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장편 소설] 댓플레이스 (That Place)
관리자 문지기의 말에 희주가 ‘헙!’하고 외마디 비명을 내뱉으며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직까지 그녀의 몸이 병원에 누워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희주에게는 그녀의 생명 연장을 결정할 가족이 없었다. 가족 비스무리한 로봇 리노가 있긴 하지만, 그에게는 의사 결정권이 없다. 게다가 사고 당시의 고통과 충격이 워낙 강렬했기 때문에, 현장에서 즉시 사망 후 삶과 죽음의 경계로 넘어왔을 것이라 어렴풋이 생각해왔다.
“마, 말도 안돼.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병원에 누워 있었다고요?”
“긴 시간이 아니에요. 정확하진 않지만, 인간 세상 기준으로는 당신이 죽은 지 고작 3주 남짓 되었을거예요. 이 죽음의 시계가 그 증거죠.”
관리자 문지기가 희주의 죽음의 시계를 들어 살짝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시계 안에 들어있는 검보랏빛 액체가 무지개 빛을 내며 영롱하게 반짝였다.
“한림,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의 신체도 아직 병원에 누워있어요. 생명 유지 장치를 잔뜩 달고 말이죠. 물론, 희주와는 환경이 조금 다르긴 합니다.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최고급, 최신식 의료 장비를 갖춘 병원에서, 세계적인 의사들이 번갈아 가며 당신의 상태를 24시간 모니터링하고 있어요. 그 덕분에 죽음의 시계가 아주아주 천천히 흐르고 있고요.”
관리자 문지기의 말에 한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희주와는 다르게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듯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는 한림이, 희주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물론, 인간 세상으로 돌아갈지 말지는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이 곳에 계속 남아서 다음 재심사를 기다려도 괜찮아요.”
“그, 그럼, <남은 마음> 무게 측정을 다시 해야 하는 건가요? 만약 인간 세상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이 곳에서의 기억은 어떻게 되죠?”
희주가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물었다. 한림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정한다면 물론 망각주스를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남은 마음> 무게는 다시 측정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미련, 여한, 걱정 같은 것이 담겨 있던 짐 가방은 <댓플레이스> 심사대로 넘어가면서 모두 소멸됐어요. 뭐, 엄밀히 말하자면 인간 세상에 누워있는 여러분의 신체가 미련이 많은 상태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관리자 문지기가 어깨를 으쓱하며 농담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스갯소리가 나오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자다.
“당신의 결정이에요.”
그의 단호한 말이 희주의 머리 속을 거칠게 헤집으며 들어왔다. 다시 돌아가는 것이 과연 좋은 선택일까? 코마 상태라면, 깨어 난다고 해도 예전처럼 건강하게 지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사고 당시 수십개의 파편이 얼굴로 날아 들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 문자 그대로 살이 찢기는 고통이었다. 예상컨대, 얼굴은 이미 엉망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내가 깨어난다면 다시 또 지루하기 이를데 없는 삶, 살아 있기에 살아가는 삶, 죽을 수는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아득바득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엠마의 매니저로 일을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지금쯤 엠마는 테러로 엉망이 됐던 얼굴을 완벽하게 성형한 후, 회복했을 것이다. 물론, 새로운 매니저도 구했을 것이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희주는 괜히 입맛이 씁쓸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 곳에서는 언젠가 <댓플레이스>에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비록 세번이나 심사에 탈락했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심사에 통과할 수 있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지만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희주가 자신은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난 돌아가겠수다. 인간 세상으로.”
한림이 먼저 무겁게 입을 떼었다. 그 말에 희주가 ‘휙!’하고 소리가 날 정도로 몸을 돌려 한림을 바라보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죽음이었거든. 내가 이미 짜 놓은 죽음의 계획이 있었는데 말이지. 그 계획대로 착착 진행됐더라면 지금 내가 이렇게 세번이나 심사에 탈락할 일은 없었을게요. 인간 세상에 돌아가서 내가 계획했던 일들을 마치고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죽는다면, 그때는 내 판단과 계획이 옳았는지 정말로 알 수 있지 않겠소?”
한림이 이미 두 번째 인생을 경험한 사람처럼 태연하게 말했다.
“아니, 한림. 어차피 그건 당신이 결국 죽어야만 알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걸 위해 저 머리 아픈 인간 세상으로 다시 돌아간다고요?”
희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한림은 엄청난 부를 축적한 사람이라서 그런지, 인간 세상으로 돌아갔을 때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막막함은 없는 것 같았다. 그보다는 좀 더 고차원적인 문제, 자신의 생각대로 인생의 계획이 맞아 떨어져 가는지 증명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희주는 ‘역시 한림, 평범한 사람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인간 세상으로 되돌아갈 기회가 생겼음에도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망설이고 있는 자신의 처지에 한숨이 나왔다.
“희주, 생각해보구려. 자네도 갑자기 죽지 않았더라면, 더 다양한 인생을 경험했을거고, 그에 따라 <댓플레이스> 입장 심사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여기에서 언제까지 주구장창 재심사만 받고 있을겐가? 자네 친구 민수 말일세. 그 친구도 지금 끝도 없이 재심사를 받는 중이라지 아마?”
한림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이미 결심이 섰는지 입을 앙다문 채 관리자 문지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자 문지기 역시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하고, 테이블 서랍을 열어 망각주스를 꺼냈다.
“망설여봤자 좋을 거 하나 없수다. 내가 인간 세상에서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사업가이자 투자자로 살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지. 빠르고 완벽하지 않은 결정이 느리고 완벽한 결정보다 나은 경우가 숱하다우.”
한림이 망설임 없이 망각주스 통을 들어 뚜껑을 열며 말했다.
“좋습니다. 빠르게 결정하셨네요. 아, 그리고 함께 지냈던 문지기들과 작별 인사할 시간을 드리지 못한 것은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인간 세상으로 돌아갈 기회는 극소수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에, 다른 문지기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있어요. 이런 규정이 있다는 게 알려지면 파장이 상당할 겁니다. 그들에게는 보직이 변경되어 이동한 걸로 이야기가 될 거예요.”
관리자 문지기도 역시 망설임없이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한림의 죽음의 시계 뚜껑을 열었다. 그는 시계에 담긴 검은 액체를 망각 주스 통에 붓고 살짝 흔들었다. 투명했던 망각 주스가 서서히 주황색으로 변해갔다.
“알겠수다. 이 곳 사정은 관리자들이 알아서 처리하겠지. 이제 망각 주스를 마셔도 되겠수? 매번 심사하면서 망각 주스 마시는 방법을 설명하기만 했었는데, 이제야 드디어 마셔보는구먼.”
한림이 마지막까지 여유로움을 잃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관리자 문지기가 “잘가요, 한림.”라고 마지막 인사말을 건네자 한림이 망설임없이 망각 주스를 마시기 시작했다. 끈적한 주황색 주스가 서서히 한림의 목구멍을 타고 꿀꺽꿀꺽 넘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희주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한림이 마지막 한 모금을 넘기자 눈부신 빛이 한림의 몸을 감싸더니 그의 몸에 윤슬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관리자 문지기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빛을 피했지만, 희주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똑똑히 보기 위해 눈을 똑바로 떴다. 이제 곧 한림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희주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 도착했던 그 날, 망각 주스를 마시고 강렬한 빛과 함께 사라졌던 엠마의 모습이 한림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한림의 망각 주스 통이 테이블에 떨어지며 ‘땡그랑’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마지막으로 한림이 완벽하게 사라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이미 엠마 때 한 번 목격한 장면이지만, 방금까지 대화하던 사람이 눈 앞에서 사라지는 경험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한림은 방금 병원에서 눈을 떴을 것이다. 그의 곁을 24시간 동안 지키던 의사들이 재빨리 달려와 그의 상태를 살피고 가족들에게 한림이 깨어났다며 연락을 돌릴 것이다. 한림은 기력이 없겠지만, 병상 주변에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괜찮다며 눈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림이, 몇 개월동안 희주와 함께 문지기로 일했던 그가, 모든 기억을 지우고 인간 세상으로 떠났다. 한림이 인간 세상으로 되돌아 갔다는 현실감이 급속도로 밀려오자 희주의 호흡이 마치 방금 전력 질주를 하고 돌아온 사람처럼 가빠졌다.
“희주씨?”
한 동안 멍하니 있던 희주가 관리자 문지기의 부름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이제 희주가 결정할 차례이다.
그녀는 애초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정을 했었지만, 막상 한림이 눈 앞에서 사라지고, 그가 인간 세상에서 깨어나 다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을 상상하니 마음이 갈팡질팡했다.
“저기, 이런 질문 정말 별로라는거 나도 알지만, 하나만 물어볼게요.”
결정을 하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이던 희주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관리자 문지기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이라면, 어떤 결정을 할 것 같나요? 지금까지 숱한 영혼들의 결정을 봐 왔을 것 아니에요.”
“흐음…….”
희주의 질문에 관리자 문지기가 긴 한숨을 내뱉었다. 희주는 질문을 해 놓고 금방 후회했다. 이런 중요한 결정을 다른 사람 입을 통해서 듣냐며 한 소리를 들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라면 돌아갔을 거예요. 심사에 세번이나 탈락했다면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뜻일 테고, 만약 그 중요한 것이 인간 세상에 있는 거라면, 한번은 되돌아갈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어차피 이 곳에서의 기억은 지워질 테니, 당신은 그저 잠시 코마 상태에 빠졌다가 기적처럼 다시 살아나게 된 것, 그 뿐이니까요.”
희주의 예상과는 다르게 관리자 문지기가 진지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가 이렇게 길게 말하는 것은 처음보는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다정한 그의 말이 커다랗게 부풀어 희주의 어깨를 감싸 안는 것 같았다.
희주는 눈을 감고 그녀가 놓쳐버린 중요한 것은 도대체 무엇일지 생각했다. 막연하게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열심히 산 사람들이 <댓플레이스> 입장 심사에 통과할 수 있으리라 생각 했지만 모두 틀렸었다. 심사대는 자기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한 어떤 요소를 바탕으로 심사를 진행하고 있었고, 희주는 그것을 알 듯 말 듯 했지만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 희주의 가슴 속에 그 ‘중요한 것’을 알아내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아직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세상이 있어요.”
한 동안의 정적이 흐른 뒤, 관리자 문지기가 말했다. 그 말에 희주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저도…… 인간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겠어요.”
희주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을 다시 귀로 들으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관리자 문지기는 고개를 끄덕하고 희주의 죽음의 시계를 열어 망각 주스와 섞었다. 희주는 테이블 위에 놓인 망각주스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제 주스를 마시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병원에서 눈을 뜨고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희주는 관리자 문지기와 결정을 확인하는 마지막 눈빛을 교환한 후, 크게 한번 심호흡을 하고 망각 주스를 입에 갖다 대었다. 주스통을 천천히 기울이는 순간까지도 이게 맞는 선택인지 헷갈렸지만,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망각 주스를 한 모금 넘겼다.
주스의 묵직한 질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희주는 마음 속으로 숫자를 거꾸로 세었다. 10, 9, 8……. 숫자가 하나씩 작아질수록 머릿속에 연기가 가득 찬 듯 아득해지며 이 곳의 기억을 잊는 것에 대한 공포감이 엄습했다. 7, 6, 5……. 희주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생각이 스치며 주스통을 내팽개치고 싶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긴장감에 아무리 주먹을 꽉 쥐려고 해봐도 당최 주먹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마치 효과가 강력한 수면제를 먹은 것처럼 참을 수 없는 졸음이 쏟아졌다. 4, 3……. 희주는 결국 숫자를 끝까지 세지 못했다.
“희주야, 한희주! 내 말 들려? 선생님! 여기요!”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웅성이다 이내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안개 낀 듯 눈 앞이 뿌옇게 변하면 그에 따라 ‘삐이’ 하는 이명이 들렸고, 눈 앞에 무언가 아른거리기 시작하면 여럿이서 멀리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수명을 다 한 조명이 깜빡거리는 것처럼 의식이 들어왔다가 흐릿해지기를 반복하더니 어느 새 깜빡임이 잦아 들었다. 희주의 눈 앞에서 낯익은 얼굴이 잔뜩 흥분한 상태로 희주의 이름을 쉴 새 없이 외쳤다.
“에… 엠마…….”
창백했던 희주의 얼굴에 조금씩 핏기가 돌면서 꽉 막혀버린 그녀의 목구멍을 비집고 쇳소리가 겨우 새어나왔다. 깨어난 그녀를 가장 처음 맞이한 사람은 엠마였다.
“희주야 정신이 들어? 왜 이렇게 오래 걸린 거야……. 진짜 죽는 줄 알았잖아!”
엠마는 아직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희주를 향해 소리 지르며 그녀를 와락 껴안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같은 병실에 있던 사람들이 엠마를 알아보고 힐끔거렸지만, 엠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성통곡을 했다.
<톨레랑스 영화제>에서 발생했던 테러 당일. 엠마와 희주는 손쓸 새도 없이 현장에서 의식을 잃고 말았다. 다행히 엠마는 폭발물 바로 인근이 아닌 시상식 무대 근처에 있었던 덕분에 잠시 의식을 잃었다가 병원으로 이송되는 중에 깨어났다.
그러나 폭발물의 충격을 그대로 흡수했던 희주는 병원으로 빠르게 이송되었으나, 결국 코마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사고의 충격으로 엠마는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회복에만 전념하였고, 희주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그녀의 곁을 지켰다.
희주가 코마 상태에 빠진 지 약 3주가 지났고, 의료진들은 엠마에게 희망을 버리라고 했지만, 엠마는 하루만 더, 이틀만 더, 하며 희주가 깨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문병을 왔다가 희주의 손끝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희주를 불러 깨운 것이다. 황급히 달려온 의료진들이 “정말 기적입니다.” “전혀 가망이 없던 환자였는데 이렇게 깨어나다니…….”하며 엠마와 함께 눈물을 글썽거렸다. 엠마를 비롯한 의료진들의 호들갑에 희주의 의식이 서서히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희주의 얼굴이 또다시 급속도로 창백해졌다.
‘……뭐지……?’
희주는 기운 없이 축 늘어진 팔에 겨우 힘을 주어 자신의 얼굴로 가져갔다. 희주는 손바닥으로 서서히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오돌토돌한 요철이 느껴지는 퍼석한 피부결, 관리되지 않은 수북한 눈썹, 부스스하게 풀어헤친 단발머리, 유난히 튀어나온 목젖까지, 신체의 모든 촉감이 온전히 느껴졌다. 피부의 온기가 손바닥에 닿는 생생한 느낌이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 찌릿하여 희주는 소스라치고 말았다.
‘몸에 온기가 생겼어…….’
희주는 얼굴을 만지던 양 손을 서서히 가슴과 배, 다리로 내리며 자신의 몸을 만졌다. 뻣뻣한 환자복의 질감이 느껴졌다.
‘내 문지기복은……?’
희주는 다시 손을 올려 자신의 삐쩍 마른 입술을 매만졌다. 비릿한 망각 주스의 끝 맛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의 그녀의 뇌를 새 것으로 갈아 끼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망각 주스를…… 다 못 마신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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