


 “그 놈의 규정……. 당연히 알고 있죠. 물론 제가 잘못한 부분에 있어서는 책임을 질 거예요. 그전에, 아까 그 관리자 문지기에게 제 말 좀 전달해 주세요. 그건 가능하죠?”

 “뭐라고요? 내 말 못 알아들었어요? 담당자와 면담을 마친 후에 아까 그 관리자 문지기와 만날 수 있다고요.”

 경호 문지기가 한쪽 눈썹을 실룩거리며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아니 그러니까, 직접 만나겠다는 게 아니고요. 그냥 제 말만 전달해 주세요. 그건 규정에 어긋나는 거 아니잖아요.”

 희주의 말에 경호 문지기가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희주는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불쌍한 표정을 장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가 뭐라도 알아 내게 된다면, 그때는 꼭 당신에게 정보를 줄게요. 메신저 역할만 부탁해요. 다 같은 처지인데 좀 돕고 살자고요.”

 정보를 주겠다는 희주의 말에 경호 문지기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마지못해 수락한다는 표정을 확실히 했다. 그는 가던 발걸음을 되돌려 관리자 문지기에게 희주를 데리고 갔다. 관리자 문지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땅에 떨어졌던 가면을 주워 다시 쓰고 무미건조한 심사를 계속 이어 나가고 있었다. 마침 한 타임 심사가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희주는 이 때를 놓치지 않고, 경호 문지기에게 속삭였다.


 “제가 탈락한 이유를 알고 싶다고 전해주세요. 아니,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면 제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심사에 통과할 수 있는지 작은 팁이라도 알려 달라고요. 아, 그 전에 밀친 것은 미안하다는 말 잊지 말고 먼저 전달해 주시고요.”

희주의 말을 들은 경호 문지기가 ‘그건 안돼요!’라는 제스춰를 취하며 희주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으나, 그의 등을 관리자 문지기 쪽으로 밀치는 희주의 손이 한 박자 빨랐다. 


경호 문지기는 어쩔 수 없이 쭈뼛거리며 관리자 문지기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그의 말에 귀 기울이던 관리자 문지기가 고개를 들어 희주 쪽을 바라보았다. 다시 쓴 가면 틈새로 새어 나오는 눈빛이 더욱 매서워진 느낌이다. 모르긴 몰라도 인간 세상에서 군인이라든지, 교도관이라든지, 그런 피도 눈물도 없는 일을 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가 경호 문지기에게 뭐라고 속삭이자 경호 문지기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는 희주에게 다가왔다.


“심사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라고 해요. 심사자들의 특징을 잘 관찰하다 보면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하네요. 그것 봐요, 이 이상 들을 수 있는 말이 없다니까요?”


경호 문지기는 실망감을 감추지 않고 희주에게 말을 전했다. 뭔가 알아내면 정보를 주겠다는 희주의 말에 순간 홀렸던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움마저 밀려들었다. 희주는 아무 것도 알려줄 수 없다,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 이런 쳇바퀴 같은 말에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뭔가 명쾌한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숱하게 심사를 진행해 온 관리자 정도 된다면, 작은 팁 정도는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싶었다. 희주는 목구멍으로 튀어나오려는 말들을 애써 꿀꺽 삼키며 씩씩거렸다.


“아, 그리고 사과는 받아 주겠대요. 재심사 순번은 맨 뒤로 다시 조정될 테니 그런 줄 알라고 하던데요. 관리자 면담도 성실하게 잘 받으라고. 이제 한번 더 공격적인 행동을 하진 않을 것 같으니 면담실로 억지로 끌고 가진 않을게요. 그럼, 볼 일 끝났으면 전 이만…….”


희주는 재심사 순번이 맨 뒤로 조정된다는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루에도 7만 6천명 정도가 심사에서 탈락하고 문지기 대기실로 모여든다. 이들이 전부 재심사를 다 받은 이후에 차례가 돌아온다면, 앞으로 얼마나 긴 시간이 흘러야 재심사 기회가 주어질지 알 수 없다. 희주는 이제 볼일 없으니 떠나겠다는 경호 문지기의 팔을 얼른 잡았다.


“잠깐만요! 제발,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요. 제가 잘못한 부분은 인정하지만 이 정도 일로 재심사 순번을 맨 뒤로 보내는 조치는 너무해요. 대신, 제가 남들보다 초과 근무를 할 테니, 재심사 순번을 미루지 말아달라고 전해주세요. 재심사 순번을 유지하는 조건이라면, 얼마든지 초과 근무를 하겠다고요. 필요하다면 심사 업무 외에 뭐든 다른 일들도 할 수 있어요. 이래봬도 인간 세상에서 거친 직업이 한 두개가 아니거든요.”


경호 문지기는 어림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자리를 떠나려 했다. 희주는 그의 팔에 얼른 매달려 어미를 잃은 새끼 고양이 표정으로 양손바닥을 싹싹 비볐다. 경호 문지기는 그런 희주를 차마 매정하게 쳐 내지 못하고 “진짜 마지막입니다.”라고 말하며 다시 관리자 문지기에게로 향했다. 그가 되돌아오는 모습이 보이자 관리자 문지기는 고개를 한 쪽으로 까딱하며, 팔짱을 끼었다.


경호 문지기와 관리자 문지기는 한참 동안 귓속말을 주고 받았다. 그 모습을 먼 발치에서 지켜보던 희주는 무슨 말이 오갈지 몰라 발만 동동거릴 뿐이었다. 마침내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고 경호 문지기가 희주에게 다가왔다. 결과가 좋은 지 나쁜 지 예측할 수 없는 오묘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하라고 하네요. 초과 근무를 하면 재심사 순번을 유지해 주겠대요.”

“헉, 정말요?”

희주는 자기가 제안해 놓고도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했던 참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답변이 돌아오자 화들짝 놀랐다. 희주가 입가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는 바람에 입술이 요상한 모양으로 실룩거렸다.


“그런데 희주, 잘 생각해요. 초과 근무량이 어마어마해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긴 한데…….”


관리자 문지기가 제안한 초과 근무는 앞으로 6개월간 무수면 무휴식 근무였다. 그 말을 들은 희주의 입이 다물어 질 줄을 몰랐다. 사실 죽음 이후에는 아무리 일을 해도 피곤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무수면 무휴식이라니! 인간 세상에서도 이 정도로 경우 없이 근로 시간을 책정하지는 않는다. 이 곳은 근로기준법 같은 것도 없단 말인가? 알면 알수록 체계도 없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라는 생각에 화가 치밀었지만, 희주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것이 희주를 더욱 분하게 만들었다. 희주는 소리가 나도록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희주는 6개월간의 무수면 무휴식 근무를 받아 들였다. 이제 희주에게 <댓플레이스>이 어떤 곳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댓플레이스>이 꿈꾸던 낙원이든 아니든, 그저 굳게 닫힌 심사대의 문을 여는 것만이 희주의 목표가 되었다. 그녀의 유일한 낙이었던, 대기실에서 주변 문지기들과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는 것도 그만 두고 오로지 일에만 몰두했다. 


희주는 6개월동안 2만명이 넘는 영혼들을 심사하게 되었다. 원래 스케줄 대비 2.5배 달하는 심사량이었다. 주변 문지기들이 걱정할 정도였지만, 희주는 오기로 그 기간을 버텨 나갔다. 


희주는 그 기간동안 다양한 케이스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대부분은 자연스러운 노화로 인한 죽음이었지만, 기구한 사연들도 많았다. 목 뒤에 박힌 칩이 고장나 건강 상태에 대한 잘못된 신호를 보내는 바람에 손쓸 새도 없이 죽음을 맞이한 사람, 친구들이 생일을 맞이하여 헹가래를 쳐 주다가 놓쳐서 뇌진탕으로 죽은 사람, 차 사고를 꾸며 보험 사기로 한 탕을 하려다가 실수로 심각한 차 사고를 내서 죽은 사람, 유산 상속을 두고 형제들끼리 싸우다가 서로가 서로를 칼로 찔러 죽은 사람, 남자 친구에게 이별을 고한 후 그의 보복의 칼에 맞아 죽은 여자, 미혼모가 낳자마자 쓰레기통에 버리는 바람에 얼어 죽은 아이, 막대한 치료비가 드는 병에 걸리자 치료비 때문에 가족들에게 부담이 될까봐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할머니, 서식지를 잃은 멧돼지가 인간들의 마을까지 내려와 공격하는 바람에 죽은 사람 등등. 


반면에 저절로 고개가 떨구어지는 죽음들도 있었다. 갑자기 선로에 쓰러진 취객을 구하려다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기차에 치여 죽은 청년, 전복된 배에서 사람들을 구하고 자신의 마지막 구명조끼까지 아이에게 벗어주고 바닷속에서 죽은 사람, 뇌사 상태에 빠진 후 장기를 이식하여 5명에게 새생명을 주고 떠난 사람 등등.

희주는 수많은 형태의 죽음을 마주하고 그들의 점수를 기록했다. 심사를 진행하면서 그들의 심사 결과를 조심스레 예측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심사 통과자들의 공통점은 도무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고, 희주가 세운 가설들은 족족 헛발질이었다. 


한번은 전 세계인의 존경을 받는 NGO 단체의 대표 도널드 채프먼의 심사를 진행하게 되었다. 그 단체는 어린이들을 돕는 단체였는데,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명의 후원자를 모집했고, 그로 인해 빈곤하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자라야만 했던 수많은 아이들이 도움을 받아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도널드는 ‘세계 평화상’을 받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기에 희주도 그를 잘 알고 있었고, 그를 심사하게 된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하며 잔뜩 설레는 마음으로 심사를 진행했다. 당연히 심사는 통과일 것으로 생각했기에 빨리 심사를 마치고 대화나 좀 길게 나눌 심산이었다. 


그러나 <댓플레이스> 심사대는 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의 점수는 고작 41점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에 당황한 것은 도널드뿐만이 아니었다. 심사 통과의 기준을 찾아가고 있던 희주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한 사람도 통과할 수 없다니. 그런가하면 아무런 특징도 없고, 업적도 없고, 특별한 선행도 없는 이는 바로 통과가 되기도 했다.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아무것도 제대로 알아내지 못한 채 6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희주는 손에 쥔 펜에 힘을 가득 주어 ‘X’라는 글자를 꾹꾹 눌러썼다. 그 동안 그녀는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달력에 ‘X’ 표기를 하며 세번째 심사날을 기다렸고, 드디어 그 날이 되었다. 


희주는 숙소에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표정인 얼굴에 검푸른 그림자가 짙었다. 두번째 심사 이후 6개월의 시간이 지났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것 뿐만 아니라 혼란만 더욱 가중되었기에, 그 동안 자신감은 더 떨어졌고 세 번째 심사날이 다가올수록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희주는 심사 2구역을 거쳐 3구역으로 내려가려다가 갑자기 발걸음을 뚝 멈췄다. 희주의 숙소 옆 방에서 지내고 있는 웨이였다. 그는 얼마 전 희주가 최초 심사를 진행했었는데, 때마침 2구역에서 재심사에 통과하여 뛸 듯이 기뻐하고 있었다. 


“옆 방이 또 비겠네.”

희주가 씁쓸한 실소를 내뱉으며 혼잣말을 했다. 희주는 웨이의 재심사 통과를 진심으로 축하해주지 못하는 자신이 싫었지만, 아무리 마음을 가다듬어 보려고 해도 껌처럼 엉겨 붙은 마음은 좀처럼 펴질 줄을 몰랐다. 


“다음! 한희주 올라오세요.”

심사 3구역에서 관리자가 희주를 호명했다. 하필 지난 2구역 재심사때 봤던 자였다. 희주는 그의 가면을 벗기고 난동을 부렸던 기억이 떠올라 괜히 뻘쭘해져 일부러 그의 시선을 피한 채 심사대 앞에 올라섰다.  


“시작할게요.”

그는 희주를 못 알아본 것인지, 그냥 무시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무미건조하게 재깍 심사를 진행하려했다. 희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번에는 또 통과를 못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컸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겠지 하는 마음으로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물론, 자기도 모르게 바르르 떨리는 손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관리자 문지기가 빨간색 버튼 위에 손을 올렸다. 아치 모양 심사대가 빠르게 번쩍거렸고, 이제는 귀에 익숙한 문구가 희주의 귀에 꽂혔다. 


‘띵동, 25점입니다. 대기하세요.’


“하아…….”

희주가 양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전보다 2점이 오르기는 했지만, 의미있는 변화라고는 할 수 없었다. 지난 재심사 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화도 나지 않았다. 뫼비우스의 띠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이렇게 영원히 심사, 실패, 심사, 실패를 반복하며 <댓플레이스>에 들어가지 못한 채 살아야 하는 것일까? 희주는 망망대해에서 방향을 잃은 채 홀로 표류하다가 배가 뒤집혀 바닷속에 풍덩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희주는 반쯤 뜬 눈을 내리깔고 심사대 아래로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잠깐.”

인사도 잊은 채 기운 없이 걸어가던 희주를 관리자 문지기가 불러 세웠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차트에 적힌 뭔가를 확인하느라 희주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번이 세번째 탈락. 맞죠?”

그는 친절하게도 손가락 세 개를 들어 ‘세번째 탈락’임을 굳이 강조하며 말했다. 


“심사 3구역에 있으니 그렇겠죠? 왜요?”

그의 말에 희주가 빈정대며 대답했다. 심사 3구역에 있으면 당연히 세번째 탈락인데 굳이 왜 불필요한 말로 신경을 긁는 것인지,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6개월간의 초과 근무도 끝났으니 어서 숙소로 들어가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흠, 당신 <죽음의 시계> 좀 봅시다.”

관리자 문지기가 느닷없이 죽음의 시계를 찾자, 희주는 미간에 주름을 깊게 만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역시나 아무런 설명 없이 마치 맡겨둔 물건을 되찾는 것처럼 희주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고 있었다. 희주는 스멀스멀 짜증이 올라왔지만, 뭔지는 몰라도 얼른 끝내버리자 하는 생각에 주머니를 뒤져 죽음의 시계를 꺼내 그에게 건네었다. 


사실 첫번째 심사 이후, 희주의 시계는 거의 미동조차 없었다. 한 두방울이 떨어졌는지 아닌지 조차 애매할 정도였다. 사실 희주도 이 부분에 의문을 품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녀와 비슷한 시기에 이 곳에 도착해 첫번째 심사를 보고 탈락한 영혼들과 비교해 봤을 때, 현저히 차이가 날만큼 희주의 시계는 요지부동이었기 때문이었다. 희주는 자신의 죽음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 못내 궁금했지만, 누구 하나 속시원한 답을 해주지 않았다.


희주의 시계를 들어 한참동안 이것저것 확인하던 관리자 문지기가 말릴 틈도 없이 그의 옆에 있던 경호 문지기에게 시계를 건네고 귓속말로 한참을 속삭였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경호 문지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희주를 힐끔 한번 쳐다보았다가 또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관리자 문지기의 말에 집중했다. 희주는 한쪽 눈썹을 치켜 뜨고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이 동네는 무슨 비밀이 이렇게 많은지. 언제나 이렇게 설명도 없고 불친절하다. 관리자 문지기가 안주머니에서 손바닥만한 종이와 펜을 꺼내더니 뭔가를 메모한 후 그 종이를 경호 문지기에게 건넸다. 경호 문지기가 그 쪽지를 들고 경호 문지기가 희주에게 다가왔다. 


“희주씨, 이거 참…….”

경호 문지기가 희주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당신 행운이네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분명 ‘부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방금 재심사를 탈락한 희주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운’이라는 단어가 너무 생소한 나머지, 희주는 자신이 그 동안 ‘행운’이라는 말의 뜻을 잘못 알고 있었나 싶었다. 


“앞뒤 다 잘라먹고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지금 여기에서 이야기 해줄 수는 없고, 이거 받아요.”


경호 문지기가 희주에게 쪽지를 건넸다. 희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쪽지를 받아 얼른 펼쳐 보았다. 쪽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1구역 3,800번 심사대. 금일 밤 12시까지 집결.’


“12시요? 다 늦은 시간에 왜 심사대로 모이라는 거예요? 게다가 1구역이라니……. 거긴 최초 심사자들만 모이는 곳이잖아요. 그리고 내 죽음의 시계는 왜 가져가는 거죠?”


쪽지를 열어본 희주가 질문을 퍼부었지만, 경호 문지기는 희주의 질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귀에 꽂은 송수신기를 통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었다. “응응, 오늘 넘어 갈 거야. 지금 몇 명 모인 거지? 아……. 한 명 밖에?”하는 대화가 희주에게도 들렸지만, 도무지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희주, 최대한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가도록 해요. 다른 문지기들이 물어봐도 그냥 대충 둘러대고요. 그리고 쪽지 받은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절대, 절대 하면 안돼요.”

경호 문지기가 희주의 코 앞으로 다가와 매섭게 경고를 하자, 희주는 엉겁결에 뒷걸음질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 장소에 시간 맞춰서 나갈 테니 걱정 말고요. 전 이만 가볼게요. 이따 봅시다.”

희주가 붙잡을 틈도 없이 경호 문지기가 몸을 돌려 관리자 문지기 옆으로 뛰어 돌아갔다. 희주는 뭐라도 한 마디를 더 하려다가 더 이상 질문을 해서는 안될 것만 같은 분위기에 그만 두었다. 희주는 손에 쥔 쪽지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눈치 빠른 그녀도 도무지 무슨 일인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녀는 쪽지를 구겨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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