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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주영 Oct 07. 2024

[소설] 16장. 망각 주스(1)

[판타지 장편 소설] 댓플레이스 (That Place)

모두의 일과가 끝난 시간이었다. 늘 똑 같은 검푸른빛 하늘이 유난히 스산하게 느껴졌다. 주변에는 가끔 순찰을 도는 문지기 몇 명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희주가 숙소에서 나올 때 맞은편 방에서 지내고 있는 문지기를 복도에서 마주쳐 흠칫 놀랐지만 다행히 그는 별 다른 질문 없이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 희주를 지나쳐 갔다.


희주는 무슨 일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시간 맞춰 집결하라는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종이 한 장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무게가 느껴졌다.


희주는 숙소에서 나와 희주가 최초로 <댓플레이스> 입장 심사를 봤던, 그리고 현재 그녀가 심사 일을 하고 있는 1구역으로 넘어갔다. 아무도 없는 곳에 불 꺼진 아치 모양의 심사대 수천개가 여기 저기 세워져 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공동 묘지의 비석들처럼 보여 괜히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희주는 문뜩 자신의 시체가 어떻게 처리 되었을지 궁금해졌다. 찾아올 사람이 없으니 공동 묘지에 묻히지는 않았을 것이고, 아마도 화장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보험회사와 리노가 알아서 해 주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리노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리노도 지금쯤 고철 덩어리가 되어 분리 수거장에 있겠지. 아니, 어쩌면 운이 좋아 새로운 로봇으로 태어났을 수도 있을 것이다. 희주는 애써 최신식으로 탈바꿈한 리노의 멋진 모습을 상상했다.


1구역 3,800번 심사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맨 끝에 있는 심사대이기도 했고,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어둠 가운데 심사대 하나에만 환한 불이 들어와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오전에 만났던 경호 문지기가 미리 와 있었다.


“희주씨, 시간 맞춰 잘 왔네요. 오면서 사람들 많이 마주친 건 아니죠?”

경호 문지기가 희주를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유독 주위를 살피고 조심스러워 하는 것이 느껴졌다.

“뭐, 한 두명 마주치긴 했지만 그냥 인사만 나누었…….”


희주가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두 눈을 크게 떴다. 경호 문지기 뒤 쪽으로 잿빛 연기 기둥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희주는 오늘 그녀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 것만 같았다. 


“잠깐, 설마 지금 갈 곳이…….”

희주가 말 끝을 흐렸지만, 경호 문지기는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연기 기둥을 통해 갈 수 있는 곳은 딱 하나. 바로 삶과 죽음의 경계인 중간 지대뿐이다.


“중간 지대에는 왜 가는 거예요? 아니, 그 전에. 중간 지대로는 다시 갈 수 없는 거 아니었나요?”

한 동안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던 희주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공간에 희주의 외침이 심사대의 아치를 타고 굽이굽이 울려 퍼졌다. 


“제발, 제발 뭐라고 말 좀 해줘요! 궁금해 미쳐 버리겠다구요!”

경호 문지기가 피곤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말없이 이마에 손을 얹었다.


“희주씨, 잘 들어요.”

희주가 아무리 알려달라고 갖은 방법을 써도 꿈쩍 않던 경호 문지기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그 바람에 희주도 악을 쓰다 말고 침을 꼴깍 삼켰다.


“당신에게 한번 더 선택의 기회가 주어질거예요. 삶으로 되돌아 갈지, 아니면 계속 죽음을 향해 갈지.”


“……네? 그게 무슨…….”

지금 저 문지기가, 삶으로 되돌아갈 기회가 주어졌다고 한 건가? 희주는 너무나도 황당한 말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자세한 건, 오전에 당신 재심사를 진행해 주었던 관리자 문지기가 설명해줄 거예요. 당신 죽음의 시계도 이미 중간 지대에 보내 놓았고요. 아, 이런……. 우리가 지체하는 바람에 좀 늦었네요. 관리자님은 벌써 도착한 모양이에요.”

경호 문지기가 송수신기에 잠깐 귀를 기울이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말의 속도를 올려 말했다.


“중간 지대에 있는 레이먼에게 미리 말을 전달해 놨어요. 이 곳에 처음 오던 날, 연기 속을 통과해서 왔던 거 기억하죠? 미즈키가 당신을 끄집어 내주었잖아요. 이번엔 반대로, 중간 지대 쪽에서 레이먼이 당신을 끄집어 내줄 거예요.”


그의 손은 어느새 집채만 해 진 잿빛 연기 기둥을 가리키고 있었다. 희주는 도무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희주도 벌써 오랜 기간 심사 문지기로 일했기 때문에 연기 기둥이 별 거 아닌거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연기 기둥 속에서 끄집어 낸 영혼 수만 해도 수만트럭이 넘는다. 그러나 그 연기 기둥에 다시 한번 제 발로 들어가야 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희주는 그때의 숨막히고 몽롱했던 감각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삶으로 되돌아갈 기회라니. 댓플레이스로 들어갈 궁리만 했지, 삶으로 되돌아간다는 옵션은 상상조차 해 본적 없던 일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의 신체는 한 줌의 가루가 되어 바다 속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설마 아기로 다시 태어나는 것일 까? 아니다. 단 한번도 환생에 대한 설명을 들은 적은 없다. 문지기들 간에 떠도는 헛소문이라도 있을 법한데 그런 가십에서조차 환생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리고 만약 환생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댓플레이스>에 들어간 영혼들에게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맞지 않은가.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는 시나리오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희주씨, 어서요.”

경호 문지기가 희주를 재촉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희주가 결심한 듯 연기 기둥 속으로 한 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또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행운을 빌어요!”

경호 문지기의 말이 순식간에 주변이 아득해지며 연기 기둥이 희주의 몸을 휘감았다. 희주는 눈을 질끈 감고 어서 이 시간이 끝나길, 레이먼이 어서 자신을 끄집어 내주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익숙한 손길이 그녀의 팔목을 잡아 끌었다. 그녀가 처음 삶과 죽음의 경계에 도착했을 때 만났던 레이먼이었다.


“희주! 이렇게 또 만나네요. 실은, 당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렇게 다시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레이먼이 희주의 양 손을 잡고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희주는 그런 레이먼을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어색한 미소로 인사를 대신했다. 다시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레이먼의 말이 귀에 꽂혔다.


희주는 천천히 중간 지대, 즉 삶과 죽음의 경계를 둘러 보았다. 특정 시간에만 운영되는 <댓플레이스> 심사 구역과는 다르게 중간 지대는 늦은 밤에도 이제 막 도착한 영혼들로 북적북적했다. 하긴, 사람들이 운영 시간에 맞춰서 죽는 것은 아니니 종일 운영되는 것이 맞기는 했다. 희주는 엠마와 함께 이 곳에 도착해서 어깨에 짊어진 가방 무게를 쟀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 곳에 다시 오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따라와요. 관리자 문지기가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어요. 아, 그리고 희주씨와 마찬가지로 삶으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진 영혼이 한 명 더 와 있어요.”


레이먼이 희주를 안내하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오전에 경호 문지기가 오늘 몇 명 모인거냐고 송수신기를 통해 누군가 대화하던 모습이 희주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레이먼과 희주는 저울에 자신의 짐가방을 올려 미련 점수를 측정하고 있는 영혼들을 지나쳐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적힌 문 앞에 다다랐다. 레이먼이 문을 열려다 말고 희주를 돌아보며 준비되었냐는 눈짓을 보내왔다. 희주도 애써 긴장된 마음을 숨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희주, 도착했습니다. 오늘 총 두 명, 모두 모였습니다.”

레이먼이 문을 벌컥 열며 말했다. 그 때였다.


“희주!”

누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희주의 이름을 불렀다. 


“세상에! 한림!”

바로 그녀와 같은 날 <댓플레이스> 입장 심사를 보고 함께 문지기로 일했던 한림이었다. 낯선 공간에서 뜻 밖에 아는 사람을 만난 희주는 안도감에 눈물이 핑 도는 것 같았다. 한림은 이런 상황에서도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고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나 희주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희주가 한림의 한 손을 덥석 잡자, 그가 반대편 손으로 희주의 손등을 토닥여주었다. 그의 손길에 하루 종일 긴장감에 웅크리고 있던 희주의 어깨가 겨우 펴져 제자리를 찾았다.


“이제 다 모였네요.”

관리자 문지기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며 호들갑을 떨고 있는 희주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한림과의 재회에 정신이 팔려 있던 희주가 관리자 문지기의 말에 현실을 자각하고 쭈뼛쭈뼛 자리에 앉았다. 


 “두 분 다 여기까지 오면서 각자 담당 경호 문지기에게 대략적인 설명은 들으셨겠지만, 두 분이 왜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앞으로 무슨 절차가 진행되는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 그 전에 따뜻한 차 한 잔씩 드세요. 걱정을 없애 주고 긴장을 완화시켜주는 따뜻한 안정 주스예요. 하루 종일 긴장 하셨을텐데, 마시면 한결 나아질겁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희주와 한림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관리자 문지기가 말했다. 그는 새하얀 테이블 한 켠에 놓여 있던 주전자와 찻잔을 가운데로 가져오더니, 능숙한 손놀림으로 찻잔에 손톱만한 알약 같은 것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녹였다. 쌉싸름하면서도 향긋한 냄새가 희주의 코 끝을 간지럽혔다. 그 향기에 차를 마시기도 전에 따뜻한 욕조안에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가듯 몸이 노곤해졌다.  


관리자 문지기는 여전히 가면을 쓰고 있기는 했지만, 재심사 때와는 다르게 한결 부드러운 말투로 두 사람을 대했다. 희주는 뭔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아우라를 가진 한림이 옆에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였더라면 분명 이런 친절한 대접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희주와 한림은 말없이 관리자 문지기가 권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가장 궁금해하실 내용부터 말씀드리죠. 두 분이 여기로 오게 된 이유는 이것 때문입니다.”

관리자 문지기가 테이블 아래에 놓여 있던 <죽음의 시계> 두 개를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희주와 한림의 것이었다. 


“보시다시피, 두 분의 죽음의 시계는 거의 멈춰 있습니다. 희주씨,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나요?”

관리자 문지기가 희주를 콕 집어 물었다. 희주는 마치 딴짓을 하다가 선생님께 걸린 학생처럼 흠칫 했다가, 이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죽음의 시간이 모두에게 다르게 흐른다는 것은 알고 있죠? 죽음의 시간은 인간 세상의 시간과는 달리 선형으로 흐르지 않아요. 누군가는 이 시간이 아주 빠르게 흐르고, 누군가는 이 시간이 거의 멈춰 있는 것처럼 흐릅니다. 그런데, 두 분의 죽음의 시계는 아직 아래 쪽으로 떨어진 액체의 양이 매우 적습니다. 그 속도도 매우 느리고요. 다시 말해.”


관리자 문지기가 잠시 말을 멈추고 심호흡을 한 번 ‘후.’하고 뱉었다.

 “두 분의 죽음이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아직까지 인간 세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범위에 있다는 거죠.”


 그는 누군가 들으면 안되는 이야기라도 하듯,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희주와 한림의 반응을 기다리는 듯 했으나,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한림은 팔짱을 낀 채 의심스러운 눈으로 문지기를 바라보았고, 희주는 할 말을 잃은 채 입을 떡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재미있구먼.”

 긴 침묵을 깨고 한림이 말했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서서히 거닐기 시작했다. 한림의 발걸음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난 이미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남은 마음>의 무게를 측정했고, 결과에 따라 <댓플레이스> 심사를 보기로 선택했수다. 물론, 예상과는 다르게 세 번이나 심사에 탈락하긴 했지만. 그런데, 다시 한번 인간 세상으로 돌아갈 기회가 생겼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이 곳은 상당히 규칙이 제 멋대로구먼.”


 한림이 안정 주스를 한 모금 들이키며 느긋하고 여유롭게 말을 이어갔다. 희주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한림이 대놓고 해버리자, 그 동안 명치에 걸려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것 같았다. 희주는 관리자 문지기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한 쪽 입꼬리를 올려 피식거렸다.


 “아, 충분히 그렇게 느끼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수 많은 문지기들 중에 두 분만 이 곳에 앉아 있는 것을 보면 예상 하실거라 생각해요.”

 관리자 문지기가 한림의 공격적인 발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첫 번째 조건은 다시 돌아갈 수 있을 정도로 죽음의 진행이 느릴 것. 즉, 회복 가능한 신체일 것. 두 번째 조건은 세 번 이상 심사에 탈락할 것.”

 “회복 가능한 신체라고요? 지금 내 몸이 어떤 상태인데요?”


 회복 가능한 신체가 조건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란 희주가 관리자 문지기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희주는 그의 몸이 당연히 썩어 버렸거나, 아니면 가루가 되어 바닷속 여기저기를 유영하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회복 가능한 신체라니?


 “모니터링을 담당하고 있는 문지기의 말에 따르면 희주, 당신의 몸은 아직 병원에 누워 있습니다. 당신은 현재 코마상태예요.”


- 다음 장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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