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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주영 Oct 16. 2024

[소설] 21장. 재회(1)

[판타지 장편 소설] 댓플레이스 (That Place)

한림을 만나고 돌아온 그날 밤, 희주는 기나긴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그녀는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핏덩이를 온 몸에 두른 조막만한 아기가 어두컴컴하지만 안온했던 어머니의 자궁에서 미끄러지며 빠져나와 첫 숨을 내뱉으며 우렁차게 울어댄다. 아기는 빠르게 자라 몸을 뒤집고, 기어 다니고, 부모의 손을 잡고 걷는다.


소녀를 거쳐 성인이 된 아이는 한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이혼을 하고, 부모를 차례로 여의고, 또다시 결혼을 하고, 남편의 배신에 자살 시도를 하고, 또다른 결혼과 남편의 죽음을 겪고 어느 영화제 시상식장에서 사고로 죽음에 이른다. 모든 순간들이 스냅사진처럼 빠르게 지나가다가 갑자기 속도를 늦춘다. 


희주는 온 몸에 파편이 박힌 채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눈썹 주변에 아프게 박혀 있는 파편 하나를 빼내어 상처를 매만진다. 그녀의 상처에 손길이 닿는 순간 희주의 눈동자에 댐처럼 물이 차오른다. 여자는 죽음의 세계로 떠났고, 그 곳에서 문지기로 일하며 영혼들의 심사를 돕는다. 심사를 마친 영혼들이 멀리서 자신들을 관찰하고 있는 희주의 눈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와 말을 건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어 답답하기만 하다. 검은 실루엣만 보이는 한 남자가 희주에게 주스를 한 잔 건넨다. 


리노는 땀을 뻘뻘 흘리며 목 놓아 울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숨이 넘어갈 듯 깔깔대며 웃기도 하는 희주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희주가 리노에게 자신을 깨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이게 도대체 몇 시간째인가? 아직 몸도 다 회복되지 않았는데 이대로 뒀다가는 큰 일이 날 것만 같아, 리노는 희주에게 한 대 콩 얻어 맞을 것을 감수하고 그녀를 깨우기로 했다. 


“희주! 그만 일어나 한희주!”

그 소리에 숨이 답답한 듯, 한 동안 끙끙거리던 희주가 ‘하!’하고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눈을 번쩍 떴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얼굴을 타고 내려와 베갯잇에 살포시 스며들었다. 


“괜찮아?”

희주가 눈을 뜨는 것을 확인한 리노가 희주에게 다가가 물었다. 희주는 겨우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침대가 땀으로 흥건했다. 


“괜찮아. 리노, 나 활력 주스 좀.”


“잠들기 전에 마셨잖아. 너무 많이 마시면 안돼.”


리노는 그 말을 하면서도 희주가 버럭 화를 낼 것 같아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희주는 별 반응 없이 어깨만 으쓱했다. 리노와 말다툼을 할 기력조차 없었다.


“커피 한 잔만 마시고 올게.”


“그냥 배달시키지 그래.”


“아니야. 정신 좀 차려야겠어. 잠깐만 나갔다 올게.”

희주는 말리는 리노를 뒤로 하고 비틀거리며 겉옷을 입었다. 자면서 식은땀을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몸이 으슬으슬했다.


희주는 여전히 몽롱한 상태로 집 앞 카페로 향했다. 사장님 혼자서 운영하느라 종종 음료가 늦게 나오기도 했지만 커피가 입맛에 맞아 출근할 때마다 습관처럼 들르던 곳이었는데, 사고 후에는 처음이었다. 보통은 아이스 커피를 마시지만 지금 같은 몸 상태로 차가운 걸 마셨다가는 몸 상태가 바로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아 따뜻한 커피로 주문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커피 나왔습니다.”

카페 주인이 희주를 알아보고 친절하게 인사를 건넸지만 희주는 대충 고개만 한번 끄덕이고 테이크아웃 잔을 받아 얼른 커피 한모금을 들이켰다. 뜨끈한 커피가 온 몸에 스르르 퍼지며 머릿속을 가득 채운 희뿌연 안개들까지 밀어내는 느낌이었다. 한숨을 후- 하고 내뱉자 그제야 몽롱했던 정신이 좀 맑아지는 것 같았다. 희주가 카페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앗 뜨거!”

희주는 누군가와 부딪히며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옷에 모조리 쏟고 말았다. 아기 엄마가 유모차를 끌며 카페 문을 열려고 낑낑거리다가 희주와 부딪히고 만 것이다. 


“어머 어떡해! 죄송해요!”

아기 엄마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사과하고 얼른 닦을 것을 찾아 나섰다.


“조심 좀……!”

커피를 죄다 쏟은 희주가 순간 짜증을 내며 조심 좀 하라고 말하려는 순간, 유모차에 누워 있던 아기와 눈이 마주쳤다. 아기는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생글생글 웃고만 있었다. 아기의 검은 호수 같은 눈이 희주의 시선을 빨아들였다. 


희주는 순간 묘한 기시감에 휩싸이며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뜨고 아이의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했다.


‘안녕하세요?’


분명 아기의 목소리였다. 아기는 말을 할 줄 모르는 신생아가 분명했고, 더군다나 입술은 옴짝달싹하지도 않고 잔잔한 미소만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어디선가 똑똑히 들려온 아기의 목소리에 희주는 흠칫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 때, 유모차에 앉아 있던 아기의 얼굴이 희주가 사후 세계에서 만났던 아기의 얼굴과 겹쳐져 보였다. 희주의 온 몸에 소름이 타고 올랐다. 


‘아가…… 안녕?’

희주는 무릎을 굽혀 유모차에 누워있는 아기에게 눈높이를 맞추고, 그 때처럼 정신을 집중하여 마음 속으로 말을 걸었다. 그러나 아기에게 되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아기는 희주가 마음에 드는지 고사리 같은 양손을 위로 뻗으며 꺄르르하고 웃기만 했다.


“정말 죄송해요. 이걸 어째.”

휴지를 가지러 갔던 아기 엄마가 허겁지겁 다가와 희주의 옷을 황급히 닦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나가실거죠?”

희주는 휴지로 옷을 대충 닦고 아기 엄마가 유모차를 끌고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카페 문을 잡아주었다. 


“아기가 참 예쁘네요.”

아기 엄마는 연신 고개를 숙이고, 세탁비를 꼭 청구하라며 연락처를 남기고 떠났다. 희주는 카페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서 그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희주의 머릿속에 그녀가 문지기로 일하면서 만났던 이들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그 중 그녀에게 심사 점수 100점의 충격을 안겨줬던 아기의 얼굴이 유난히 생생했다. 분명 방금 만난 아기와는 다른 얼굴이었지만, 유난히 검고 맑았던 눈동자가 닮아서인지 그 아기가 인간 세상에 다시 태어나 그녀와 재회한 것만 같았다. 그들을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렸다.


“리노, 사람 좀 찾아줄 수 있어?”

집으로 돌아온 희주가 리노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리노는 집을 나갈 때와는 다르게 희주의 컨디션이 한결 나아 보여 안심이 되었다.


“정보가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다르지. 누구를 찾는데?”


“내가 사후 세계에서 만났던 사람들. 그 유족들이나 주변 사람들을 좀 만나보고 싶어.”


“뭐? 유족들을? 뭐하러?”


“한번쯤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 거기서 만났던 문지기들의 이야기를 유족 들에게 슬쩍 전해주고 싶기도 하고. 특히 댓플레이스 심사에 한번에 통과했던 사람들이 인간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리노는 희주의 말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리노가 고개를 움직일 수 있었다면 아마도 좌우로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리노는 그게 도움이 되려나…… 하면서도 누굴 제일 만나보고 싶어? 어느 나라 사람이야? 설마 외국까지 나갈 건 아니지? 인상 착의는? 직업은 알아? 학교나 회사 같은 정보가 있으면 쉽게 찾을 수 있을텐데, 하며 의지를 불태웠다.


희주는 기억을 더듬어 리노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막상 구체적으로 유족을 특정할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한 프로필이 기억나는 사람은 드물었다. 희주는 이럴 줄 알았으면 심사자들의 프로필이 적힌 책을 복사해 두는 건데…… 하고 생각했다가, 곧 어처구니없는 생각임을 깨달았다. 


리노가 실제로 만나볼 수 있을 만한 유족들의 목록을 추려주었다. 목록을 쭉 확인하던 희주의 시선이 한 곳에 꽂혔다. 로봇 스테이션. 미즈키가 한 평생을 바친 곳이었다. 희주는 오랜만에 미즈키를 떠올렸다. 작은 체구였지만 누구보다 강단 있고, 누구보다 따뜻했던 미즈키. 미즈키는 자신이 회사 동료들을 너무 몰아붙인 것 같아 미안하다는 말을 종종 하곤 했었다. 


“여기부터 가봐야겠어.”


“여기 일본이야! 비행기 티켓값 괜찮겠어?”

희주의 지갑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리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티켓이…… 얼만데?”

희주는 당장이라도 일본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과는 다르게 비행기 티켓값조차 괜찮지 못한 자신의 지갑 사정에 한숨이 푹 나왔다.


“그러지 말고 로봇스테이션 한국 지사에 한번 연락해보자! 미즈키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아! 그러면 되겠다! 쓸만해 리노!”


리노의 아이디어에 희주가 손뼉을 탁! 쳤다. 쓸만하다는 말은 근래에 리노가 희주에게 들어본 최고의 칭찬이었다. 리노는 얼른 로봇스테이션 한국 지사로 연락했고, 일본에서 한국으로 파견 근무 중이던 미즈키의 동료와 미팅 약속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해주었다.




[로봇스테이션 한국 지사]


희주는 로봇스테이션 건물 1층 카페에서 미즈키의 동료를 기다렸다. 잠시 후, 단정한 차림새의 한 여자가 희주 쪽으로 걸어왔다. 얼굴만 봐서는 미즈키 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것 같았다. 희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를 맞이하며 동시통역기를 실행했다.


“안녕하세요? 콘도 이치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미즈키의 한국 친구 한희주라고 합니다.”


“미즈키에게 한국 친구가 있는 줄은 몰랐어요. 워낙 주변에 친구도 없고 일 밖에 모르던 사람이라…….”


“네, 서로 업무 차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어쩌다 보니 가까워졌어요.”

희주가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그런데 저는 왜 찾아오신 건가요?”


“그게…… 실은 미즈키의 이야기를 좀 전해주고 싶어서요.”


“네?”


“미즈키가 저한테 회사 이야기를 종종 했어요. 특히, 이치카씨 이야기를 많이 했었고요.”


“미즈키가 제 이야기를요?”


“네. 미즈키가 그렇게 죽기 전에, 자기가 일하면서 동료들을 너무 힘들게 한 것 같아 미안하다는 말을 했었어요. 자기가 좀 더 챙겨줬어야 했는데, 일만 밀어붙인 것 같다고요.”


“…… 미즈키가 그런 말을 했다고요?”

이치카는 희주의 말끝마다 놀라며 눈을 점점 동그랗게 떴다. 이치카는 한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기운이 감돌자 희주는 시간 내줘서 감사하다며, 전화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 만나서 전해주고 싶었다며 자리를 정리하려 했다.


“사실 많이 힘들었어요. 서운했어요 미즈키한테.”

희주가 먼저 의자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이치카가 입을 열었다. 


“미즈키와 업무 차 알게 된 사이라고 하셨으니 이미 잘 아시겠네요. 지독한 워커홀릭이잖아요.”


이치카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미즈키에 대한 서운함이 그렇게나 컸던걸까? 인간 세상에서의 미즈키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죽은 후에도 원망을 들을 정도로 지독한 사람이었던걸까? 희주는 사후 세계에서 자신이 유일하게 마음을 터 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상대였던 미즈키의 진짜 모습이 혼란스러웠다.


“과로사로 죽을 만큼 힘들었는데도 주변 사람들한테 힘들다는 말 한마디 안 했어요. 정말 경주마처럼 눈 양 옆을 가린 채 앞으로 달리기만 했어요. 그렇게 가버리면 남은 사람들은 어쩌라는건지……. 죄송해요. 잠시만.”

이치카의 목소리가 떨리며 눈가에 맺힌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이치카는 얼른 양해를 구하고 테이블에 놓인 티슈로 대충 눈물을 훔쳤다.


“뒤에서 미즈키를 욕하는 사람들도 많았거든요. 사실 저도 그 중한 명이었고요. 그런데 미즈키가 죽고 난 후에 그녀의 자리를 정리하면서 평소에 남겨 두었던 자료들, 동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고 만들어 놓은 기록들을 보면서 미즈키가 정말 회사일에, 그리고 동료들에게도 진심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다만, 그 방법이 너무 주변 사람들과 미즈키 자신을 힘들게 했을 뿐이었죠.”


이치카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겨우 말을 이어갔다. 희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미즈키는 정말 진심이었을 것이다.


“미즈키가 당신을 정말 아꼈던 것 같아요. 진심으로 잘 되고 성장하길 바랐죠.”

희주가 말했다. 미즈키 대신이었다. 이치카도 희주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미즈키를 원망하세요?”


“아니에요. 정말로요. 미즈키의 진심을 이제 알 것 같아요. 이렇게 찾아와줘서 고마워요 희주씨.”


“미즈키 이야기 들려줘서 제가 더 고마워요. 이치카도 너무 회사 일에만 몰두하지 말고, 조금만 자신의 삶을 넓게 되돌아보면 좋겠어요.”

희주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이 이런 이야기를 남한테 할 자격이 되는지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띠링’

그때 스마트칩의 알람이 울렸다. 리노가 보낸 메시지였다.


‘최은정의 보육원을 찾았음. 보육원 화재에 대한 단신 기사를 보낼테니 확인해 보기 바람.’


‘이 화재로 보육원장 최은정 OO (52세)가 사망했다. 그녀는 보육원 아이들을 대피시키고 자신은 끝내 빠져나오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최은정. 자살로 생을 마감한 민수에게 이야기를 들었던 보육원 친구였다. 같은 보육원 출신이었지만 정반대의 삶을 살았던 두 사람. 희주는 은정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최은정에게는 가족이 없었기에 집주소가 한 보육원으로 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녀의 생을 문자 그대로 불태웠던 보육원이리라. 희주는 이치카와의 만남을 얼른 마무리하고 리노에게 연결했다.


“기사 내용 보니까 맞는 것 같아. 민수에게 들은 내용 그대로야. 보육원 화재로 은정이 사망했다고 했어. 위치가 어디야?”


“여기 보육원 주소가…… 울진이야. 괜찮겠어? 여기 박수한 그 자식이 내려갔다고 했었잖아.”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울진이 얼마나 넓은데. 리노, 나 여기에서 바로 울진으로 갈게.”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희주는 리노의 걱정에 대답도 없이 연결을 끊어 버리고 곧장 은정이 운영하던 보육원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리노는 희주의 쇠약한 몸 상태가 걱정이 되었지만, 희주는 오히려 집 안에 누워 있을 때보다 에너지가 도는 듯했다. 


은정이 운영하던 보육원은 인적이 드문 조용한 바닷가 마을에 위치하고 있었다. 희주는 엠마에게 부탁해 차를 빌렸고, 엠마는 어서 바람 좀 쐬고 오라며 흔쾌히 로봇스테이션으로 차를 보내주었다. 희주는 리노에게 받은 보육원 주소로 목적지를 설정하고 잠시 눈을 붙였다. 어느 덧 창문으로 노을 빛이 스며드는 시간이 되었다.


거의 기절한 듯 잠에 들었던 희주는 도착했다는 차량 안내음에가까스로 무거운 눈꺼풀을 떼었다. 차에서 내린 희주는 보육원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아담한 크기의 오래된 단층 건물에 아이들의 지루함을 달래 줄 정도의 자그마한 놀이터가 마련된 운동장이 보였고, 나이대가 제각각으로 보이는 아이들 몇 명이 운동장에서 공놀이를 하며 놀고 있었다. 사망자가 있었을 정도의 화재였기에 건물은 여전히 검은 그을음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을음 사이로 벽면의 노란색 페인트칠과 빛 바랜 빨간색 지붕이 보였다. 원래의 모습은 검푸른 바닷가 마을에서 홀로 시선을 잡아 끄는 아기자기한 곳이었을 것이다. 희주는 민수의 입을 통해서만 들었던 은정의 얼굴을 상상했다. 


“이 곳 분이 아니시네. 어떻게 오셨어요?”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당황한 희주가 휙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검게 그을린 얼굴과 부스스한 긴 머리를 머리핀으로 대충 말아 올린 모양새가 몹시 지쳐 보이는 젊은 여자였다. 그러나 지친 기색이 역력한 가운데에서도 눈빛만은 맑고 투명했다. 그녀의 손을 꼭 붙들고 있던 네다섯 살배기 정도로 보이는 어린 남자 아이가 낯선 이의 등장에 얼른 여자의 등 뒤로 숨어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아…… 제가 이 곳 최은정 원장님 친구의 친구인데요. 이 쪽에 볼 일이 있어 지나가다가 잠깐 들렀어요. 화재 소식을 들었던 기억이 나서요. 정말 유감입니다.”


희주는 얼른 당황한 기색을 지우고 말했다. 이 곳으로 오는 기차 안에서 자신을 누구라고 소개해야 할지 한참 고민했지만, 희주와 최은정의 연결고리는 민수 밖에는 없었기에, 그냥 최은정 친구의 친구 정도로 이야기하기로 하고, 더 꼬치꼬치 물어본다면 임기응변을 발휘하기로 했다.


“그러셨군요! 최은정 원장님 친구분은 제가 대부분 아는데 친구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최은정과 아는 사이라는 말에 여자가 반색을 하며 물었다.


“김민수라고 합니다. 아주 어릴 때 친구라고 들었는데, 아실지 모르겠어요.”


“김민수…… 낯선 이름이긴 하네요. 그런데 친구분은 안 오시고 어떻게 혼자 오셨어요?”


“제 친구도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거든요.”


“아…….”

여자의 눈시울이 금방 붉어졌다. 희주의 말에 애써 눌러왔던 은정을 잃은 슬픔이 울컥하고 올라온 것이리라. 여자는 눈가에 맺힌 눈물이 떨어질 새라 얼른 셔츠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죄송해요, 갑자기. 저는 이 곳 부원장이에요. 최은정 원장님이 그렇게 돌아가시고 보육원 복구 작업에 온 신경을 쏟느라 정신없이 지냈는데, 갑자기 원장님 아는 분을 만나니 감정이 좀 주체가 안됐네요.”


“아니에요. 제가 갑자기 찾아오는 바람에…….”


“선생님, 언제 들어가요? 쉬 마려워요.”

희주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부원장의 손을 잡고 있던 아이가 발을 동동거리며 말했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이제 들어가자. 아이 화장실 데려다 주던 참이었거든요. 그럼, 편히 둘러보고 가세요. 반가웠습니다.”

부원장이 서둘러 희주에게 인사하고 보육원 쪽으로 아이의 손을 끌었다. 


“자, 잠시만요! 최은정 원장님 이야기 좀 들을 수 있을까요?”


“네? 원장님 이야기를요?”

 희주가 다급하게 발걸음을 서두르던 부원장을 붙잡자, 그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희주를 바라보았다. 희주는 마땅히 둘러댈 말을 찾지 못해 애먼 입술만 깨물었다. 


“잠시만 안에 들어가 계세요. 아이 화장실만 데려다 주고 나올 게요.”

 부원장은 희주에게 보육원 입구 쪽을 가리키며 말하고는 다리를 배배 꼬고 있는 아이를 데리고 떠났다. 


희주는 여자가 안내해 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출입문 손잡이를 열고 들어가려는데, 낯선 것 하나가 희주의 시선을 잡아 끌었다. 


벽면에 설치된 또 다른 손잡이, 손잡이의 레버를 돌리면 아래로 열리게 만들어진 창문 크기 정도의 작은 문, 그리고 초인종. 베이비박스였다. 


희주는 자기도 모르게 베이비박스의 손잡이에 손을 뻗어 천천히 문을 열었다. 아기를 눕힐 수 있는 새하얀 방석과, 출생일을 꼭 적어달라는 간절한 메시지가 함께 보였다. 희주의 머릿속에 민수의 이야기가 떠오르며, 얼굴의 솜털이 채 가시지 않은 새파랗게 어린 여자와 숙박 시설의 이름이 수 놓아진 수건에 싸인 갓난아기의 형상이 눈 앞에 나타났다. 


달빛조차 없는 새까만 밤이었지만 보육원 주변은 가로등 하나 없었다.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부모를 배려한 것이리라. 아기 엄마는 망설임없이 베이비박스의 문을 열고 아기를 눕혔다. 젖을 배불리 먹은 아기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엄마는 아기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적힌 쪽지를 함께 넣었다가,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쪽지를 다시 꺼내 자신의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아기의 생년월일이 적혀 있다면 언젠가 엄마를 찾을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엄마는 베이비박스의 문을 닫고 초인종을 한번 눌렀다. 혹시나 안 쪽에서 소리를 듣지 못 했을 까봐 두세차례 문을 세차게 두드리고 얼른 건물 뒤로 몸을 숨겼다. 


잠시 후 덜커덩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잠에서 깬 아기가 응애! 하고 우렁차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멀리서 소리만 듣고 있던 아기 엄마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 앉아 입을 틀어 막은 채 한참을 울었다. 


희주는 아직까지 문지기 문지기 대기실에 있을 민수에게 말을 건넸다. ‘민수야, 네 엄마는 자기 방식으로 너를 구한 것일지도 몰라.’


“이 쪽으로 들어오세요.”

베이비박스 앞에서 멍하니 서 있던 희주를 한동안 지켜보던 부원장이 그녀를 불렀다. 희주가 워낙 베이비박스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기에 무슨 사연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잠시 시간을 주었던 것이다.


“큰 화재였던 걸로 들었는데, 그래도 많이 복구가 되었나봐요.”

희주가 안내에 따라 보육원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내부는 여전히 어수선해 보이기는 했지만, 아이들이 생활하기에 큰 무리는 없어 보였다.


“네, 요즘은 로봇들이 24시간 복구 작업을 하니까요. 감사하게도 동네 분들도 많이 도와주셨고요. 그나저나, 최은정 원장님의 어떤 이야기가 궁금하셨어요?”


원장실로 희주를 안내한 부원장이 차 한잔을 건네며 물었다. 분명 지나가는 길에 들렀다고 말한 손님이 갑자기 최은정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한 것이 의아했던 것이다. 


“특별히 궁금한 이야기가 있다기 보다는 원장님이 워낙 훌륭하신 분이라는 이야기를 친구를 통해 많이 들었던 터라 어떤 분인지 궁금했어요.”


“아, 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희주를 바라보던 부원장이 그제야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실은 저도 최은정 원장님 손에 컸던 아이였어요. 이 곳 보육원에서 자랐거든요. 원장님은 저한테 엄마같은 분이죠.”

부원장이 자신도 보육원 출신이라는 말을 꺼내자 차를 마시던 희주가 멈칫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가 아주 말썽을 많이 부렸어요. 저를 버린 엄마를, 세상을 많이 원망했죠. 제가 5살 되던 해에 이미 기억이 온전한 상태에서 엄마가 저를 이 곳에 두고 떠났거든요. 이 곳에서도 학교에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했어요. 그런데 제가 만 12살이 되던 해에 원장님이 저에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원장님도 엄마에게 버림받고 보육원에서 자랐다고요. 정말 깜짝 놀랐고 또 너무 부끄러웠어요. 원장님께 많이 대들었거든요. 원장님처럼 사랑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은 내 마음 이해 못한다고 말이죠. 당연히 원장님처럼 사랑이 많은 사람은 온화한 부모 밑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때마다 아무 말없으셨는데, 제가 어느 정도 클 때까지 기다리셨던 모양이에요.”


부원장이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엠마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 앞으로 쓱 밀어주었다.


“원장님이 저에게 자주 하셨던 말씀이 있어요. 어렸을 때는 자신을 버린 엄마를 원망했지만, 이젠 오히려 감사하다고요. 엄마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 사정이 참 딱했겠다 싶고, 엄마에게 버려진 덕에 수많은 버려진 아이들을 살릴 수 있게 된 거라고요. 물론 제가 어렸을 때는 그 말이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어요. 원장님도 말은 그렇게 해도 속으로는 부모를 엄청나게 원망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원장님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부모가, 세상이 너희를 버렸을지 몰라. 하지만 세상 모두가 너희를 버려도 너 스스로만 자신을 지켜주면 되는 거야. 그 마음만 잃지 않으면 세상이 분명 너희를 귀하게 쓸 거야. 늘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 말 덕분에 저도 정신을 차리고 원장님처럼 갈 곳 없는 아이들 돌보는 데에 내 삶을 쓰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부원장의 눈은 우는 듯, 우는 듯했다. 희주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또 한번 민수를 떠올렸다. 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매일 같이 울고 있던 민수에게 이 말을 전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아마 이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될 줄은 몰랐겠지만, 우리 원장님은 파라스페이스에 가서도 아이들에게 그 말을 남기고 왔으니 이제 내 할 일 다 했다 그러셨을 거예요 분명히.”


부원장이 환하게 웃으며 말을 맺었다. 그녀의 말에 희주의 머릿속에 문지기 대기실에서 민수가 들려주었던 최은정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다행이네요. 제가 인간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은 다 끝내고 온 것 같고, 화재의 순간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건 잊고 싶어요. 제 삶에서 불행했거나 고통스러웠던 순간은 그 때 뿐이었으니까요.’


“분명 그러셨을 거예요.”

희주도 미소로 화답했다. 


때마침 밖에서 저녁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리자 희주는 그녀를 더 붙잡아두지 못하고 작별 인사를 건넸다. 부원장은 바쁜 시간이라 미안하다며 다음에 꼭 다시 한번 놀러 오라는 인사와 함께 현지 사람들만 아는 맛집과 숙소 정보까지 알뜰히 전해주었다. 


- 다음 장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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