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장편 소설] 댓플레이스 (That Place)
나는 한 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지난 8년간 점점 희미 해져가는 그녀의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 매일같이 기억의 끄트머리를 애써 잡아 내어 붙잡아 두었던 덕분이다. 층을 많이 낸 짧은 단발머리지만 윤기가 흐르는 머릿결. 눈을 동그랗게 위로 치켜 뜰 때만 보이는 옅은 쌍커풀. 나사 하나 빠진 듯 샐쭉거리며 온갖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누구보다도 이성적인 태도로 상황을 정리하는 카리스마. 그리고 오로지 나에게만 보여주었던 사랑스러운 모습들. 혼자 지냈던 8년의 시간이 쉽지는 않았는지 그녀의 손등은 거북이 등껍질 마냥 쩍쩍 갈라져 있었지만 내가 사랑했던, 늘 살짝 오므라든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귀엽고 아담한 손가락만큼은 여전했다.
“말도 안돼……. 이, 이거…… 고장 난 거 아니에요!?”
그녀는 점수판에 또렷하게 새겨진 ‘23점’이라는 숫자를 보며 잠시 영혼이 나간 듯 -이미 영혼인 상태이긴 하지만- 멍 해졌다. 그러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나의 양 팔을 마구 흔들며 소리쳤다. 내 옆에 있던 경호 문지기들이 잔뜩 흥분한 그녀를 얼른 끌고 가지 않았더라면, 나는 참지 못하고 내 코 앞으로 다가온 그녀를 힘껏 안아 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차라리 점수가 확 낮아진 것도 아니고 왜 똑같이 23점이냐고요! 왜!!!”
그녀는 경호 문지기들에게 끌려 가면서도 계속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그녀의 말 대로 차라리 몇 점이 확 낮아졌더라면 뭔가 변화가 있다는 신호이니 오히려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미동도 없는 ‘23’이라는 숫자가 그녀의 가슴을 후벼 파고 들어갔을 것을 생각하니, 이미 8년 전에 잊었던 고통의 감각이 되살아 나는 듯하다.
새하얀 눈이 하늘을 검게 덮쳤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인간 세상의 마지막 모습이다. 순식간에 산 꼭대기에서부터 밀려온 눈덩이와 얼음들로 시야가 사라졌고, 곧 이어 온 땅을 뒤흔들던 굉음이 사라졌다. 코 끝을 맴돌던 흙 냄새와 상쾌하면서도 비릿한 눈 냄새도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축축한 촉감과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까지 완벽하게 사라졌다. 마지막 남은 가느다란 의식 끝에서 희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산에 갔다가 언제 돌아오냐며, 몇 달 동안 보고 싶어서 어떻게 기다리냐며, 이번만 안 가면 안되냐며 늘 같은 투정을 부리던 그녀의 얼굴이.
산악인으로 살면서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수십년의 세월동안 산전수전을 겪으며 실제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고, 그 때마다 이미 나의 수명은 내 것이 아니라 빛 진 것이라 생각하며 산에 올랐다. 그러다 희주를 만났고, 나는 그 동안 산에 오르면서 언제고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했던 내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고 얄팍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녀를 두고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 이 곳에서 <댓플레이스> 입장 심사를 봤을 때, 보기 좋게 탈락했다. 내가 산 것인지 죽은 것인지 판단조차 안되는 상황에서 떠밀리듯 엉겁결에 본 심사였는데, 그 때 탈락했던 것이 천만 다행이지 뭔가. 그때 <댓플레이스>에 들어 갔더라면, 지금 이렇게 희주를 다시 볼 수는 없었을 테니까.
<댓플레이스>에 들어가기 전 망각주스를 마시면 인간 세상에서 있었던 기억들이 지워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죽음의 순간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기에 그 순간만은 지우고 싶었지만, 희주의 얼굴까지도 지우고 싶지는 않았다. 주변 문지기들이 어차피 <댓플레이스>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다 잊고 새로 시작하는 건데 그만 내려 놓으라며 계속해서 심사를 보라고 권유했지만,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나는 결국 희주를 기다리기로 했다. 관리자 문지기로 일하면서 심사를 유예하기로 한 것이다. 알아보니 생각보다 나와 비슷한 이유로 문지기로 남아 있는 이들이 꽤 많았다. 그런 이들은 일정 기간 교육을 거친 후, 관리자로 일하게 된다. 관리자들은 일반 입장 심사를 진행하지 않고 각종 관리 업무를 한다. 각종 주스 제작 및 재고 관리, 일반 문지기들의 숙소 배정과 정리, 의사 결정을 위한 회의체 운영 등등. 관리자들의 일은 생각보다 빡빡했다. 한 평생 산악인으로 살아왔던 나는 이런 행정 업무들이 너무 생소해서 적응하는데 꽤나 시간이 걸렸다.
여러 보직을 거쳐 현재 나는 심사대 보수 공사와 문지기들의 재심사 진행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심사대는 생각보다 보수 공사할 일이 많았다. 특히,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사용하는 <남은 마음>무게 측정 저울이 말썽이었는데, 무게를 확인한 영혼들이 저울을 발로 차며 화풀이하는 경우가 많아서 자주 망가진다. 그 곳에도 <댓플레이스> 입장 심사대처럼 저울이 필요 없는 심사대 공사를 해야 하는데, 공사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쉽사리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공사를 위해 심사대 몇 개 운영을 잠시 중단 했다가는 밀려드는 심사 일정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저울과 모니터 같은 비품은 인간 세상의 발전 속도에 맞추어 지속적으로 개선을 해주어야 했다. 이를 테면, 셀 수 없을 만큼 오래 전에는 나무로 만든 양팔 저울을 사용했고, 스프링 저울을 거쳐, 지금처럼 디지털 방식의 저울을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모니터 화면에 점수를 띄우는 대신 종이에 단단한 숯으로 점수를 써서 보여주기도 했다고 한다. 갈수록 인간 세상의 발전 속도가 빨라져서 따라가기 힘들 정도다.
문지기들의 재심사 진행 업무는 딱히 신경 쓸 일이 없었지만 그만큼 지루하기도 했다. 여느 때와 같이 지루하게 재심사를 진행하고 있던 날, 내 눈앞에 희주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나를 밀치고 난동을 피우면서.
내 예상대로 희주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두 번째 심사 결과에 순응하지 않고 소란을 피웠다. 뭐, 그 동안 겪어왔던 각양각색의 난동들에 비하면 귀여운 축에 속하긴 했다. 하지만 그녀의 난동으로 내 가면이 벗겨지는 바람에 하마터면 내 정체가 탄로날 뻔했고, 그랬더라면 나는 징계를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규정에 따라 그녀의 심사 순번을 맨 뒤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희주는 내 예상을 뛰어넘어 심사 순번을 맨 뒤로 보내는 대신 초과 근무를 제안했다. 경호 문지기를 통해 그녀의 제안을 전해 들은 나는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역시 희주는 보통 여자가 아니다. 인간 세상에서도 그녀의 순발력과 기지는 위기 상황에서 더욱 빛났었다. 나는 마지못해 수락하는 척하며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희주는 감사하다는 말도 없이 콧방귀를 뀌며 숙소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주머니에서 삐죽 튀어나와 있던, 내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물건 하나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바로 <죽음의 시계>였다.
“이봐, 라비.”
나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최대한 인기척을 내지 않고 모니터링실에 들어가 라비를 불렀다. 그 바람에 두 발을 책상 위에 올린 채 아주 불량한 자세로 의자에 늘어져 앉아 있던 라비가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나다가 의자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물론 전혀 아프지 않았을테지만 그는 마치 엄청난 고통을 맛본 것처럼 오만상을 지었다.
“뭐야, 자네 전 부인집이라도 염탐하고 있었던거야? 자네 없이 잘 먹고 잘 사나 보려고?”
내가 넘어진 라비를 일으켜 세워주며 농담조로 물었다.
“쳇, 바로 그게 내가 이 지루하고 피곤하기 짝이 없는 인간 세상 모니터링 업무를 하고 있는 단 하나의 이유라고.”
라비가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그가 빈정이 상했다는 듯 말하자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원래 인간 세상 모니터링은 사적인 목적으로 해서는 안되지만 이 곳의 감사 시스템은 그리 촘촘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니터링 담당 문지기들은 알게 모르게 보지 말아야 할 인간 세상 구석구석을 은밀히 들여다보곤 했다. 어쨌거나 라비가 전 부인집을 모니터링하다가 걸린 것은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나도 정확히 그 목적으로 라비를 찾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인데 라비,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설마 모니터링 부탁은 아니겠지? 그거라면 미리 거절이야.”
“자네가 전 부인집을 염탐하고 있는 걸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는데도?”
“뭐? 그걸로 협박이라도 할 셈이야?”
“물론이지. 고맙게도 자네가 이렇게 손수 기회를 만들어 줬는데, 그걸 그냥 날려먹으면 쓰나.”
나는 라비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내가 생각해도 참 재수없는 말투였다. 라비의 얼굴이 잠시 울그락푸르락 달아올랐다가 이내 원래 색을 되찾았다. 역시 라비는 계산이 빠른 자였다.
“뭘 보고싶은데?”
“희주의 신체 상태를 좀 확인하고 싶어.”
“설마, 희주씨의 죽음이…… 아직인거야?”
라비의 질문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비는 짧게 한숨을 푹 내쉬더니 빠른 속도로 모니터 화면을 뒤지며 희주를 찾기 시작했다. 라비의 전 부인집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던 화면이 빠르게 줌 아웃하면서 화면 가득 아프리카 대륙이 펼쳐졌다. 화면은 다시 빠른 속도로 러시아와 중국을 거쳐 한국에 포커스가 맞춰졌고, 곧 이어 서울의 한 병원으로 순식간에 이동했다.
“하!”
나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 곳에 희주가 아직 혈색이 남아 있는 얼굴로 누워 있었다. 나의 예상이 맞았다.
희주가 두 번째 심사를 마치고 숙소로 되돌아가기 위해 나에게 등을 돌리던 순간, 나는 희주의 뒷주머니에 꽂혀 있던 죽음의 시계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새하얀 문지기복에 비친 검보랏빛의 액체가 이상하리만치 시계에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죽음은 아주아주 느리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분명했고, 확실하게 확인하기 위해서는 인간 세상 모니터링을 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상태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코마인 것 같은데?”
라비가 희주의 상태를 유심히 관찰하며 말했다. 내 생각도 같았다.
“희주씨, 두 번째 심사도 탈락했다고 했지?”
“응, 맞아.”
“이 정도 신체 상태라면…… 돌아갈 수도 있겠는데?”
라비의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만약, 희주가 세번째 심사까지 탈락한다면, 인간 세상으로 되돌아갈 기회를 얻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희주에게 기회일까? 죽다 살아난 경험을 한다면 희주가 뭔가를 깨달을 수 있을까? 아니면 깨어난 후에 차라리 그냥 죽었더라면…… 하고 살아난 것을 원망하지는 않을까? 그렇다고 이 곳에 계속 남아 있다면,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채 입장 심사에서 무한대로 탈락하다가 심사 3구역, 4구역을 거쳐 끝없는 심연의 구역까지 내려가 심사를 봐야하는 굴레에 갇혀버릴지도 모른다. 머릿속이 얽히고 설킨 검은 실타래로 가득 찬 느낌이었다.
“확인해줘서 고마워 라비. 이만 가 볼게. 물론 오늘 우리 둘 다 아무것도 못 본 걸로.”
“현승.”
내가 인사를 건넨 후 모니터링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라비가 나를 불러세웠다. 나는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미세하기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가 내 눈에 아로새겨졌다.
“위험한 짓은 하지마.”
나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 The image created by CHO JUYOUNG with Midjourn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