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주영 Oct 14. 2024

[소설] 20장. 다시, 집(2)

[판타지 장편 소설] 댓플레이스(That Place)

[댓플레이스 심사 1구역]


“어어! 조심해요! 한림!”


 문지기의 경고에 반응할 새도 없이 한림이 자신이 밀고 가던 수레와 함께 그대로 바닥에 꼬꾸라졌다. 한림의 사각지대에서 급히 달려오던 다른 문지기와 제대로 부딪히면서 발생한 일이었다. 그 바람에 한림이 수레에 싣고 가던 수십개의 망각 주스 통이 바닥에 나뒹굴었고 주스 뚜껑이 열리면서 끈적하고 투명한 젤리 같은 망각 주스로 바닥이 흥건해지고 말았다.


“어머나! 정말 미안해요 한림! 이걸 어째……. 제가 얼른 가서 망각 주스 다시 가져올게요!”

한림과 부딪힌 문지기가 어쩔 줄 몰라하며 한림에게 말했다. 


“괜찮수다! 그럴 수도 있지 뭐. 급한 일 있는 거 아니었수? 여긴 내가 수습할 테니 얼른 가보시우. 아! 내 심사대가 181번인데, 가는 길에 거기에 들러서 망각주스 파손 때문에 심사를 잠시 중단한다고 좀 전해 주시우.”


한림이 별 일 아니라는 듯 손을 탁탁 털고 일어나 자신과 부딪힌 문지기에게 말했다. 그 문지기는 연신 고개를 숙여 인사하더니 얼른 181번 심사대 쪽으로 달려갔다. 한림은 걸레를 가져와 바닥에 쏟은 망각주스를 대충 닦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주스통들을 주워 다시 수레에 담았다. 


오후 심사를 위해 새 망각 주스를 운반하던 한림은 망각 주스가 모조리 쏟아지자,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이 곳에서는 자신이 인간 세상에서 했던 일들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따분하고 하찮은 일들을 해야만 했다. 망각 주스를 수레에 실어, 심지어 직접 운반해야만 했고, 하루 종일 기계처럼 심사를 진행해야만 했다. 인간 세상에서는 중요한 서류에 서명하는 것 외에 그가 직접 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한림! 이게 무슨 일이에요! 세상에…… 망각주스를 다 엎은 거예요?”

수레 옆에 앉아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한림을 깨운 것은 주스 제조실 관리자 문지기였다. 그는 교대 시간에 맞춰 이동하던 중에 바닥에 널브러진 망각 주스통과 함께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한림을 발견하고 얼른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건넨 것이었다.


“아! 미안하게 됐수다. 갑자기 다른 문지기랑 부딪혀서……. 이 망각 주스들을 다시 못 쓸 것 같아서 새로 받아야 할 것 같은데, 나 좀 도와줄 수 있겠소?”


“이런. 지금 갑자기 관리자 문지기들 회의가 잡혀서 가던 중이었어요. 한림, 제가 주스 제조실 열쇠를 줄 테니 얼른 망각주스를 가져가세요. 심사에 차질이 생기면 큰일이죠. 망각주스 가져갈 때 서류에 이름 쓰고 서명하는 거 잊지 말고요.”


“서명이라면 내가 전문이지. 고맙수다. 열쇠는 오늘 저녁에 돌려주러 숙소로 찾아 가겠소.”


주스 제조실 관리자에게 열쇠를 받아 든 한림은 주스 제조실에 도착해 열쇠로 문을 열고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한림이 문을 열고 제조실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익숙한 뒷모습 하나가 한림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분명 문지기들의 재심사를 담당하는 관리자 문지기였다. 한림이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뭔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때, 전문 투자자의 감과 호기심이 한림의 등줄기를 타고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한림은 이유 모를 짜릿한 느낌에 사로잡혀 조심스레 문을 닫고 관리자 문지기에게 다가갔다.


그는 분명 망각 주스를 제조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망각 주스에 들어가는 갖가지 원료들이 순서 없이 마구 놓여 있었고, 그 옆에 두꺼운 책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가 그 책을 힐끔거리며 작은 통에 원료들을 붓고 조심스레 섞는 것을 보아 망각 주스 제조 방법을 담은 책이 틀림없었다. 각 원료들은 딱 1회용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작은 병에 소분되어 담겨 있었고, 관리자 문지기는 그 원료 뚜껑을 따서 신중하게 배합하고 있었다. 


그 때, 문지기가 손톱만한 작은 원료병을 하나 들어 그의 눈 앞에 가까이 가져오더니 살짝 흔들었다. 투명한 병 안에 든 검은 액체는 점성이 높은 지 그가 흔들어도 크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검은 액체가 들어있는 용기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오른손으로 몇 번이나 쥐었다 폈다 하더니, 결심한 듯 바닥에 세차게 던져 버렸다. 넓은 공간에 공명이 일며, 용기가 깨지는 소리가 기분 나쁘게 울려 퍼졌다. 용기가 깨지면서 검은 액체가 바닥에서 잠시 일렁이더니 순식간에 잿빛 연기를 내뱉으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깨진 파편 중 하나가 튀어 한림의 발 밑에 떨어졌다. 한림은 그 파편을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그 파편에 써 있는 글귀를 본 한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의, 망각…… 효소?”

한림은 자기도 모르게 글귀를 읽고 말았다. 그 소리에 망각 주스 제조에 집중하고 있던 관리자 문지기가 깜짝 놀라 몸을 홱 돌려 한림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 쥐고 있던 만들다 만 망각 주스 통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여길 어떻게…….”

관리자 문지기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관리자 문지기가 망각 주스를 만드는 장면을 누군가에게 들켰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놀랄 일은 없을 것이다. 한림은 한쪽 눈썹을 치켜 뜬 채 온몸으로 당황스러움을 표현하고 있는 관리자 문지기를 말없이 한 동안 바라보았다. 어차피 이 상황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쪽은 한림이었으니, 그는 관리자 문지기의 반응을 여유 있게 살펴볼 참이었다.


“어디서부터……봤죠?”

한림의 예상대로 그는 수상쩍기 짝이 없는 대사를 뱉으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는 갑작스러운 상황을 무마하는 재주는 영 없는 것 같았다. 한림은 오랜만에 맞닥뜨린 흥미로운 상황에 온몸에 짜릿하게 도파민이 도는 듯했다.


“이 망각 효소를…….”

한림이 손에 쥔 파편을 바라보며 말을 끌었다.


“일부러 바닥에 던져 버린 것부터.”


그는 ‘일부러’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말했다. 한림의 말에 관리자 문지기가 ‘흡!’하며 짧고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는 눈알을 양쪽으로 굴리며 그럴싸한 변명거리들을 만들어 내느라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당황한 문지가가 가까스로 변명거리를 골라 말하려던 순간, 한림은 몸을 돌려 주스 제조실 문 쪽으로 향하더니 안 쪽에서 문을 딸깍, 잠궈버렸다.


“아무래도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설마…… 그 문지기가 일부러 망각 주스에 넣을 망각 효소를 빼 버린거에요?”

희주가 한림 쪽으로 소파 의자를 당겨 앉으며 말했다. 그녀는 한림이 새로 채워준 차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그의 이야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맞수다.”

한림이 한 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지만, 그의 말투에 왠지 모를 씁쓸함이 묻어나는 듯했다.


“몰래 빼돌리려다가 들킨거죠? 아니, 그걸 도대체 어디에다 쓰려고? 사실대로 말해 주던가요?”

한림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희주가 잔뜩 흥분한 채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질문을 퍼부었다. 


“그 문지기가 인간 세상에 남기고 온 다 큰 딸이 하나 있었다는군. 아주 힘들게 얻었고 힘들게 태어난 딸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사고로 죽는 바람에 <댓플레이스> 심사를 보게 되었다는구먼. 그런데 딸이 3번 심사에 탈락했고, 아직 인간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상태라는 걸 그 문지기가 알게 된 거지. 우리처럼 말일세.”


한림이 자신과 희주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희주는 여전히 자신이 사후 세계에 갔다가 되돌아왔다는 것이, 그리고 그 곳에서 만난 한림을 인간 세상에서 다시 만났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그는 딸이 다시 인간 세상으로 되돌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사후 세계의 기억을 간직한 채 돌아가게 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망각 효소를 뺀 주스를 만들었다고 하더군. 몰래 전해주려고 했던 게야.”


“세상에…… 정말 무모한 사람이네요.”

한림의 말에 희주가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희주는 자신을 인간 세상으로 되돌려 보내주었던 문지기를 떠올렸다. 그가 늘 쓰고 있던 무표정한 가면처럼, 찌르면 피 한 방울 안 나올 듯 냉랭했던 그 문지기가 그런 무모한 짓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식 앞에서는 모든 부모가 다 그렇게 무모해지는 건가 싶기도 했다. 


“무모한데다가 조심성조차 없는 친구였지.”


“그럼, 그 사람이 만든 망각 주스가 아들한테 제대로 전달이 안되고 우리에게 잘못 전달된 건가요?”


“그건 아니었소. 그 주스는 우리에게 제대로 전달된 게 맞아.”


“그게 대체 무슨 말이예요? 어휴, 답답해. 뜸들이지 말고 빨리요.”


“허허, 자네가 자꾸 말을 끊으니까 그런 거 아니우.”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던 희주가 자꾸 재촉하자 한림은 되려 더욱 여유롭게 차를 들이키며 말했다. 그는 사후 세계에서도 늘 재잘대며 수다 떨기를 좋아했던 희주의 모습이 생각나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내가 누군가? 언제 어디서든 기회를 놓치지 않고 포착하는 투자자 아니우? 그가 망각 효소를 뺀 주스를 만들어 딸에게 줄 예정이라는 것을 눈 감아주는 대가로, 내게도 똑 같은 주스를 하나 달라고 했지.”


“네에? 인간세상으로 돌아가게 될 지 어쩔지도 몰랐잖아요?”


“물론 그때는 그랬지.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써먹을 일이 있을거라 생각했다우.”


“어떻게 그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정말 대단하세요.”

희주가 멍한 표정으로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말했다.


“그렇게 그는 딸 것과 내 몫으로 망각 효소가 빠진 주스 두 통을 만들었어. 그런데 그의 딸이 인간 세상으로 되돌아가려던 날,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는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는 선택을 한거야. 애써 만든 주스가 쓸모 없어진걸세. 그 동안 나는 운 좋게, 그러고보니 운 좋게 라는 말이 좀 이상하구먼. 심사에서 3번 탈락했고, 인간 세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몸 상태라는 걸 알게 됐수다. 그래서 어차피 남은 주스이니 나에게 둘 다 달라고 했고, 그는 결국 망설이다가 나에게 둘 다 주기로 했어.”


“남은 걸 그냥 줬다고요? 완전 제멋대로네요?”


“물론 그냥 준 건 아니고. 내 설득에 넘어온게지. 내가 인간 세상에 있을 때 알아주는 사업가이자 투자자였는데, 사후 세계의 기억을 가지고 되돌아간다면 인간 세상에서 해 볼 수 있는 일들이 많을 거라고 했소. 사람들이 <댓플레이스> 심사에 더 많이 통과할 수 있도록 회사를 세우든 프로그램을 만들든, 어떻게든 힘을 써 보겠다고 했지. 그리고 이왕이면 한 사람의 이야기보다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더 설득력이 있을 테니, 내가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는 시점에 누군가 또 되돌아가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 주스를 주면 어떻겠냐고 했수다.”


“그 말에 넘어 갔다고요? 그 문지기 엄청 원칙주의자처럼 굴더니, 뭔가 좀 허술한데요?”

희주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뭐, 요약하다보니 그렇게 들릴 수 있겠지만 내 화려한 언변에 넘어오지 않고는 못 배겼을 게요.”


“어쨌거나…… 덕분에 그 주스가 저한테 온 거군요.”

한림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희주가 혼잣말처럼 얼버무렸다. 숱한 우연을 거쳐 망각 효소가 빠진 주스를 마시고 기억을 가친 채 인간 세상으로 돌아오게 된 사건이 마치 운명처럼 느껴졌다. 


희주는 누구인지 모를 관리자 문지기의 딸을 떠올렸다. 희주도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 세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망설였기에 그녀의 결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면서도, 그 결정으로 인해 바뀌어 버린 자신의 운명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자네 의견은 들어보지도 않고 마음대로 결정한 건 미안하게 생각하네.”

희주가 한 동안 말이 없자, 한림이 그녀의 눈치를 슬쩍 보며 사과했다.


“아, 아니에요! 그런 의미가 아니고……”

생각에 빠져있던 희주가 화들짝 놀라 양 손을 내저었다. 두 사람은 한 동안 말이 없었다.


“자, 난 이만 가봐야겠네. 내가 깨어난 걸 축하해주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말이야. 오늘 여기에서 드디어 자네를 만났으니 앞으로 이 곳에 다시 올 일은 없겠구먼.”

한림이 오랜 정적을 깨고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가끔 연락 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지. 다만 <댓플레이스> 심사 통과에 대한 어떤 실마리라도 가져와야 연락 받을걸세. 허허.”

한림이 희주를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희주도 한림의 웃음에 옅은 미소로 화답하며 말했다. 한림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고는 먼저 짐을 챙겨 사무실 출입문으로 걸어갔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보자고. 아, 아마도 내가 빠르겠지만 답을 찾는 사람이 먼저 힌트를 주는 게 어떻겠소? 사후 세계의 인연을 생각해서 말이지.”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럼, 행운을 빌겠수다.”

한림이 희주에게 경쾌하게 손을 흔들고 미련없이 사무실 출입문을 닫았다. 


그러나 그는 막상 한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한 채 닫힌 출입문에 몸을 기대고 서서 긴 한숨과 함께 혼잣말을 내뱉었다.


“현승, 자네와 한 약속은 지켰네.”



- The image created by CHO JUYOUNG with Midjourney-


이전 20화 [소설] 19장. 다시 집(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