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주영 Oct 13. 2024

[소설] 19장. 다시 집(1)

[판타지 장편 소설] 댓플레이스 (That Place)

 ‘문이 열렸습니다.’


 도어락에서 경쾌한 알림음이 울렸다. 희주는 ‘휴.’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지문으로 도어락의 잠금이 해제되고, 묵직한 손잡이를 당겨 현관문을 열자 익숙한 집냄새가 그녀의 코끝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제서야 희주는 정말 집에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엠마는 좀 더 입원해서 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희주의 퇴원을 만류했지만, 희주는 빨리 집에 가고 싶다며 고집을 피웠다. 사후 세계의 기억을 오롯이 간직한 채로 엠마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을 아무렇지 않게 대해야 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엠마는 사고 이후 활동 중단 상태였고, 새로운 매니저를 구하지 않은 상태였다. 엠마는 희주에게 앞으로 한달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쉬겠다는 다짐을 받는 조건으로 희주의 퇴원을 허락해주었고, 언제든 매니저 자리로 되돌아오라고 했다. 엠마의 따뜻한 배려에 희주는 그 동안 엠마를 피곤하게 여겼던 것이 미안하게 여겨졌다. 


 집은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한 가지, 리노가 사라졌다는 것만 빼고 말이다. 희주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리노부터 찾았다. 사고 당일 리노에게 충전기를 연결해 두었기 때문에, 자신의 칩 신호가 돌아오면 리노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연락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리노는 감감 무소식이었다. 분명 리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것이라 직감했는데 역시나였다. 리노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희주는 기운이 쭉 빠져 짐가방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져 버리고 침대 위에 털썩 널브러졌다. 침대 옆 협탁으로 손을 뻗어 스탠드 조명의 스위치를 눌렀지만 불이 켜지지 않았다. 사고 전부터 몇 달간 관리비 납부가 밀렸었는데, 드디어 전기가 끊긴 모양이다. 희주는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전기가 모두 끊겨 가전 제품 작동 소리조차 들리지 않자, 집 안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 희주는 자신의 온 몸을 휘감은 그 고요함 속에 온전히 빠져 들었다. 사고 이후 중간 지대로 가는 오솔길에서 느꼈던, 암흑과도 같던 고요함 같았다. 


 병원에서 깨어난 이후 희주의 머릿속에는 온통 사후세계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어쩌다 자신이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인간 세상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유일한 가능성은 마지막에 마셨던 망각 주스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렇지만 망각 주스 관리가 얼마나 철저하게 되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던 희주는 그 또한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희주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생각들을 날려 버리려 애썼다. 원인이 무엇이었던 간에 그녀가 사후 세계의 기억을 가지고 다시 인간 세상에 돌아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른 퇴원 탓인지 몸에 기운이 없고 다리가 천근만근이었다. 다행히 냉장고에는 마지막 하나 남은 활력 음료 한 병이 그대로 있었다. 전기가 나가버린 냉장고 안에 들어 있던 활력 음료는 뜨뜻미지근했지만, 희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활력 음료를 들이켰다. 이제야 좀 기운이 나는 것 같다. 


 희주는 일단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앞으로 다시 살아가려면 밀린 월세도 내고, 관리비도 내서 전기부터 다시 들어오게 해야 한다. 벌써부터 삶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희주는 여전히 인간 세상으로 되돌아온 자신의 선택이 잘 한 것이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여보세요?”

 “아주머니, 저 희주예요.”

 “희주씨… 정말 희주씨 맞아?”

 “네, 저 맞아요. 좀 전에 병원에서 퇴원해서 집에 왔어요.”


 “세상에… 이런 기적이……. 뉴스에서 사고 소식 접하고 연락해 봤더니 병원에서 전화를 받더라고.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혹시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집은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었어. 희주씨, 다행이야. 정말 기적이야.”


 주인집 아주머니는 놀란 마음을 감추지 않고 떨리는 목소리로 ‘이건 기적이야.’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희주의 머릿속에 주인집 아주머니의 말과 그를 인간 세상으로 보내주었던 문지기의 말이 겹쳐졌다. 그의 말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어차피 이 곳에서의 기억은 지워질 테고, 당신은 그저 잠시 코마 상태에 빠졌다가 기적처럼 다시 살아나게 된 것, 그 뿐이니까요.’


 “희주씨, 리노는 내가 데리고 있어.”

 “네? 리노를요?”


 “응. 실은 사고 소식 듣고 한 참 뒤에야 리노 생각이 나서 집에 찾아갔더니 리노가 현관문 보안을 해제해줬어. 내가 찾아 갔을 때는충전이 제대로 안됐는지 에너지가 3% 밖에 남아 있지 않았더라구. 너무 오래된 모델이라 고철로 분리수거를 해야 하나 싶다가 마음이 쓰여서 그냥 우리집 창고에 넣어놨거든. 다시 충전하면 쓸 수 있을지도 몰라.”


 리노의 소식을 들은 희주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희주가 <남은마음> 무게를 측정했을 때 유일하게 떠올랐던 존재였던 리노. 희주는 얼른 리노를 만나 뭉툭하고 차디찬 그의 본체를 꽉 끌어안고 싶은 마음이었다. 


 “시간될 때 우리집에 와서 리노를 데려가.”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그리고 월세랑 관리비는…….”


 “그건 신경 쓰지마. 내가 우선 처리해 놓을게. 당분간 다시 깨어난 기적을 만끽하라고.”


 주인집 아주머니의 말에 희주는 그만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동안 떨리는 목소리를 고르던 희주는 다 들어가는 소리로 ‘감사합니다.’를 겨우 내뱉고 전화를 끊었다.




 “일어나 희주! 오늘 드디어 그 회사에 가보기로 한 날이잖아! 내가 팔만 있었어도 옆구리를 찔러 깨우는 건데. 요즘은 팔다리만 따로 구매해서 장착할 수 있다고. 나도 제발 해주면 안돼?”


 리노가 이른 아침부터 시끄럽게 굴며 희주에게 소리쳤다. 팔다리가 없는 구형 모델인 리노는 희주의 침대 옆에서 시끄럽게 소리치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희주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깨기 위해 애썼다. 몸 상태가 좀처럼 예전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 같다. 


 “그럴 돈이 어딨어 리노. 내 지갑 사정은 네가 더 잘 알잖아.”

 희주가 겨우 이불 속에서 나와 잔뜩 잠긴 목소리로 리노에게 말했다. 희주는 늘 하던 것처럼 물을 한잔 마시고 냉장고에서 활력 음료를 꺼내 단숨에 들이켰다. 고맙게도 엠마가 고함량의 최고급 활력 음료를 세 박스나 주문해 주었다.


 “혼자 갈 수 있겠어?”

 리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희주에게 물었다.


 “당연하지. 요즘 같은 세상에 너처럼 몸통만 있는 로봇을 끌고 다닌다면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될 걸.”

 희주가 농담 섞인 말투로 답했지만, 리노는 꽤나 심통이 났는지 “쳇, 내가 팔다리를 어디선가 구해 오고야 말거야.”라고 툴툴대며 희주에게 오늘의 목적지를 전송해주었다. 바로 <파라스페이스 입장 컨설팅 회사>였다. 


 며칠 전 주인집 아주머니와 통화 후 리노를 다시 집으로 데려온 희주는 리노를 수동 충전시킨 후 다시 전원이 들어오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리노의 전원이 다시 들어오자 희주는 한 동안 그를 얼싸안고 대성통곡을 하는 바람에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희주는 리노에게 그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리노는 가십을 참지 못하고 떠들어대는 인간들처럼 입이 가볍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는 못할 이야기가 없었다. 리노는 희주의 이야기를 의심없이 들어주었다. 


“그럼, 나중에 진짜 죽음이 찾아왔을 때 <댓플레이스> 입장 심사에 바로 통과할 수 있도록 미리미리 준비를 하면 되겠네.”


희주의 이야기를 유심히 듣던 리노가 심플하게 결론을 내며 말했다. 희주는 “어, 그……그렇지.”하며 말을 더듬었다. 마음 속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던 생각이 타인의 입을 통해 밖으로 나오니 이상하리만큼 당황스러웠지만 덕분에 먼지처럼 폴폴 날리던 희주의 어수선한 마음이 물 한 바가지를 끼얹은 것처럼 차분해졌다. 


리노는 희주의 입에서 나온 키워드들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리서치를 시작했다. ‘댓 플레이스’ ‘망각 주스’ ‘남은 마음’ ‘입장 심사’ ‘입장 컨설팅’ 등등. 리노의 리서치 결과 중에는 한림에게 들었던 ‘착한 일 알선 회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희주는 그녀와 함께 망각 주스를 마셨던 한림이 떠올랐다. 한림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망각 주스는 정상이었을까?


“희주, 이 회사 한번 볼래? 좀 특이해.”

리노가 화면에 어떤 회사의 정보를 띄웠다. 제대로 영업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정도로 제대로 된 정보가 없는 곳이었다.


“남은 마음 교정 회사?”

희주의 눈이 번쩍 떠졌다. 희주는 화면에 띄워진 회사 소개를 읊조리듯 읽어내려갔다.


“파라스페이스의 진짜 이름, <That Place>으로 안내합니다…….”

“여기까지만 읽어봐도 엄청 구체적이지 않아?”


리노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희주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일테지만, 사후 세계를 겪고 온 희주는 누군가 아주 구체적으로 사후 세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분명, 자신처럼 기억을 간직한 채로 인간 세상에 돌아온 사람이 만든 회사가 틀림없었다.


“한림이 만든 회사가 아닐까?”

리노가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는 희주에게 물었다. 


“음… 그건 아닐거야.”

희주도 이 회사의 이름을 봤을 때 가장 먼저 한림을 떠올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한림이라면 이렇게 초라하고 형편없는 상태로 회사 소개를 만들어두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한림도 그녀처럼 기억을 간직한 채로 깨어났는지 확실하지도 않았다.


“좋아. 일단 여기부터 가봐야겠어. 리노, 여기에 상담 예약 좀 부탁해.”




[남은 마음 교정 회사]


“헉! 다, 당신!”

희주의 입 밖으로 자기도 모르게 비명이 튀어나왔다. 희주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떡 벌어진 입을 다물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배우라고 해도 믿을 만한 조각 같은 외모, 훤칠한 키, 안목이 없는 사람이 봐도 명품이 분명한 최고급 수트, 분명 젊어 보이는 외모이지만 나이를 가늠할 수 없게 만드는 압도적인 분위기. 희주의 눈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한림이었다.


“어서 오시우. 나를 아시는가?”

한림이 여전히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할아버지 같은 느긋한 말투로 희주에게 인사를 건넸다. 한림은 희주를 기억하지 못했다.


“아, 안녕하세요? 아닙니다. 제가 아는 분과 너무 닮으셔서……. 죄송합니다.”

희주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90도로 숙여 한림에게 인사했다. 


“허허, 아는 분이 꽤나 미남이었나 보구먼. 그나저나 이 회사 대표님이 방금 자리를 비웠는데, 금방 돌아올 테니 잠깐 소파에 앉아 기다리구려. 이름이 어떻게 되시우?”


“아……. 저는 한희주라고 합니다.”


희주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대수롭지 않게 이름을 묻는 한림이 너무 낯설었고, 서운한 마음마저 들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보니 한림의 망각주스는 정상이었던 것 같다. 한림은 희주와 너무나 다른 세상에서 살았던 사람이었기에 다시는 마주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에 마주치다니. 희주는 한림의 얼굴을 보는 순간 사후세계의 모든 일들이 정말 꿈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생생하게 와닿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하하하핫!”


희주가 눈가에 그렁거리는 눈물을 떨구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데 갑자기 한림이 박수를 치며 숨이 넘어갈 듯 웃기 시작했다. 


“이 순간을 내가 얼마나 고대했는데!”

한림이 두 팔을 벌리며 희주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희주는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희주, 이렇게 또 만나는구려! 허허!”

한림은 여전히 웃음을 참지 못한 채로 희주를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 


“하, 한림?”

희주가 자신을 와락 끌어안은 한림을 떼어 내며 그의 양 팔을 꽉 붙잡고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희주의 바들바들 떨리는 손길이 한림의 팔뚝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맞아요, 맞수다! 언젠가 당신을 다시 만나면 꼭 이렇게 놀래켜 주리라 생각했는데, 상상이상으로 쾌감이 엄청나구먼!”

한림이 여전히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그는 거의 끅끅거리고 있어서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세상에…… 그럼 당신도 다 기억이 나는거예요? 우리 둘 다 망각 주스가 잘못된 거였죠? 그렇죠!”

“그래요! 이 이야기를 오늘 하게 될 줄이야. 이 쪽으로 앉아요. 그 동안 입이 근질거려서 또 한번 죽을 뻔 했수다.”


한림이 희주를 푹신한 가죽 소파로 안내한 후, 차 한잔을 건넸다. 혓바닥을 델 정도로 뜨거운 차였지만 희주는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당신이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면 우리가 문지기로 일할 때 내가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던게로군. 파라스페이스 입장 컨설팅을 해주는 회사에 대한 이야기 말일세.”


한림의 말에 희주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어떻게 망각 주스가 잘못될 수 있었던 것인지, 그리고 한림은 자신이 모르는 무슨 비밀을 또 알고 있는 것인지, 희주는 도저히 말이 되는 시나리오가 써지지 않았다.


“그 때, 이 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다가 끊겼던 기억이 나는구려. 비상벨이 울려서 당신이 아기를 심사하러 갔었지 아마.”

“아! 맞아요. 기억나요! 안 그래도 그 다음 이야기가 너무 궁금했던 참이었는데, 그 이야기를 인간 세상에서 들을 줄은 상상도 못했네요.”

희주가 흥분한 나머지 한림의 말을 끊고 빠르게 대답했다. 한림은 그런 희주를 향해 슬쩍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죽기 전 파라스페이스 입장 컨설팅 하는 회사들에 한창 빠져 있을 때, 아주 재미있는 회사를 하나 발견했수다. 규모도 아주 작고, 사실 아주 엉터리로 운영되고 있는 회사였지. 누가 봐도 사업 수완이 전혀 없는 사람이 무작정 시작한 회사로 보였소. 그럼에도 내가 그 회사에 관심이 갔던 이유는, 다른 어떤 회사들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아주 이상하고도 구체적인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었수다.”




[2년 전, 남은 마음 교정 회사]


한림은 한 건물 입구에 서서 자신이 맞게 찾아온 것인지 한참을 재확인했다. 그의 내비게이션은 재개발이 되지 않은 오래된 건물들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 그 중에서도 인적조차 드문 특히나 낡은 구역에 위치한 3층짜리 건물의 지하를 분명히 가리키고 있었다. 건물에는 그 흔한 간판조차 없었다. 그는 미심쩍은 얼굴로 지하로 향하는 계단에 한 걸음을 내딛었다. 한 발자국 내려갈 때마다 습한 기운과 함께 곰팡내가 점점 짙어졌다. 지하층으로 완전히 내려온 한림의 눈 앞에 잔뜩 녹이 슨 두터운 회색문이 보였고, 문 중앙에는 <파라스페이스의 진짜 이름, ‘댓플레이스’로 안내합니다. – 남은 마음 교정 회사> 이라는 팻말이 손글씨로 써 붙여 있었다. 

 

“아! 벌써 오셨습니까?”


한림이 노크를 하려는 순간, 굳게 닫혀 있던 회색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남자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그를 반겼다. 한림은 빠르게 그의 모습을 훑었다. 반쯤 벗겨진 머리를 가까스로 감추고 있는 곱슬 머리, 주름 가득한 얼굴, 검게 그을린 피부 곳곳에 보이는 주근깨와 거뭇거뭇한 기미, 흰색인지 회색인지 모를 낡은 티셔츠, 무릎이 나온 청바지까지. 어느 하나 회사의 대표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차림새였다. 


“박지승 대표님이십니까? 미리 연락 드렸던 곽한림이라고 합니다.”

“누추한 곳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한림은 그에게 꾸벅 인사를 건네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댓플레이스는 지승이 사무실과 생활을 겸하고 있는 곳인 것 같았다. 낡은 냉장고와 간이침대가 보였다. 좁고 어수선했지만,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최대한 단정히 치우려고 한 흔적이 보였다.


“제가 사업 경험이 처음이라 잘은 모르지만, 엄청난 투자자시라고 들었습니다.”

지승이 오래된 찻잔에 조심스레 차를 부으며 한림에게 말을 건넸다.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허허, 그렇게 소문이 난 모양입니다. 나이 들어 소일거리로 재미있는 것들을 찾아 다니고 있을 뿐입니다.”

한림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대답했다.


“우리 회사는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실은 한 동안 파라스페이스 입장 컨설팅 회사들을 찾아 다녔어요. 처음에는 무슨 이런 얼토당토 않은 회사들이 있나 싶었지만 몇 군데 찬찬히 뜯어보니 나름대로 구체적인 성과를 내고 있는 곳도 있어서 흥미가 생겼죠.”


“그 회사들 죄다 엉터리입니다!”

지승이 갑자기 흥분하며 한림의 말을 끊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반응에 한림이 멈칫하며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 놓았다.


“아… 죄송합니다. 어처구니없는 회사들이 순진한 사람들을 상대로 돈을 벌어먹고 있는 판국이 화가 나서 제가 잠시 흥분했습니다.”

“그럼, 당신의 회사는 엉터리가 아니란 말입니까? 뭐가 특별한 거죠?”

한림이 지승의 사무실을 쓱 둘러보며 말했다. 어디를 보나 엉터리 회사는 이쪽인 것 같았다.


“저는 진짜 사후 세계를 경험하고 온 사람입니다.”

지승이 한림 쪽으로 의자를 바짝 당겨 앉으며 말했다. 한림은 곤란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목 시계를 힐끔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시간 낭비를 한 것 같다.


“물론 믿기 어려운 이야기라는 거 압니다. 저도 주변에 이 이야기를 해 보았지만, 모두 죽다 살아나서 미친 것이라는 반응뿐이었죠.”

“아무래도요.”

한림의 심드렁한 반응에 지승은 조바심이 나 더욱 빠르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는 자동차 정비공이었습니다. 제 실수로 정비하던 자동차의 자율 주행 기능을 잘못 건드려 자동차가 제가 있는 쪽으로 급발진하며 그 차에 깔리고 말았죠. 저는 바로 의식을 잃었고 죽음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의 길로요?”


“네, 맞습니다. 우리는 보통 죽음이 한 순간에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분명 겪었습니다. 죽음으로 가는 아주 좁은 길이 있어요. 다음 목적지까지 걸어가는 시간이 한참 걸립니다. 아, 걸어 간다고 표현하는 것이 좀 맞지 않네요. 그냥 둥둥 떠서 가는 거라서요.”

지승이 반쯤 벗겨진 그의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어갔다.


“한 참을 가고 있는데, 한 줄기 빛이 보였어요. 저는 그 빛을 따라 갔고, 젤리처럼 아주 탱글탱글한 막을 뚫고 어떤 공간에 들어갔습니다. 바로 삶과 죽음의 경계라고 불리우는 <중간 지대>이라는 곳이었어요.”


“계속 해보시죠.”


한림은 점점 그의 이야기에 흥미가 생겼다. 누가 들어도 미친 소리처럼 들리는 이야기임에 틀림없었지만, 한림은 그가 미친 사람이나 거짓말을 할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고, 꾸며낸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매우 구체적인 내용들이었다. 투자자로 살아온 긴 세월동안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키워온 그의 안목은 늘 정확했다.


“그 곳에는 이제 막 죽음을 맞이한 수많은 영혼들이 모여 있었고, 저는 자신을 문지기라고 소개하는 어떤 이의 안내를 받아 심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뉴스에서 보셨죠? 어디론가 사람들이 들어가고 사라지는 모습을요.”


“네, 그건 이미 알려진 사실이죠.”


“저는 그 곳에서 <남은 마음>의 무게를 측정해야만 했습니다. 삶에 남아 있는 마음이 얼마나 무거운지 측정하고, 기준에 따라 어떤 이들은 인간 세상으로 되돌아가고, 어떤 이들은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바로 우리 인간들이 파라스페이스라고 부르는, <댓플레이스> 입장 심사를 보는 곳으로 말이죠. 파라스페이스의 진짜 이름은 바로 <댓플레이스>입니다.”


“<댓플레이스>이라…… 이름이 참 단순하고 허술하군요.”


“저는 <남은 마음>이 너무 무거웠어요. 남은 마음이 너무 무거운 사람은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인간 세상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망각주스를 마시고 인간 세상으로 되돌아오게 되었죠.”


“망각주스요?”


“네, 사후 세계에서의 기억을 지워주는 주스입니다.”


“상당히 구체적이네요.”


“그럼요! 제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이니까요.”

지승이 또다시 흥분하며 외쳤다. 


“그런데 뭐가 잘못되었는지, 깨어나보니 모든 게 기억이 나지 뭡니까. 처음엔 저도 꿈을 꾼 것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엔 모든 것이 너무 생생했어요. 망각 주스를 마실 때 그 끈적한 주스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느낌까지 전부 말입니다.”


“자, 당신의 말을 종합하자면 사람이 죽으면 어떤 길을 따라 <중간 지대>에 가게 되고 그 곳에서 삶에 남기고 온 마음의 무게를 측정한다. 점수에 따라 어떤 이들은 인간 세상으로 되돌아가고, 어떤 사람들은 파라… 아니, <댓플레이스> 입장 심사를 받으러 간다. 맞나요?”


“네 맞습니다. 역시 똑똑하신 분이라 바로 이해를 하시네요.”


“그럼, <댓플레이스> 입장 심사에서도 남은 마음의 무게를 측정하는 건가요?”


“아, 그건…….”

막힘없이 말을 이어가던 지승이 갑자기 말끝을 흐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히 제가 거기까지 경험해 본 것은 아니지만, 분명 남은 마음의 무게가 중요한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맞아요! 분명 영향이 있을겁니다.”


“거기까진 정확하지 않군요?”


“굳이 따지자면요…….”

한참 동안 자신있게 말을 이어가던 지승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좋아요. 그럼 다시 돌아가서, 어떻게 이런 회사를 만들 생각을 했습니까?”


“이상한 일을 겪고 깨어난 후에 혹시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있는지 백방으로 알아보다가 파라스페이스 입장 컨설팅 회사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부 회사들은 엄청난 돈을 벌고 있더군요. 그런데 전부 사기꾼 같은 곳들 뿐이었습니다. 대표적인 게 착한 일 알선 회사, 그거였어요. 착한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결국 남은 마음의 무게를 가볍게 만드는 게 중요한 데 말이죠. 답답했습니다. 저 담배 한 대 태워도 될까요?”


지승은 말을 하다가 분통이 터지는지 담배를 입에 물었다. 한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승은 고개를 돌려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 들였다가 후, 하고 깊게 내뱉었다.


“그래서, 저라도 진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남은 마음을 가볍게 하려면 마인드 컨트롤과 행동 교정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일을 시작하긴 했는데…… 제가 사업 수완도 없고 뭘 어떻게 발전시켜야 할지 몰라 헤매고 있었는데, 이렇게 연락을 딱 주셔서, 정말로 놀랐습니다.”


지승이 담뱃불을 끄고 간절한 표정으로 한림을 바라보았다. 그의 진정성이 전해지기는 했지만, 사실상 아무 근거도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만 가지고 해 볼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어 보였다.


“박지승 대표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해주신 내용 토대로 회사에서 검토 후에 투자 의견 드리겠습니다. 온 김에 제 명의로 회원 가입하고 가죠.”


그냥 인사를 하고 나오려던 한림은 형편없는 사무실 상태를 쓱 둘러보고는 기부를 하는 마음으로 가입에 동의하고 회비를 일시불로 납부하기로 했다.


“저, 정말입니까?”

지승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거의 울 듯이 소리쳤다.


“아, 회사 소개서 한 부 가져가도 될까요? 회사에 가서 직원들에게 설명할 때 쓰려고요.”

한림이 테이블에 수북히 쌓인 어설프게 만든 회사 소개서를 예의상 한 부 손에 들며 말했다. 


“그럼요, 그럼요.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당신이 죽은 후에 그 박지승이라는 사람이 했던 이야기가 전부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겠네요.”

한림의 이야기를 유심히 듣고 있던 희주가 말했다.


“그렇지. 결국 당시에는 예의상 회원 가입만 해놓고 투자를 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죽고 나서야 그 회사를 제대로 키워보지 못했던 것이 아쉬웠수다.”


“그럼, <남은 마음> 무게 측정할 때 되돌아가지 그러셨어요? 왜 그 때 인간 세상으로 되돌아가는 선택을 하지 않으셨어요?”


“허허, 그 이유는 희주 당신과 똑같지 않았겠소. 당신도 처음부터 인간 세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선택지가 있었지만 결국 <댓플레이스> 입장 심사를 보는 쪽을 선택했었지.”


“맞아요. 지긋지긋한 삶으로 별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거든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내 <남은 마음>의 무게를 확인하고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나는 별로 고민하지도 않았다우. 인간 세상이 너무 지루했고, 무엇보다 당연히 <댓플레이스>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내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지. <댓플레이스> 입장 심사에 계속 탈락한거야. 언제나 탄탄대로, 성공의 길 만을 걸어왔던 내가 처음 마주했던 실패였다우. 그제서야 내 선택을 후회했지만, 이미 늦을 대로 늦은 상태였소.”


“그랬었죠.”

희주가 한림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말이지 모를 대답을 내뱉고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한림의 긴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차는 이미 차갑게 식은 상태였다.


“그럼, 다시 깨어난 후에 박지승 대표의 회사를 찾아온 건, 제대로 투자해서 사업을 키워볼 생각이셨던 건가요?”


“그 이유도 있었소. 사람들이 한 사람의 말은 의심해도 두 사람, 세 사람이 같은 이야기를 한다면 조금씩 믿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자네를 기다렸다우.”


“제가 찾아올 걸 알고 계셨어요?”


“자네도 기억을 온전히 가지고 있으니 언젠가는 이 회사를 발견하고 찾아오리라는 한 줄기 기대가 있었지. 미리 박지승 대표에게 언질을 주었다네. 혹시 한희주라는 여자가 상담 예약을 하거든 나에게 꼭 알려달라고. 이렇게 깜짝 놀래켜 주려고 연락하고 싶은 걸 꾹 참았수다.”

한림이 희주의 깜짝 놀란 표정을 떠올리며 껄껄 웃었다. 한림의 말에 희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 기억이 남아 있다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희주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한림은 그런 희주가 재미있다는 듯,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차가 이미 식었을텐데 한 잔 더 드시우. 지금부터가 당신이 들어야 할 진짜 이야기니까 말이야.”

한림이 희주의 빈 찻잔에 뜨거운 차를 한번 더 부으며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 다음 장에서 계속



- The image created by CHO JUYOUNG with Midjourney-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